<71화>
“내일 수도로 올라간다.”
“내일 바로요?”
헤이녹스의 말에 렌자드가 놀라 되물었다.
“동부에 더 안 있고요?”
식기까지 꽉 붙잡으며 말하는 렌자드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후작 부인이 미련이 남는 듯 말했다.
“우리도 정말 아쉽구나. 하지만 공작이 더 이상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고 하니 어쩌겠니.”
그녀의 말에 후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 자리는 그렇게 오래 비워 둘 수 있는 곳이 아니지. 공작이 수도로 가야 하는 지금, 후계자인 체드만이 서부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가문들은 쉽게 생각하지 못한단다.”
“네에…….”
다정하지만 언뜻 단호하기까지 한 말에 렌자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록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체드만이 물었다.
“록시가 대신관에게 발현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동부로 왔던 거잖아요.”
“설마…….”
렌자드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말했다.
“록시 혼자 남아요?”
헤이녹스와 후작 부부가 모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자, 렌자드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이에요?”
“록시, 너는 동의했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한 거야?”
애써 차분하려 노력하며 묻는 체드만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혼자 여기 있으려고 해?”
렌자드는 들고 있던 식기를 모두 내려놓은 채 나에게 다급히 물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요새 자주 못 놀아서 그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요즘 너무 훈련만 했지? 서운했으면 미안해. 그냥 나는 너도 수업받느라 바쁜 것 같아서…….”
“정말 그런 뜻이 아니구…….”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나는 너랑 계속 놀고 싶은데…….”
“렌자드, 잠깐만.”
렌자드가 내게 쏘아붙이듯 말하는 걸 보던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록시가 얘기해 줘. 네가 남고 싶다고 한 거야?”
“아.”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생각보다 더 크게 반응하는 둘의 표정에 쉽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미안함에 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록시나, 고개 들어라.”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헤이녹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록시나가 이곳에 신성력 때문에 왔다는 걸 잊은 건가?”
그는 고저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많이 괜찮아졌다지만 아직 불안정하다. 록시나에게는 안정을 시켜 줄 매개체가 필요해.”
“아…….”
“앞으로 록시나는 아슬론 윈터쳇과 함께 제국을 돌아다니면서 도움이 될 매개를 찾을 거다. 너희들은 본인의 할 일에 집중하고.”
렌자드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동생과 헤어진다는 게 아쉽겠지만, 지금은 각자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야.”
후작 부인의 충고와 같은 다독거림에 우리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식사는 얼추 끝난 것 같군, 나는 이만 올라가 보겠네.”
후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후작 부인도 따라 일어났다.
헤이녹스마저 업무를 위에 자리를 뜨자, 식탁 위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렌자드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왜 하필 내일이야.”
“미안.”
“미안할 필요는 없어, 록시. 너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그렇지만…….”
체드만은 나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다정한 말투도, 눈부신 미소도 여전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체드만마저 식당을 떠나려고 하자, 나는 황급히 외쳤다.
“잠깐만……!”
나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내 얘기 좀 드러바…….”
솔직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리 말하지 못한 것과 이제야 가까워졌는데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허전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점점 깊어지고만 있었다.
‘근데도 나는 떠나야 하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정말 기회가 없었다. 떠나는 게 당장 내일이었다. 더 이상 나에게 다음은, 그다음 날 같은 미룸은 없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아내. 나도 고민이 돼서 바로 얘기 못 해써.”
아슬론에게 제국을 함께 돌아다니자는 제안을 받고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과연 잘 알지도 못하는 공간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직 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시간 낭비가 되는 일은 아닐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매개를 찾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 시간 동안 멀어질 인연이 걱정되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결국 떠나겠다는 선택을 한 건 나니까.’
“그치만 정말로 집이 시러서 가는 건 아니야. 나는 그냥…….”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모두가 우러러볼 만큼의 신성력을 가지고도 그 힘 때문에 단명을 한다면.
그래서 처음 생긴 가족이라는 존재를 잃어야 하고, 또 그들에게 상처를 주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빨리 방법을 차자야 더 오래 가치 살 수 이짜나.”
