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자, 자작님!”
저를 부르는 다급한 집사의 목소리에 헨튼 자작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내가 갑자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별일 아니면 두고 봐라.”
헨튼 자작의 협박 섞인 말에 집사는 잠시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눈에 띄게 침을 삼킨 후 말했다.
“탄제리크 공작이 왔습니다.”
“뭐라?”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던 헨튼 자작은 곧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헛소리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이런 변방의 마을에 누가 와?”
그는 콧방귀를 뀌며 집사를 노려보았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자작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집사는 오히려 더 전전긍긍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제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그제야 눈물마저 고인 집사의 모습이 도저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그의 태도에도 헨튼 자작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말…… 이곳에 탄제리크 공작이 와 있단 말인가? 제국의 검이자 서부의 주인인 ‘그’ 헤이녹스 탄제리크가?”
“네, 그리고 지금은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탄제리크 공작이 대기라니…….”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헨튼 자작은 곧 정신이 돌아왔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뭐 하나! 당장 공작 앞으로 안내하지 않고!”
헨튼 자작은 숨을 쉴 수 없을 거 같다는 말이 뭔지 피부로 느끼는 중이었다.
헤이녹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협박이라거나 회유라거나 이곳에 온 목적조차.
입도 벙긋하지 않고 그저 소파에 앉아만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숨이 맞힐까.
헨튼 자작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변해 가자 안토니오가 힐끗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헤이녹스는 자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바라만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헴델 마을 때문에 왔네.”
‘공작님…….’
안토니오는 정말이지 겉치레로 묻는 안부 같은 건 정말 조금도 없는 헤이녹스의 태도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염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 같던데.”
“아, 그, 그렇습니다.”
자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이 아직 파악되지 않아 아주 골치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살짝 시선을 들어 헤이녹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그걸 어떻게……?”
“오는 길에 봤네.”
“오는…… 길 말입니까?”
“그래. 오는 길. 북부에 방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이고, 공작님.’
북부에 방문하는 건 개인 사정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북부의 끝에 있는 작은 마을에 굳이 들르는 거 하며, 그곳의 영주까지 만나는 상황은 누가 봐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든 건 헨튼 자작도 마찬가지인 듯했지만 그는 차마 묻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그렇군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보았으나, 헤이녹스는 그런 자작을 동정한다거나 안타까움을 표하는 과정은 전혀 없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자네는 헴델 마을에 지원을 보내고 있나?”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자작이 치료소나 영지민들에게 보내는 지원 식량이 없다고 판단한 상황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헤이녹스는 아슬론 윈터쳇이 떠난 후 지난 일주일간 헨튼 자작에 대해 조사했다.
헴델 마을을 비롯해 작은 마을이 모여 있는 소규모의 영지를 책임지는 영주, 헨튼 자작은 헤이녹스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이였다.
그저 귀족답지 않다는 소문만 익히 들었을 뿐.
때문에 더욱 확실히 그를 알 필요가 있었고, 헤이녹스는 헨튼 자작령과 헨튼 자작 본인,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까지 수색을 마친 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헤이녹스가 알게 된 사실은.
‘영지 일에는 관심이 없군.’
매달 걷는 세금이나 저택 돌보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자신의 영지에 책임감을 느끼고 노력하는 이가 아니었다.
‘정말 채굴에 대한 문제를 몰랐을 수도 있겠군.’
그 어느 영주가 자신의 광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모르겠냐만, 헤이녹스는 이 헨튼 자작만큼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보급품을 내린 적도 없고.’
치료소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식량을 뺏은 건 치료소가 아니었다. 애초에 보급품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공작가 주치의가 말하길, 헴델 마을에 도는 건 전염병이 아니라고 하더군.”
“……?”
헤이녹스의 말에 안토니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치의…… 제가 말입니까?”
안토니오의 당황스럽다는 표정에도 헤이녹스는 얼굴 하나 바뀌지 않았다.
“왜 그러지, 주치의. 내 말이 틀렸나?”
그러자 안토니오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맞습니다. 제가 주치의 맞지요.”
