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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70)화 (70/106)

<70화>

“록시나는 좀 어떤가.”

헤이녹스의 질문에 아슬론이 가볍게 말했다.

“양호해, 생각보다 습득도 빠르고. 신성력이 상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헤이녹스는 북부에 머무는 와중에도 자주 록시나를 떠올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데다가 아슬론을 보내긴 했지만 그가 유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잘 지낸 것 같더군.”

헤이녹스는 얼마 전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록시나와 체드만은 화해했나? 체드만이 뭔가 잘못을 한 것 같던데.”

“아, 그거.”

둘이 화해하는 모습을 떠올린 아슬론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둘이 감동적인 화해를 했지. 이젠 잘 지내는 것 같던데.”

“……그런가.”

헤이녹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도에 가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수도는 왜?”

“황궁에 갈 일이 생겼다. 서신으로만 주고받기엔 중대한 사안이라.”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동안.”

헤이녹스는 아슬론을 고요히 바라보며 말했다.

“록시나를, 잘 부탁하네.”

그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아슬론이 얼굴을 굳혔다.

“잠깐이 아니구나.”

“아마도.”

“나야 괜찮긴 한데.”

헤이녹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체드만은 후계자 수업이 있어 더 이상 동부에 머물 수 없다. 통신석만으로 수업을 받는 것엔 한계가 있으니. 렌자드 역시 기사단 훈련이 있어 수도로 올라가야 하고.”

“그럼 둘째 도련님은 데리고 올라갈 거야?”

“그래야겠지.”

“그럼 록시나만 이곳에 머무는 건가?”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아슬론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면 록시나는 내가 데리고 돌아다녀도 되나?”

“어디를 말이지?”

헤이녹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아직 록시나는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아닌 걸로 아는데.”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런 상태가 아니라서.”

아슬론은 최근 그가 보았던 록시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젠 록시나도 신성력은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아. 비록 견고하거나 기술이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록시나가 신성력을 다룰 줄 안다고?”

그 말에 헤이녹스는 정말 놀랐다. 그가 북부로 떠나기 전만 해도 언제 폭주할지 몰라 아티팩트에만 의지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지?”

아슬론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서 산책 중인 록시나를 바라보았다.

“안정시킬 매개가 필요해. 지금도 신성력을 조금 쓸 수 있다 정도지 폭주의 위험에서 벗어난 건 아니니까.”

“돌아다니는 목적이 안정시킬 매개를 찾는다는 건가?”

“그렇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제국 내에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않나.”

“제국 내에 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지?”

헤이녹스는 어쩐지 자신 있어 보이는 아슬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매개는 사람이나 국가를 가리지 않는 걸로 아네만.”

“원래는 그렇지. 그런데 록시나는 좀 경우가 달라.”

신관은 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르타나 여신을 섬기는 건 대 루엔트 제국뿐이었다.

“신성력이 발현할 때 꿈을 꿨다고 하더군. 그것도 여신이 등장하는 꿈을.”

“……여신이 꿈에 나왔다고?”

여신이 누군가의 꿈에 나온다는 건 헤이녹스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얘기였다.

“아르타나 여신은 제국의 시초이지. 그런 신이 한 제국민의 꿈에 등장했다는 건 매개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는 거다.”

신이 직접 준 힘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록시나의 매개가 될 수 있는 건 제국 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여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제국 안을 돌아다니겠다는 말이군.”

“그런 셈이지.”

헤이녹스는 고민했다. 선뜻 록시나를 보내기엔 걱정이 되었고, 가지 말라 붙잡기에는 상태가 너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헤이녹스의 갈등을 아는지 아슬론이 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나도 떠돈 전적이 있으니까 제국 곳곳을 잘 알거든.”

“제국을 떠도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들 텐데. 자네는 왜 록시나에게 그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지?”

그가 아슬론을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상 아슬론은 이 테리온즈 저택에도 억지로 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아슬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의 계시를 받았어. 록시나를 지키라는 신의 계시.”

“여신에게 말인가?”

“그래.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는 그 목소리를 부정할 수 없지. 배신 같은 건 없다. 그런 단어는 내 신념에 없어.”

아슬론은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달리 장난기 없이 진지한 모습이었다.

“의심이 된다면 공작가의 기사를 동행시켜도 돼. 난 상관없으니까.”

“……언제부터 시작할 거지?”

“공작이 수도로 가면.”

“그래.”

안전에 관한 문제로는 믿음직한 기사를 보내면 될 일이다.

그가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또 버려졌다고 생각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헤이녹스가 입을 다문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본 아슬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도 걸리는 게 있으면 공녀랑 직접 얘기해 보던가. 서로 얘기하지 않고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

“……그래.”

헤이녹스는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다녀오지.”

그리고 그가 바로 방을 떠나자, 혼자 남은 아슬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추진력 대단한데…….”

* * *

똑똑-

“록시나.”

“엇?!”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빠?”

방 앞에는 역시나 헤이녹스가 서 있었다.

“여긴 어떠케……?”

헤이녹스는 내가 잠이 들 시간에는 종종 찾아온 적 있었지만,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방으로 먼저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랑 있는 거 어색한가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오다니 무척이나 놀랐지만, 동시에 반가웠다.

“무슨 일로 오셔써여?”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좀 들어가도 되겠나.”

“아, 네!”

나는 서둘러 방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괜스레 신이 났다.

“여기 앉으세여.”

“……그래, 고맙다.”

헤이녹스는 내가 꺼내 준 의자에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마주 앉은 후에도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자 헤이녹스는 그제야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잠깐 말을 골랐다,

“혹시, 아슬론 윈터쳇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나.”

“스승님한테여?”

아슬론과의 대화를 천천히 복기하던 나는 불과 며칠 전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저한테 가치 제국을 돌아다니자구 했는데여.”

“그래. 그것 때문에 말이다.”

헤이녹스는 최대한 록시나가 상처받지 않도록 말하기 위해 무척이나 신중해졌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지금 네 신성력은 많이 불안정한 상태다.”

“녜.”

“그런 너를 안정시킬 매개를 찾는 일은 너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저두 그러케 생각해여.”

‘이대로 계속 불안정하면 또 언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평생 아슬론이 내 옆에 있어 줄 수도 없으니까.’

게다가 나는 아직도 온전하게 기대기엔 아슬론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너무 고맙지만, 자꾸만 그게 내 몫이 아닌 거 같아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아슬론이 말한 내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나도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내 마음도 더 편하니까.

“저는 가고 시퍼여.”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나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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