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
막상 체드만을 붙잡고 나니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대는데, 체드만이 언제나와 같이 상냥하게 웃었다.
“하고 싶은 얘기 생각날 때 말해도 돼. 기다릴게.”
“웅…….”
결국 체드만은 정원을 떠났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지금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붙잡았지만, 막상 말하자니 머뭇거림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난 왜 이럴까…….’
체드만은 저렇게 조급해하지도 않고 기다리는데, 나는 왜 말 한번 못 붙일까.
내가 어깨를 축 내린 채 고개를 떨구자 후작 부인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렴. 체드만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치만 이건 너무 미안하잖아.’
체드만은 먼저 용기를 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고, 오늘도 사람을 불러 세워 놓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 이렇게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걸렸다.
* * *
“음.”
아슬론 윈터쳇은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어딘가 정신이 팔린 듯한 록시나의 모습에 팔짱을 꼈다,
“오늘 영 집중을 못 하네.”
“아.”
나는 아슬론의 중얼거림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여. 지금부터는 열심히 할게여.”
“아니. 오늘은 수업하지 말자.”
“저 정말 할 수 있는데…….”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아. 지금까지 꾸준히 했잖아.”
아슬론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음…….”
‘얘한테 말해도 되나?’
‘막 ‘그냥 사과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이런 답 없는 대답하는 거 아니야?’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슬론을 바라보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뭐야 그 눈빛은? 설마 나 못 믿어?”
“……뭘 보고 믿으라는 거예여.”
아슬론은 나의 경계 어린 표정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말이나 해 봐.”
“음…….”
‘진짜 아슬론한테 말해도 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평생 신전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고민을 잘 이해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슬론의 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니 좀 혹하기는 했다.
‘살짝 말해 볼까……?’
나는 살짝 고개를 들고 아슬론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은…… 지금 제가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여…….”
“어색한 사람? 이 저택에?”
“녜.”
“후작가에서 어색한 사람이라면…….”
아슬론은 생각하듯 잠시 눈을 찡그리다 말했다.
“후작 부부 말하는 건가? 이번이 처음 만난 거라고 들었는데.”
“할머니 할아부지는 아니예여.”
‘물론 처음에는 좀 어색하기는 했는데,’
두 분이 노력해 주신 덕분인지 후작가에서의 적응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누구?”
아슬론의 시선에 나는 결국 우물쭈물거리다 답했다.
“오라버니요…….”
“오라버니? 네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곳에 한 명밖에 없지 않나?”
“마, 마자여…….”
‘그러고 보니 나 렌자드한테는 오라버니라고 안 부르는구나.’
그래도 체드만은 나랑 나이 차이가 좀 나서 그런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는데, 렌자드는 터울도 얼마 안 되는 데다가.
‘하는 짓도 별로…… 듬직해 보이지는 않는걸.’
렌자드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오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체드만 오라버니랑 좀 불편해서여. 싫은 건 절대 아니지만!”
“체드만이라면 그 탄제리크 공작가의 후계자 말하는 건가? 가주 대리를 맡았다는?”
“오, 아시네여?”
‘신전 나가고 두문불출했다길래 정세 같은 거 잘 모를 줄 알았더니.’
의외라는 눈빛에 아슬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야. 그저 돌아다니다 보면 소식이 들려오는 거지. 이 제국에 탄제리크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국 어딜 가도 탄제리크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으니까.
“어쩌다 어색해진 거지?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던데.”
“오라버니가 잘못한 건 업써여. 먼저 사과하기도 했구여. 그냥, 제가 머뭇거리기만 하는 게 좀…….”
“불편해서 피하고 있구나? 네가 그 체드만이라는 도련님을.”
“녜에.”
‘역시 한심하다고 생각하려나. 나조차도 이런 내가 답답한데.’
하지만 아슬론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녜에?”
“아니, 그렇잖아. 좀 머뭇거리면 어떠냐. 어떻게 뭐든 딱딱 떨어지겠어.”
“어…….”
뜻밖의 대답에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아슬론이 책상 위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정리했다.
