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체드만의 목소리는 언뜻 들었을 땐 덤덤했지만, 조금만 더 경청하면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체드만은 그저 내가 걱정되었을 뿐이고, 그 말에는 어떤 비난도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말일 뿐이었는데.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신성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 많이 짜증을 냈다. 조금 더 유하게 말해도 될 것을 생각나는 대로 화풀이를 해 버렸다.
‘그리고 사과도 못 했어.’
체드만은 두 번씩이나 먼저 다가와 미안하다고 말해 주었는데, 나는 지레 겁을 먹고 괜찮다는 한마디를 못했다.
“나는 정말 괜차는데…….”
‘자꾸만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아서.’
말은 해야 아는 법인데, 나는 그걸 못했다.
‘내가 좀 예민했다고, 미안하다고,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진심인 거 알고 있다고.’
한 번도 체드만의 호의를 의심한 적 없다는 걸 말했어야 하는데.
“미아내.”
정말 미안해. 이 말을 이제서야 해서. 네가 하는 사과에 괜찮다는 말보다 사과가 먼저라서 정말 미안.
“오라버니가 나한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써.”
근데 모른 척했어. 그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사실 나 걱정돼서 한 말인 것도 아라.”
그 걱정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서, 동생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오빠라는 걸 알면서도 함부로 대했어.
“미아내. 정말 미아내…….”
체드만은 내 사정이 궁금할 만한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도 말을 하고 싶은데, 나도 체드만과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서, 어떻게라도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 거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 정말 왜 이래…….’
이러면 체드만이 또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다시 가까워지기 싫어서 우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가 답답함에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멀찍이 서 있던 아슬론이 다가왔다.
“록시나는 지금 신성력이 불안정해.”
그는 사용인들이 챙겨 준 바구니 속에서 냅킨을 꺼내 내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상태가 불안정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고, 뜻하지 않은 대로 말과 행동이 엇나가고 그러는 거지.”
그의 말을 듣던 체드만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던 체드만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나는 내가 미워서 그러는 줄 알았어.”
“아냐 그런 거!”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황급히 소리쳤다.
“미워서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정말로…….”
“응. 이젠 알아.”
어쩐지 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난 정말 괜찮아. 이제 록시도 내가 미운 게 아니란 거 알았으니까 됐어.”
그러더니 천천히 다가와 내가 쥐고 있던 냅킨을 고쳐 잡았다.
“그렇게 세게 문지르지 말고. 아프니까.”
“알게써…….”
체드만은 전과 같이 티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응!”
이후로 다행히도 나와 체드만의 관계는 괜찮아졌다.
“둘이 이제 화해한 거야?”
렌자드가 이렇게 물어볼 정도로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졌으니까.
“록시, 그런데 그 스승님은 어때?”
“맞아. 나도 궁금했어. 록시, 새로운 스승은 어떤 사람이야?”
체드만과 렌자드의 질문에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음.”
‘솔직히 처음에는 좀 재수 없긴 했는데,’
가만 보니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맨날 뺀질거릴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과는 좋았다.
‘저번에 나한테 계속 이것도 못 하냐고 뭐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신성력을 썼잖아.’
짜증이 나서 얼떨결에 하긴 했는데 어쩐지 그게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대체.’
실력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운이 좋은 거 같기도 하고.
결국 운도 실력이라고 보면, 아슬론은 정말 능력자긴 했다.
“괜찮은 거 가튼데?”
고민 끝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체드만은 어쩐지 억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는 그 사람을 잘 몰라서.”
“오라버니 아슬론 윈터쳇 몰라?”
‘아슬론 윈터쳇을 모른단 말이야? 체드만이?’
체드만은 후계자 수업과 가주 대리를 하면서 제국의 정세에 무척이나 밝았다.
그런 그가 신전이나 황실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를 리 없고.
‘그런데 아슬론 윈터쳇을 모른다고? 차기 대신관이라고 불렸던 아슬론 윈터쳇을?’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체드만이 살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완전히 모른다는 건 아니야. 나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 그렇지만 그건 다 신전에 있을 때 얘기잖아.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얘기고.”
“아아…….”
듣고 보니 체드만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하니까.
“내 생각에는,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가타.”
‘엇, 그러고 보니까 할머니도 같은 얘기를 했었잖아?’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다.
처음엔 그 얘기를 듣고 반신반의했었다.
‘좋은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행동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성질 긁는 것도 자극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말들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좋은…… 사람인 거 같기도?’
“어, 머야.”
나는 문득 스치는 내 생각에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왜 그래?”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렌자드와 체드만이 차례로 물었지만 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아슬론 윈터쳇이?’
“와아아!”
사람 생각이 이렇게 쉽게 바뀌어도 괜찮은 거야?
‘재수 없고 짜증 난다고 한 게 엊그제인데.’
얼마 전에 도움을 받은 일 때문인가?
수업을 빼고 체드만과 해변가에 간 날, 만약 아슬론이 수업을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면 나는 체드만과 지금까지도 어색했을지 모른다.
‘뭘 많이 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했지.’
내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흐르는 눈물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슬론이 대신 나서 주었으니까.
‘덕분이긴 하지.’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
‘오늘 마주치면 꼭 고맙다고 말해야지.’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멀리서 아슬론 윈터쳇이, 산더미 같은 책을 들고 다가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머야 저거……?”
“어! 공녀 이쪽으로 좀 와 봐!”
동시에 나를 발견한 아슬론이 내게 다가오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는 무턱이나 탐탁잖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다 머예여?”
“책.”
“그로니까 이걸 왜…….”
“방에 가면 알려 줄 테니까 일단 들어.”
“아.”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거 같다.’
무척이나.
* * *
“공작님. 가스펠트에서는 서신이 왔습니까?”
안토니오의 질문에 밖을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답했다.
“지금 온 것 같군.”
그는 밖에서 유리를 톡톡 건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었다.
헤이녹스가 팔을 뻗자, 밖에서 날아 들어온 새가 그의 팔목에 앉았다.
그는 새의 발목에 묶여 있던 종이를 읽은 후 그대로 모닥불에 던져 버렸다.
“가스펠트에서는 승인을 내려 준 적이 없다는군.”
“그렇다는 건 역시…….”
“불법으로 어딘가에 납품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헨튼 자작은.”
황실과 귀족은 모두 가스펠트의 승인을 받은 무기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인증되지 않은 헨튼 자작의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기가 새고 있군.”
허가받지 않은 무기가 유통된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어느 가문에서 몰래 사병을 키우거나.”
타국을 돕고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