친한 거 좋고, 같이 어울리는 것도 다 좋은데, 그건 우리가 모두 살아 있을 때 이야기잖아.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나에게 죽음이란 먼 존재였으니까.
‘근데 요즘은 내가 너무 불안해.’
문득 신성력 때문에 찾아오는 통증이 너무 괴로워. 괴로울 때마다, 숨이 멎는 순간을 떠올렸다.
“난 진짜 가치 놀고 시퍼. 매일 귀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조아쓰니까.”
너무 즐거웠으니까, 사랑받는 기분이라는 거, 너무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나 한 번만 믿어 주면 안 댈까……?”
나 정말 건강해져서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만 싶은데.
“웅? 한 번만…….”
나는 이 부탁이 진심임을 보여 주고 싶었다.
둘의 표정을 보기가 무서워 고개는 푹 숙인 채였지만, 두 손을 모은 채로 기도하듯 말했다.
“…….”
말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그,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나?’
각자 할 일을 하고 다시 만나자는 게 무리한 부탁인 건가?
점점 몸집이 커지는 불안한 가정에 내가 살짝 고개를 들려는 찰나,
“……풉!”
‘뭐지……?’
무언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소리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머, 머야?”
‘왜 웃어?’
놀랍게도 체드만과 렌자드는……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렌자드가 웃음이 터진 상태였고, 체드만은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지만.
“왜 우서!”
“아니, 미안. 근데, 큽!”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음을 참는 렌자드의 모습을 보자니 허탈해졌다.
‘내가 얼마나 조심스레 말했는데……!’
나로서는 정말 오래 고민했기 때문에 말하는 데에도 신중했다. 혹시나 렌자드와 체드만과 멀어질까 봐.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얘기한 건데!”
“록시, 정말 미안. 나는 그냥…….”
말을 이으려던 체드만이 입술을 꽉 깨물며 잠깐 말을 멈추었다.
“얼레?”
‘또 웃어?’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내 진심이 그렇게도 우습냐?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나 갈래.”
‘내 진심도 몰라 주고!’
속상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하자, 체드만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붙잡았다.
“잠깐, 록시! 우리 얘기도 좀 들어 봐. 같이 겪어야 할 일이잖아.”
솔직히 당장 밖으로 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체드만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사실이기는 하니까.’
“일단 말해 바.”
나는 새침하게 말한 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체드만은 나를 다시 앉힌 뒤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생각했었어. 우리가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쯤은.”
“렌쟈드도?”
“응. 너는 특별하니까.”
둘 모두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네 선생님이 왔을 때부터?”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렌자드의 대답에 놀랐다.
“어, 저, 정말?”
“저번에 형이 선생님이 어떠냐고 물어본 것도 그거 때문이야.”
“아…….”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나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아슬론이 내 스승으로 온 것도 그저 나를 가르치기 위함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먼저 눈치를 챈 거였구나.’
어쩐지 이상하게 아슬론을 견제하거나 괜찮냐고 물어보고, 괜찮다고 대답해도 의심하거나 믿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상하긴 했다.
“그때부터 알았으면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너도 알고 있는 일일 줄은 몰랐으니까.”
체드만의 말에 옆에 앉은 렌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금방 말할 줄은 몰랐지. 나중에 너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도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이별이 다가올 줄은 몰랐어.
‘벌써 알고 있었다니…….’
“근데 왜 웃은 거야?”
‘내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데 왜 웃은 거지?’
의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자, 체드만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금방이라도 멀어질 것처럼 말하는 게 좀 서운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아…….”
“맞아. 왜 우리가 영영 안 볼 사이처럼 말해?”
렌자드는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어디 먼 나라로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다 제국 안에 있는 거잖아.”
“그러, 치?”
“위험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니까. 편지하면 되지.”
‘그러니까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건데.’
“그럼 렌쟈드는 왜 그래써?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처럼 말해짜나.”
“아, 그건, 너무 빨라서 놀랐거든.”
렌자드는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아버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시니까 조금 무섭기도 해서, 정말 우리가 다시 못 볼까 봐.”
“그럼 웃은 거는?”
“그건, 네가 자꾸 미안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우리가 멀어질 일은 없을 거 같아서.”
그는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멀어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