“뭐,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언젠가는 해결될 일인 거 같네. 그 도련님도 너한테 사과했다고 하고, 너도 이렇게 미안해서 신경 쓰는 걸 보면.”
“그론…… 가?”
“화해할 생각이 없었으면 이런 걱정 같은 거 하지도 않았을 거야. 멀어져도 안 보면 그만이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무엇보다 너한테 의지가 있잖아. 지금이야 선뜻 다가서기 어렵다지만, 언제가 되었든 말은 걸 거 아니야.”
‘그건 그래.’
지금 당장 다가가 ‘미안했고, 고마웠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멀어질 생각도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와.”
“뭐야?”
내가 약간의 감탄을 담아 아슬론을 바라보자, 그는 약간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감동이라도 받았어?”
“그냥, 좀 의외여서여.”
“의외?”
‘평생 자란 신전을 떠난 것부터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고뭉치라거나 오만할 거라는 선입견이 좀 있었다.
‘사실 선입견도 아니야. 진짜로 첫인상은 별로였으니까.’
신성력 때문에 죽을 뻔한 사람한테 다짜고짜 신성력을 써 보라고 하질 않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하질 않나.
‘나는 어린애니까 그럴 수 있지만, 할머니한테도 반말할 줄은 몰랐네.’
후작 부인은 무척이나 인자한 미소를 가지고 나와 체드만, 그리고 렌자드를 돌봐 주지만, 그녀 역시 명문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사용인들에게는 위엄 있는 후작 부인일 테니까.
모두가 대하기 어려워할 그녀에게 무턱대고 반말을 하는 아슬론도 분명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완전 막무가내이실 줄 아랐는데 이런 면도 있구나 시퍼서요.”
“야…….”
아슬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람 당황스럽게 하더라.”
‘내가 그랬나?’
되짚어 봐도 딱히 생각나는 때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음…….”
“됐다. 생각 안 나면 됐어. 어차피 네가 그렇게 말해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 없을 테니까.”
아슬론은 그의 신성력을 꺼내 동그랗게 만들며 말했다.
“근데 신성력은 언제부터 다뤘어?”
“수업 첫날이여”
“수업 첫날? 나랑 한 수업 말이야?”
“녜.”
“하. 그게 정말 처음이었단 말이야?”
“녜. 신성력을 그러케 맘껏 풀어 둔 것두 처음이었는데여.”
“심지어는 신성력에 익숙하지도 않고.”
아슬론은 잠시 고민하듯 입을 다물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무슨 꿈 꾼 거 있어?”
“어떤 꿈이여?”
“네가 어디에 불려 가는 꿈 같은 거 말이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 예를 들면.”
아슬론은 웃음기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이(轉移)의 공간이라던지.”
‘전이의 공간이라면……?’
처음 신성력이 발현되고, 열이 펄펄 끓어 사경을 헤맸을 때 도착한 곳.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신이 머무는 전이(轉移)의 공간.’
무슨 신인지도,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는데.
“거길 아세여? 혹시 가 보셨어여? 뭘 하는 곳이에여?”
드디어 물을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질문을 쏟아 냈다.
“제가 왜 불려간 걸까여? 혹시 뭘 잘못해서인 걸까여? 저 진짜 나쁘게 살지는 않았는데…….”
“나도 가 본 건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거길 아시는…….”
“들었을 뿐이지.”
아슬론은 주변에 옅은 신성력을 흩뿌렸다.
“모든 것은 나의 과오이니.”
아슬론은 무언가를 읽듯 나지막이 말했다.
“부디 너를 위해, 살길 바란다.”
‘이건……!’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야?”
“녜.”
“하.”
아슬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게 널 말했던 모양이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신전에서 나오기 전에 꾼 꿈이야.”
“……?”
“제국에 한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내용. 그리고 내게 그 사람을 찾으라고 하셨지.”
“누가여?”
“신. 늘 형체만 보이고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신전에서는 그분을 이렇게 부르지.”
아슬론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르타나 여신.”
신전은 그자를,
아르타나 여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