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니, 이런 게 당황이라는 단어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던가?
“……네?”
‘아니, 뭐? 이주도 아니고, 일주일 뒤도 아니고, 하물며 내일도 아닌…… 당장 오늘 밤이라고?’
정말이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에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오늘 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후작 부인은 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에 옅게 미소 지었다.
“바로 수업을 하지는 않을 거야. 아슬론 윈터쳇에게도 쉬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3일 뒤쯤 시작할 거다.”
“3일 뒤여……?”
‘그것도 굉장히 갑작스러운데요!’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필요할 거 아니야…….
혼란스러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후작 부인은 애써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비록 아슬론 윈터쳇의 성격이 다정…… 하지는 않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란다.”
‘다정이라는 단어 사이에 그 정적 뭐야. 뭔데. 나 불안하다고…….’
게다가 빈말로도 다정하지는 않다니.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심란해졌어.’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주셔도 전 괜찮지 않아요.
‘알고 보니 완전 괴팍한 거 아니야? 나랑 비슷한 시기에 신성력이 발현되었다고 하니 주변에서 기대도 엄청 많이 했을 텐데.’
차기 대신관의 자리도 노려 볼 법했을 텐데 제 발로 기회를 걷어차고 신전을 나온 걸 보면 보통 성격은 아님이 분명했다.
‘제발……. 나한테 시련을 줄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달라고.’
싫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제발 미리 알려만 줘.
나도 내가 신성력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점점 위험해진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아티팩트로 애써 억누르고 있던 그 신성력이 최근 들어 자주 들썩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사고라고 칠 것처럼.’
속이 불안정하니 정신도 예민해졌다. 별것도 아닌 일에 크게 신경 썼으며 과하게 화를 냈다.
‘체드만한테도 괜히 더 짜증 냈잖아.’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란 걸 모를 리가 없다. 그것도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체드만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크게 화를 냈다.
‘물론 체드만이 좀 심하게 자주 잔소리를 하긴 했는데…….’
그것도 마주칠 때뿐이었고, 내가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침만 빼면…….’
솔직히 체드만이 늦잠을 자려던 아침에 찾아온 적도 있긴 한데, 그것도 한 번 뭐라고 하니 다음부턴 찾아오지 않았다. 식사할 때 잔소리는 여전했지만.
‘그냥 산책 좀 하고 단것 줄이라는 말이 뭐라고…….’
듣기가 싫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짜증이 났다. 나는 나름대로 참았다고 하지만, 체드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도 사과했잖아.’
그때,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상처 주고, 미안해하고, 실수를 반복하고, 그러는 거.
‘이제 못하겠어.’
“혹시 힘들 것 같으면 수업을 좀 미뤄 달라고 할까?”
좋지 못한 표정에 후작 부인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아뇨!”
‘더 이상 투정만 부릴 수는 없어.’
이대로 가면 위험해질 뿐이라는 거 아니까. 더는 나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 없어야 하니까.
“저 바로 할래여. 저 할 수 이써여!”
‘발현도 한 거, 이제 못할 것도 없어.’
스승이 괴팍할 수도 있다는 건 꽤나 걱정이 되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프리실라의 죽음을 파헤치면서도 계속 드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원작에서의 헤이녹스도 파헤치지 못한 진실을 내가 알릴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신성력이 발현되었고, 누구도 그 사실을 반기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나는.
‘조금 기뻤어.’
내가 누군가를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비록 여전히 겁이 많은 나지만.
“저 해낼 수 이써여.”
정말로.
그리고 나는 삼 일 뒤 아슬론 윈터쳇을 마주하고 그 패기 넘치던 결심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얘가 헤이녹스 탄제리크의 딸이라고?”
아슬론의 뒤가 짧은 말에도 후작 부인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예쁜 아이지요?”
“음…….”
아직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공작이랑 똑같이 생겼네.”
“우리 록시나는 프리실라를 더 닮은 것 같은데.”
아슬론의 말에 후작 부인이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자, 나는 애써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할머니, 솔직히 내가 프리실라랑 닮은 건 아니야…….’
후작 부인이나 후작이나 나는 프리실라를 꼭 빼닮았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아슬론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얘가?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아슬론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 눈을 돌리자 후작 부인이 나서 말했다.
“수업은 오늘부터 하실 건가요?”
“음, 글쎄. 꼬맹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꼬맹이?’
본인도 많아 봐야 20대 중반밖에 안 된 것 같은데.
그런 그가 내게 꼬맹이 운운하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것도 다 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헤이녹스가 내게 보낸 사람이라면 분명 나쁜 이는 아닐 거야.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자랐으니 좀 꽉 막힌 면이 있는 거겠지.’
“록시나는 언제부터 수업을 받고 싶니?”
“저는, 지금이여!”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왕 마음먹은 거 얼른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바로 시작해도 괜찮은가요?”
아슬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 부인은 나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힘들 것 같으면 말하렴. 수업은 내일부터 해도 괜찮으니까.”
