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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67)화 (67/106)

<67화>

헤이녹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헨튼 자작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고, 공작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에 헤이녹스는 확신했다.

‘광산에 무언가 있군.’

헤이녹스는 애써 시치미를 떼는 자작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2주로 알겠다.”

“공작님!”

헨튼 자작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헤이녹스를 황급히 붙잡았다.

“채굴을 멈추면 검과 방패를 만들 재료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검을? 그걸 만드는 건 이곳 소관이 아니지 않나?”

제국에서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북부의 가스펠트뿐이었다.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곳이었으며, 가장 견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곳에서도 검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지만 반드시 가스펠트의 승인을 거쳐야 했으며, 대장장이 역시 공작가로부터 인증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가스펠트를 거쳐 유통하는 건가?”

“그, 그럼요.”

애써 웃으며 대답하는 자작에게서 어색함을 느낀 헤이녹스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군.”

“예?”

헤이녹스가 더 캐물을 거라 생각하고 긴장했던 자작은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면…….”

“수색은 사흘 만에 끝내겠다.”

“정말입니까?”

핏기 없던 자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헤이녹스는 안토니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색하는 동안 치료소에 의원을 보내게. 자네도 자네의 영지민을 챙겨야 하지 않겠나.”

“당연하지요! 감사합니다, 공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자작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헤이녹스는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응접실을 나왔다.

“안토니오 세르보스.”

“예, 공작님.”

“치료소에서 환자들을 좀 살펴 줄 수 있나. 아무래도 의심 가는 게 하나 있어서 말이야.”

“제가 그것 때문에 헴델에 온 것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동행해 주어 고맙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공작님께서 제게 주신 호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토니오가 말을 끝마치자, 탄제리크의 기사 하나가 인기척도 내지 않으며 다가왔다.

“가주님께 보고합니다. 광산 안에서 -가 발견되었습니다.”

옆에서 함께 그의 보고를 듣던 안토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이해가 갑니다. 피가 환자 모두에게 많은 양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요.”

“그럼 이대로 수색 진행하게.”

“존명.”

그의 명령과 함께 기사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헤이녹스가 안토니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현장으로 가지.”

* * *

“매개를 찾으려면 돌아다녀야 해. 상성에 맞는 매개체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면…….”

“동부를 먼저 살펴보고, 서부와 남부 위주로 가 봐야겠네.”

“아빠가 허락해 주실까여……?”

헤이녹스는 안 그래도 내 신성력이 폭주할까 걱정인데, 멀리 떨어진다고 하면, 과연 허락을 해 줄까?

“공작이라면 걱정 마. 허락해 줄 테니.”

“어떠케 아세여?”

‘헤이녹스랑 무슨 말이라도 해 놨나?’

“혹시 아빠한테 벌써 허락을 받으신 거예여?”

“아니.”

‘뭐야?’

너무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나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럼 무슨 근거루……?”

“무슨 근거가 있어야 아나. 그냥 다 아는 거지.”

‘뭐라는 거야.’

내 어이없다는 표정에도 안토니오는 꿋꿋했다.

“허락 안 해 줄 리가 있겠어?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러니까 지금 당장부터 시작하자.”

“녜?”

“일어나. 밖으로 나가게.”

“녜에?”

내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고 있자, 아슬론이 직접 나를 들고 방을 나섰다.

“자, 잠깐만여. 저 혼자두 갈 수 이써여……! 잠깐…….”

“록시?”

그때 나를 부르는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체드만은 내가 아슬론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중이야? 수업 시간이 아니었어?”

“어, 수업 시간이 맞기는 한데…….”

‘이걸 수업이라고 하기엔 좀…….’

어느 누가 수업을 스승님의 옆구리에 매달려 받는단 말인가.

“음…….”

여전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꾹 다물자,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아슬론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수업의 일종이지. 나름대로 본래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그의 말대로 신성력 다루는 방법이 수업의 목적이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신성력을 다루는 방법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려는 거니까.’

내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체드만이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작게 미소 지었다.

“어디 가려고? 정원? 심심하면 나도 같이 갈 수 있는데.”

“어, 지금 수업 가는 중 아니어써?”

내가 체드만의 손에 들린 교재를 보며 묻자, 그는 슬쩍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끝난 거야. 이제 놀 수 있어. 나도 같이 갈까?”

“이봐요, 도련님.”

그러자 나를 안고 있던 아슬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거 수업이란 말 못 들었어? 우리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닌데.”

하지만 체드만은 나에게서 눈 한 번 떼지 않았다.

“응? 록시가 괜찮다면 나도 같이 갈게. 너는 어때?”

“허.”

아슬론은 처음 당해 보는 무시에 실소를 터뜨렸다.

“어…….”

‘어떻게 하지?’

체드만은 너무 대놓고 아슬론을 무시하고, 아슬론은 대놓고 체드만을 불편해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는 둘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에 결국 체드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치 가자. 잠깐이면 갠찮을 거야. 괜찮죠, 스승님?”

잠시 배신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아슬론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내가 오늘은 놀자고 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결국 나와 체드만, 그리고 아슬론은 함께 나가기로 했다.

내가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용인들이 곧바로 깔고 앉을 천부터 샌드위치, 각종 쿠키와 머핀을 구워 주는 바람에 소풍 느낌이 물씬 났다.

“디저트를 챙겨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양손 가득한 달달한 디저트에 아슬론은 허탈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많이 챙겨 주면 돌아다닐 수가 없잖아…….”

“이렇게 된 거 나랑 바닷가에 갈래, 록시?”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곤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

‘그래도 명목이 수업이긴 한데.’

물론 아슬론이 먼저 놀자고 한 거긴 하지만, 어쩐지 땡땡이를 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안함을 담아 아슬론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미안해서여.”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동부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녜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체드만이 저택 근처의 해변을 가리켰다.

“어머니 방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곳이 저기야.”

나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

‘테리온즈에 온 첫날 봤던 곳이잖아?’

프리실라가 어릴 적 머물렀다는 방에서는 파도가 잘 보였다.

저택 바로 근처에 바다가 있기 때문인데, 프리실라가 그곳에서 보는 파도를 사랑했다는 말을 듣고 가까이에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서둘러 바닷가로 달려갔다.

“우와…….”

파도는 잔잔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에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좋다.’

시끄럽지 않고, 무엇도 날 방해하지 않고, 정말 온전하게 바다만을 바라볼 수 있어서.

“록시.”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체드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체드만이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귀찮게 했지? 너도 늦잠 자고 싶었을 텐데.”

‘늦잠……. 나 그렇게 오래 잤나?’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앤이 나를 경악하면서 깨웠던 거 같긴 하다.

‘아침도 아니었지.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는데.’

좀 많이 자긴 했다. 매일 최소한 반나절씩은 자니까.

신성력이 발현되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늘 일찍 일어나야 하는 줄만 알았어. 그렇게 안 하면 뒤처질 거 같아서.”

체드만은 천천히 그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훈련하고, 수업을 듣고, 또 훈련하고. 이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방법으로 살 거라고,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고.”

“아…….”

“그런데 이제는 알겠어.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나의 방법이 모두와 같은 건 아니라는 것도, 다를 수도 있고,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까지 전부.”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을게.

네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러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와는 다른 것도 너라서.

네가 나를 믿어 주었듯, 나도 너를 믿어 주고 싶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싶어.

그냥, 그게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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