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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62)화 (62/106)

<62화>

그러자 아티팩트 아래 억눌려 있던 신성력이 빠르게 흩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흐읍!”

순식간에 심장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에도 나는 아티팩트 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억울해서라도 이거, 움직이고 만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눈을 질끈 감은 채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심호흡하고, 천천히 힘을 움직이…… 기는 개뿔 너무 아파!’

왜 폭주한 나를 보고 헤이녹스가 전전긍긍했는지, 왜 아티팩트를 빼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아프잖아!!’

아슬론의 코를 누르건 뭐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금방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이 고통을 멈출 수 있겠지.

그렇게 점점 마음이 약해지려던 찰나, 머릿속으로 어떤 문장 하나가 스쳐 갔다.

‘이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잠깐의 고통도 버티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죽음을 파헤치겠다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줄 상처가 걱정돼서 진실을 제대로 찾을 수나 있겠어?

그러자 점점 희미해졌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진실…….’

프리실라, 헤이녹스의 아내, 체드만과 렌자드, 그리고,

나의 어머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책감과 자괴감 속에서 헤엄쳐 나오기 위해, 더 이상의 머뭇거림은 불필요했다.

‘숨을 쉬어. 절대 멈추지 말고, 저번에 한 것처럼.’

배 속부터 올라오는 힘의 방향을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계속해서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누군가가 내게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신성력을 운용한 적 없지만, 오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눈이 부실 정도의 새하얀 빛이 내 주변을 감싸고 손가락 끝에 모여 맴돌고 있었다.

“해냈따……!”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 손가락 끝에 모여 주위를 도는 신성력에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슬론을 바라보았다.

“봤죠? 지금 이거 보이져?”

아슬론은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뭐, 울기라도 할 줄 알았어?’

진심으로 당황한 아슬론의 모습에 나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절대 안 지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수업을 받겠다고 했는데.’

이대로 물러날 거라면 시작도 안 했다. 나는 무엇이든 마음먹었으면 해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정도로 풀 안 죽는다고.’

내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아슬론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순간,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어 마주한 아슬론 윈터쳇이,

“생각보다 재밌는 애다, 너.”

무척이나 흥미로운 걸 발견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망할…….’

잘못 걸렸다…….

뭔가 그런 촉이 왔다. 지금 나는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야만 한다고.

인정한다. 나는 무척이나 방심하고 있었다.

아슬론 윈터쳇은 그냥 차기 대신관이었던 이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몇 년이나 버틸 만큼, 아니 대신관과 척을 치고 신전을 나올 만큼, 보통이 아니라는 걸.

‘대체 뭐가 문제야.’

아무래도 내가 그의 이상한 흥미를 건드려 버린 것 같은데 그게 어떤 부분인지 감도 안 잡혔다.

그의 내면의 버튼이 눌려 버린 이후, 아슬론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무척이나 적극적인 모습으로 내게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거 해 봐. 이렇게.”

그는 가볍게 시범을 보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사용되는 건 아무나 보기 힘들다는 귀하디귀한 신성력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이것도 돼? 혹시 저기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나?”

왜인지 신이 난 듯한 아슬론의 모습에 나는 주춤댔다.

“저, 저런 걸 어떠케 만드러요! 저는 신성력을 쓴 게 방금이 처음인데…….”

“아냐. 너라면 할 수 있을걸? 한 번만 해 봐. 너 할 수 있다니까?”

거의 애원하듯이 부탁하는 아슬론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더 거절하기도 뭐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벽에 걸린 시계의 테두리를 따라 신성력을 움직였다.

‘역시 세밀한 건 안 되네.’

내 신성력은 시계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에 불과했다.

“제가 말했자나여, 못 한다구…….”

“너.”

아슬론은 시계를 감싸고 있던 신성력이 다시 내 손을 타고 돌아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내게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까의 그 무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진 그는 무언가 재밌는 걸 본 사람처럼 웃었다.

“역시 공작은 실망 안 시키네.”

* * *

아슬론 윈터쳇이 동부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헤이녹스는 헴델 마을에 있는 광산을 은밀히 수사한 후, 예고 없이 영주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왜 아슬론 윈터쳇을 찾으셨습니까.”