“저 할 수 이써여. 걱정 마세여.”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는 듯 웃어 보이자, 후작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럼 우리 손녀 잘 부탁합니다.”
“예에.”
‘인사할 때 거들먹거리는 것 좀 봐!’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시정잡배 느낌에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아슬론이 소파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해 봐.”
“네? 머를여?”
갑작스런 요구에 내가 퍼뜩 고개를 들자, 아슬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신성력 운용해 보라고. 이렇게 좌우로.”
그가 가볍게 한 손짓에 새하얀 빛이 찰나 반짝이다 꺼졌다.
“많은 힘을 다루긴 어려울 테니까 이 정도만 해 봐.”
“어, 그게…….”
“?”
아슬론이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자,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감춘 채 작게 중얼댔다.
“전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여…….”
“……뭐?”
아슬론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했다.
“이것도 못 한단 말이야?”
‘부끄럽지만 그렇수다.’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슬론은 ‘하!’ 하고 외치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공작은 뭘 가르친 거야? 검기랑 신성력은 다루는 법이 꽤 비슷하잖아.”
“그게…….”
‘그럴 새가 없어서요…….’
신성력은 발현하자마자 기절했고, 폭주까지 하는 바람에 그 후에도 내내 침대 신세였으니까.
“하하…….”
내 어색한 웃음에 아슬론 윈터쳇은 황당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속았어…….”
이 정도로 애송이일 줄은 몰랐다고…….
라는 말이 뒤에 들린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두 가르쳐만 주시면 할 수 이써여!”
비록 아는 건 없지만 습득은 빠른 편이니 노력만 한다면 못 할 일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여!”
그 말을 했을 때 아슬론의 얼굴을 보고, 나는 알아채야만 했다.
그 눈빛에 담긴 건 스승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 버틸까 같은 짓궂은 호기심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긴 개뿔. 난 못 해. 나는 못 한다고…….’
내 당당한 부탁에 수업을 시작한 것도 어언 두 시간.
내겐 처음 하는 훈련이 익숙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이 정도도 못 하면서 무슨 신성력을 다루겠다는 거야.”
‘저 말투!!’
아슬론 윈터쳇은 생각보다 더 재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칠 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며 슬슬 자존심을 긁더니 실패하면 ‘어떻게 이걸 못 할 수가 있지?’라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더 짜증 나게 하는 건,
‘저 진심으로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야.’
아슬론 윈터쳇은 생각보다 더 오만하고, 까칠하고, 다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안 되는 건 네 탓이니 될 때까지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계속해야지. 될 때까지 해 봐.”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 너 천재고, 잘났다. 이제 됐냐!’
아슬론 윈터쳇이 가장 먼저 알려 준 것은 신성력을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
신성력을 다루고 감추기 위해서는 필수 단계라나.
“이건 정말 기초인데. 이것부터 못 하면 답도 없어.”
‘말 안 해도 알거든!’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한숨만 푹푹 내쉬는 아슬론을 보며 나는 주먹이 운다는 심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런 애가 도대체 어떻게 차기 대신관이 됐던 거야?’
오늘 하는 행동을 보니 그리 부지런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고, 착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게다가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는데,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신의 대리인이 되겠어?
약간 설정을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아슬론이 잔뜩 귀찮다는 표정을 지은 채 외쳤다.
“훈련 중에 딴생각을 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그게 무슨…….”
‘내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데!’
죽고 싶었다면 이런 훈련 따위 할 일도 없었을 거다. 신성력이 폭주하든 말든 그냥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무기력하게 갔겠지.
‘내가 지금 뭐 때문에 이 수모를 겪고 있는데, 뭐? 죽고 싶냐고?’
아까부터 계속되는 아슬론의 빈정거림에 제대로 속이 상한 나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버렸다.
“조용히 좀 해 바여.”
그러자 아슬론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한 거야?”
“녜. 조용히 좀 하시라구여.”
‘시끄러우니까 더 집중이 안 되잖아.’
옆에서 아슬론이 한참을 깐족대는 탓에 집중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잘하길 원하시는 거면 조용히 하셔야져.”
‘훈련하라면서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러자 아슬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그는 진심으로 입 좀 닫으라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것 같았다.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이야?’
나는 충격 받았다는 네 태도가 더 충격이다…….
‘뭐가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인 거야.’
사실 아슬론이 놀랐건 말건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너무 빈정댄 건 사실이니까.
‘진짜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사람이라 참으려고 했건만.’
지금 가만히 있으면 아슬론의 빈정거림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뭐든 해 봐야지.’
기껏 조용히 하라고 말해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창피한 일도 없을 테니까.
비록 신성력을 다뤄 보지는 않았지만, 시도라도 해 봐야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처럼 폭주할까 봐 걱정이 되긴 하는데, 여기엔 아슬론이 있으니까.’
그가 여차하면 나를 구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구해…… 주겠지?’
솔직히 확신은 없었지만 믿을 만한 이니까 헤이녹스가 보냈겠지.
나는 그의 판단이 옳을 거라 믿기로 하고, 천천히 아티팩트를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