안토니오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직업을 찾는 사이, 자작이 황급히 물었다.
“전염병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분명 기침으로 전염이 되는 거라 들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헤이녹스가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자, 안토니오가 말을 이어 갔다.
“환자들은 기침을 통해 병에 전염되어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피를 토하기에 전염되어 생긴 증상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게 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전에. 자네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건가?”
헨튼 자작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안토니오를 바라보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북부에 있는 다른 의원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한 결과 알게 된 사실로…….”
“뭐? 잠깐!”
자작은 당장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 헴델 마을에 있었단 말인가? 그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예……? 그렇습니만,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니 그게 무슨!”
자작은 집게와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게! 그런 곳에서 왔다면 자작가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런 몰상식한 인간을 봤나.”
그의 황당한 태도에 안토니오가 잠시 말을 잃은 채 자작을 바라만 보자, 그 옆에 앉아 있던 헤이녹스가 팔짱을 낀 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작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꺼져 줘야겠군.”
* * *
“할모니 저 더 이상 못 하게써여…….”
“수업 말이니?”
나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책하고 있던 후작 부인을 발견하자 냉큼 그 옆에 붙어서 하소연했다.
“자꾸 수업 시간보다 늦게 끝내구 저한테 숙제도 내준단 말이에여!”
‘우리 숙제 없는 조건으로 수업하는 거였잖아!’
숙제를 내주지 않는 건 후작 부인이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린 조치였다. 그런데.
‘도저히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는 양이잖아.’
아슬론이 내준 숙제는 저택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신성력으로 감싸는 훈련이었다.
‘그게 말이나 돼……?’
테리온즈 후작가는 유서 깊은 명문 가문으로서 가지고 있는 소지품의 수만 해도 커다란 창고를 몇 개나 채울 정도였다.
‘이건 날 괴롭히려는 게 틀림없어.’
나의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처음엔 누가 봐도 시큰둥하게 수업에 임하던 아슬론이 지금은 신성력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왜인지도 몰라. 정말 울고 싶다…….’
내일이면 또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울상을 하고 있자, 후작 부인이 언제나와 같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슬론 윈터쳇이 록시나를 무척이나 칭찬하더구나. 수업에 열정적이고, 꾸준히 성실하다고.”
‘아슬론이 나를 칭찬했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수업에 열정적인 건 나보다는 아슬론 윈터쳇이었고, 그는 내게 ‘잘한다’는 말보다는 ‘더 해 봐’라는 말을 더 자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족한 거 같으니까 더 하라는 거 아니겠어?’
내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정말이란다. 록시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 알 필요가 있어.”
‘그럼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영에 나는 후작 부인의 소매를 꽉 잡았다.
“음?”
그런 나의 행동을 의아해하던 후작 부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정체를 알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
“체드만. 수업은 잘 들었니? 통신석은 잘 작동하고?”
“네. 할아버지께서 좋은 걸 구해 주신 것 같아요. 수업에 어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원래라면 탄제리크의 저택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하는 체드만이 함께 동부로 내려왔기 때문에 그는 후작이 구해 준 통신석으로 소통하며 수업을 받고 있었다.
‘역시 마법.’
신문물의 편리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록시도 안녕.”
“어? 아, 안뇽.”
‘으아, 어색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체드만만 보면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후작 부인에게 사과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것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체드만과 간단한 대화조차 못하고 있었다.
‘안부 정도 나누는 게 다니까…….’
그마저도 체드만이 먼저 말을 걸면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이는 게 전부였다.
‘빨리 사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
내가 안절부절못한 채 후작 부인의 소매만 꽉 쥐고 있자, 그녀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체드만은 어딘가 씁쓸함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는 수업하러 갈게. 할머니도 이따 저녁에 뵐게요.”
‘아, 안 돼……!’
저 쓸쓸한 표정을 보자 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쩐지 지금 체드만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 그, 그으…….”
나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체드만이 등을 돌려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나는 조급함에 크게 소리쳤다.
“오라버니 잠까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