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헤이녹스는 가장 확실하다 생각하는 두 번째 가설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위험한 이야기여서도 있지만, 제국의 안보와 관련된 이야기는 무엇이 되었든 황제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제국 주변국 중엔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태의 나라가 없을 텐데.’
이미 오간 교전으로 도시가 재건 중에 있거나 여러 나라가 함께 평화 협정을 맺은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이 시기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가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유력한 건 구텔 왕국이긴 하나.’
얼마 전에 대신관이 방문을 하기도 했던 구텔 왕국은 현재 전투 불능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헤이녹스는 가장 유력하다 생각했다.
‘대신관이 헛된 발걸음 따위 할 리가 없으니.’
대신관은 교활한 자였다. 온 제국민이 섬기는 신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리를 몇십 년이나 차지하고 있었다는 건, 그의 머리가 꽤나 영악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 자다. 언젠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 판단했으니 사절단이라는 명목으로 향한 거겠지.’
얼마 전에 전쟁이 끝나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가 얻고자 하는 건 대체 뭘까.
헤이녹스는 홀로 남은 방 안에서도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수도에 가야겠군.”
* * *
“록시! 록시!!”
“?”
나는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리자, 렌자드는 내 앞에서 멈춘 후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대.”
“아빠가??”
나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여기로 오신대? 서신 받아써?”
“잠깐 들렀다가 수도로 올라가신대. 황궁에 가셔야 할 일이 생기셨나 봐.”
‘대체 무슨 일이길래 급히 수도로 가는 거지?’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되었지만, 잠시나마 동부에 들렀다 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도 바로 수도가 아니고 동부에 왔다 간다는 건 급박하거나 위험하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렌자드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기 네 선생님 온다.”
“어디?”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얼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책을 들고 오는 아슬론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도대체 책은 왜 더 늘어난 거야.’
며칠 전부터 아슬론은 수업을 위해 두꺼운 책 여러 권을 들고 왔다.
‘수업 교재로 쓰려는 건가 했더니.’
그게 정말 무게 때문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슬론은 나에게 신성력을 이용해 책을 이동시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처음 신성력을 사용할 때도 저택 내의 테두리란 테두리는 전부 빛으로 물들였었기에, 이 과제 역시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신성력을 보여 주는 용으로 사용하는 것하고 무게를 들어 올리는 건 완전히 달랐으니까.’
왜 아슬론이 내게 그런 훈련을 시켰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직접 들고 옮기는 것까진 왜 내게 시키는 거야’
아슬론 정도의 신관에게 두꺼운 서적 몇 개를 옮기는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일 터였다. 그런데도 저택 내 도서관에서 굳이 책을 골라 직접 들고 오다가, 나를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몇 권을 넘겼다.
그의 말로는 실제의 무게를 파악할 줄 알아야 신성력의 완급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거 다 모르겠고 너무 힘들다고…….’
책이 두껍다 보니 들고 움직이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한 번도 무언가와 부딪히거나 넘어진 적이 없었지만,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 그동안은 특이하게 안 그랬네.’
후작가는 저택의 규모가 컸고, 그만큼 사용인의 숫자도 많아 복도나 계단을 걷다 보면 서너 명은 반드시 마주쳤다.
그들 역시 저택을 관리하느라 바빠, 키가 작은 나는 충분히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런데도 실수 한번 없었던 게 신기해.’
나는 의아함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아슬론의 모습에 황급히 렌자드 뒤로 숨었다.
“왜 그래?”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지, 렌자드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그런 거 아니니까 티 나게 뒤 좀 돌아보지 마…….’
하지만 렌자드가 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을 리가 만무했고, 결국 나는 또다시 들키고 말았다.
“공녀?”
“네……?”
“뭘 가만히 보고만 있어 와서 도와야지.”
‘하…….’
아슬론이 이런 말을 하면 나는 정말 귀찮다는 의사를 얼굴의 온 근육을 사용해 드러내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웃으세여?”
그 모습이 얄미워 살짝 노려보자, 아슬론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냥. 감정을 전혀 숨기지도 않는 게 웃겨서.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래. 나 생각 없어.’
내 해탈한 모습에 옆에 있던 렌자드가 끼어들었다.
“이런 거 나르는 건 사용인들 시키면 되는데 왜 록시나한테 하라는 거야?”
“나한테 소중한 책이라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가 없네.”
그가 능청스레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렌자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거 후작 저택에 있는 책이잖아. 왜 자기 책인 척하는 건지.”
하지만 아슬론은 그런 중얼거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공녀. 어딜 은근슬쩍 뒤에 숨으려고 해 빨리 나와서 책 몇 개 좀 같이 들자.”
“아 진짜…….”
“아냐, 내가 받을게. 나 줘, 책.”
렌자드가 나서서 두 손을 내밀었지만, 아슬론은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내가 록시 대신 들겠다니까? 나 줘!”
아슬론이 아무런 말도 없이 정말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렌자드가 직접 그 책 더미 위에 손을 올렸다.
“줘 봐. 내가 다 들 수 있으니까…….”
그리고 렌자드가 그 책을 다 가져가려는 순간, 위로 쌓여 있던 책들이 무게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려 떨어졌다.
“둘째 도련님.”
딱딱하게 굳은 아슬론의 목소리가 렌자드를 불렀다.
“이건 일종의 훈련이야. 내 수업의 일부라고.”
‘아니, 신성력을 쓰지도 않는데 수업이라고 할 수 있나? 그리고 애초에 그 수업을 왜 벌써부터 하냐고. 아직은 수업 시간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어딘가 진지해 보이는 아슬론의 모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빨리 신성력을 다루길 바라는 거 아니었나? 아니면 힘을 조절 못 해서 여기저기에 피해를 주는 걸 원하는 건가?”
“그럴 리가.”
렌자드의 말에 아슬론은 떨어진 책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방해하지 마. 이것도 하나의 중요한 수업이니까.”
‘아니, 그래서 다 좋은데.’
나는 또 책을 들어야 하는 거야?
어제보다 더 두껍고 많아진 책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주 찔끔.
그리고 내가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을 그때였다.
“공작?”
무언가를 알아본 듯 미간을 찌푸리는 아슬론의 눈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헤이녹스!’
헤이녹스는 막 말에서 내려 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나는 문득 드는 반가움에 크게 소리쳤다.
“압빠!!”
그러자 헤이녹스는 고개를 들고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록시나.”
멀리에 있어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분명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았다.
그는 옆에 있던 사용인 한 명에게 말의 고삐를 넘긴 후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인 거 같구나.”
“움…….”
오랜만인가. 하긴, 그간 아슬론이나 체드만과의 문제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지긴 했다.
나는 살짝 말을 흐리며 헤이녹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얼굴 보니 딱히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닌 거 같네.’
“지금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중인가?”
“아, 녜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녹스는 아슬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고생이 많았겠군.”
아슬론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말았다.
“아, 그리고 할 말이 있으니 후작의 집무실로 와 주겠나.”
“수업이 있는데.”
아슬론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하자 나는 화색하며 대답했다.
“딴 일 보셔도 괜차나여! 저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이써여. 알져?”
그러자 아슬론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록시나는 잘 지냈나.”
걸음을 옮기려다 무언가 잊은 듯 멈춰선 헤이녹스가 물었다.
비록 체드만에게 화내고 한동안 냉전이었다가 최근 들어서야 화해했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결국 화해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헤이녹스를 올려다봤다.
“잘 지내써여.”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