안토니오가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말을 모는 헤이녹스에게 물었다.

“아슬론 윈터쳇은 분명 유능하고, 공녀님께 도움이 되는 자이지만, 꼭 그가 아니어도 되지 않았습니까.”

평소 그 누구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헤이녹스였기에, 안토니오는 그가 이러한 불확실한 일에 직접 나선 것이 의문이었다.

“아슬론 윈터쳇이어야만 한 이유라……. 굳이 꼽자면 그가 발현을 한 나이가 록시나와 비슷하다는 것과 신성력의 양이 많다는 공통점 때문이겠지.”

“그게 다는 아니지 않습니까.”

안토니오는 그게 헤이녹스가 아슬론을 직접 찾을 만큼의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혹시 신전 때문입니까.”

안토니오는 무척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그는 ‘공작 부인과 신전의 관계 때문입니까.’라고 묻고 싶었으나 몇 번이고 정제한 후 질문했다.

그리고 헤이녹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신전이 신경 쓰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꼭 아슬론 윈터쳇이어야 했던 이유는.”

헤이녹스는 살짝 고개를 틀어 안토니오를 바라보았다.

“그 성격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더더욱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슬론 윈터쳇은 성격이 안 좋다.

이건 아슬론에게 치료를 받았거나, 한때 차기 대신관으로 그를 추앙하던 제국민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주 잠깐 아슬론과 마주친 게 전부인 이조차도 그의 성격은 무례하다고 입을 모았다.

“성격…… 때문에 말입니까?”

안토니오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물론 그는 헴델 마을에서 아슬론이 누구보다 환자를 위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성격에 대해 말하자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썩 다정한 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지.”

악한 이는 아니지만, 다정하지도 않은. 관심 없는 것엔 무례하며 그렇지 않은 것에는 집착이라 일컬을 정도로 몰두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는 이는 산만하다. 그리고 착각하지. 자신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말이야.”

록시나에게 필요한 스승은, 모두에게 다정하고 배려심 깊으며 평등한 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특정한 이를 이기적일 정도로 편애하며, 과할 정도로 관심을 갖는 이였다.

“지금 록시나의 상황은 자네도 알겠지. 그리 낙천적인 상황은 아니야. 매일 폭주에 대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록시나에게는 아슬론이 필요했다. 그는 무례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것에는 몰두를 넘어서니까.

“아슬론 윈터쳇은 록시나에게 흥미를 느낄 거다. 단순히 괜찮다 정도가 아니라, 온 신경을 쏟겠지.”

왜냐하면 록시나는, 아슬론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이에게 집중하는 사람이다.”

헤이녹스와 처음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타인과는 말조차도 섞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 오만한 아슬론 윈터쳇이 헤이녹스에게는 먼저 말을 걸었다.

아슬론은 매사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은 늘 무료하고 어떤 것에도 감흥 없는 듯 굴었다.

그만큼 책임감 또한 따르지 않았고.

이렇듯 그가 속이 빈 사람처럼 행동한 이유는 신전에서만 자란 것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

신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일상이었을 테니까.

“나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그는 만만한 이를 깔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맹목에 가까운 호기심을 보이거든.”

“그렇다면 호기심 때문에 공작님의 부탁을 들어준 걸까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안토니오는 여전히 아슬론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이녹스의 말처럼 그가 정말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헴델의 치료소에서 보여 준 희생은 뭐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안토니오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헤이녹스가 다시 정면을 본 채 말했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즐긴다. 그가 떠도는 생활을 하는 건 그런 이유지. 더불어 헴델에서 보여 준 건 책임감이 아니라 그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 같은 거다.”

그의 사전에 미완성 따위는 없으니.

“그가 그런 성격이라 내겐 다행이지.”

기대하지 않는 자는 포기도 하지 않고,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자는 말이 잘 통하니까.

“혹여 아슬론 윈터쳇이 그 성격으로 공녀님을 풀 죽이기라도 하면…….”

안토니오는 아슬론의 그 별난 성격이 록시나를 괴롭힐까 걱정되었으나, 그 말을 들은 헤이녹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대담한 일을 꾸밀 땐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 딸은 당하고만 있을 애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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