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다.”
그 말에 아슬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조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조건도 필요한가?”
“내 딸을 살리는 것에도 조건은 필요 없겠지.”
아슬론은 그 날카로운 말에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생명에 대한 무게를 재단했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건…….”
그럼에도 선뜻 답하지 못하자, 헤이녹스는 고개를 돌려 마을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살리는 것이 목적 아닌가. 헴델의 문제가 환경인 이상 신관이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헤이녹스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런 어지러운 상황이 전염병이나 원인 모를 사고, 외상 등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아슬론이 신관으로서 줄 수 있는 도움은 더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영주와의 만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협상의 자리는 신전을 나와 떠도는 아슬론 윈터쳇의 신분으로는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하…….”
아슬론은 헴델의 사람들이 나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것은 대신관 아래에 있을 때 보았던 신전의 수많은 악행 때문이기도, 제국민을 향한 진실되지 못한 기도 때문이기도 했다.
“치료소는 식량을 내놔라!”
“우리의 보급품을 돌려주시오!”
계속되는 주민들의 목소리에 아슬론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어갔다.
“식량은 탄제리크와 테리온즈에서 책임질 예정이다. 지금쯤 북부 언저리에 도착했을 거야.”
아슬론은 신전을 나와 제국을 떠돌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그간 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이뤄 나가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헴델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자, 마음의 짐을 덜어 낼 기회였다.
‘슬슬 떠날 때가 되기도 했지.’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보였으니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게다가 그의 머리색에 대한 이야기까지 더해진다면 누구든 그 신관이 아슬론 윈터쳇임을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전히 신전은 아슬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이기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아슬론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동부의 테리온즈 저택으로 가라. 그곳에서 록시나 탄제리크를 도와줘. 이곳은 내가 책임질 테니.”
“대체 왜 동부에…….”
“도와줄 수 있나?”
재차 묻는 헤이녹스에 결국 아슬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확신을 얻은 헤이녹스는 고개를 들어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오해부터 풀지. 자세한 이야기는 안토니오가 해 줄 수 있나?”
“걱정 마시고 일 보십시오.”
헤이녹스는 짧게 고개를 까닥인 후 나무가 모여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주님.”
근처에서 은신하던 탄제리크의 기사는 어느새 헤이녹스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전서구 보냈습니다.”
“우리는 영주를 만나러 간다. 소수만 남아 주민을 맡아라.”
“존명.”
기사단에게 지시한 후 영주의 성으로 향하는 헤이녹스의 눈에서 동정 따위 없는 차가움이 스쳤다.
* * *
“록시나.”
“할머니!”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나는 후작 부인이 방문을 조심스레 열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고 있었구나.”
“녜.”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본 후작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초대 황제의 건국신화구나. 내용이 꽤 어려울 텐데 다 이해가 되니?”
“음……. 체드만이 사 준 건데, 별로 여렵지는 않아여.”
‘그러고 보니 이것도 체드만이 사 준 거였구나.’
탄제리크 저택에서 동부까지 오는 동안 심심할까 봐 책 몇 권을 들고 왔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었다.
“체드만이 일부러 읽기 쉬운 걸로 산 모양이구나.”
‘어……. 그건 생각도 못 했는데.’
제국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어 편하다고만 생각했지 그게 체드만이 신경 써 준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나와 체드만은 여전히 냉전 중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색하다고 해야 하려나?’
체드만이 나를 향한 과한 걱정을 사과하고 그의 진심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그에게 화를 냈던 내 입을 막아 버리고만 싶었다.
‘그런 이유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잔소리 좀 새겨듣는 건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좀 과하긴 했어.’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늦었다. 이미 나는 체드만에게 화를 내 버렸고, 우리는 꽤나 어색해졌으니까.
그 이후로 나는 체드만을 마주칠 때마다 흠칫거렸다.
그리고 체드만은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나를 보며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다.
‘아, 정말 죄책감 든다…….’
마주칠 때마다 다정하게 웃어 주던 체드만이었는데, 그런 그의 낯빛을 어둡게 만든 게 나라니.
‘죄지은 거 같아…….’
조금만 더 참을걸. 괜히 욱해서.
억울한 마음을 쏟아 내고 나서도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내가 체드만에 대한 걱정에 한숨만 푹푹 내쉬자, 후작 부인이 다가와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친 채 물었다.
“걱정거리가 있구나.”
“녜에…….”
“혹시 체드만과 관련된 일이니?”
“……녜.”
‘역시 할머니도 아시는구나.’
하긴,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안주인이 모를 리 없다.
어쩔 줄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데, 후작 부인이 그 위로 그녀의 오른손을 포개었다.
“록시나가 먼저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그치만……. 체드만이 시러하면 어떡해여…….”
‘이제 와서 왜 친한 척하냐고 말하면 어떡해.’
물론 체드만이라면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해 버리진 않겠지만,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은 그 역시도 당황스러울 거다.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나 후작 부인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체드만이었다면, 록시나가 내미는 손이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 같아.”
후작 부인은 선뜻 다가서지 못한 채 고민하는 록시나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했다.
“오라버니가 불편할까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한단다. 하지만 할머니 생각엔 록시나와 체드만의 걱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체드만 역시 록시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과하고 싶고, 다시 가까워지고 싶고, 누구보다 서로를 소중히 하고 싶은데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머뭇거림.
“체드만은 이미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있잖니.”
십 대에 대가문의 가주 대리가 되어 일했다는 것, 그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 이후 서부의 주인이자 제국의 창과 방패가 될 거라는 것.
어깨 위에 놓인 수많은 책임감에 체드만은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만 했다,
설령 그게 가족과 관련된 일일지라도.
“그러니 록시나가 먼저 다가가 보는 어떻겠니. 천진한 동생이라는 자리를 통해서.”
후작 부인은 록시나가 여타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훨씬 더 영특했으며 눈치가 빨랐고 기회를 잡을 줄 알았다.
“록시나가 조금만 용기를 내 줄 순 없을까?”
‘용기…….’
사과하는 게 언제부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을까. 왜 나와 체드만은 서로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머뭇거리기만 할까.
‘사실 조금 겁나.’
사과해도 체드만이 받아 주지 않을까 봐, 다시는 가까워지지 못할까 봐, 체드만이라는 멋진 오빠를 잃게 될까 봐.
‘그치만.’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가까워질 일도, 멀어질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체드만은 내게 이미 사과했다. 그런 그와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는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대로 머뭇거리면 언제까지나 제자리걸음일 테니까.’
나는 후작 부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가서 말할래여.”
내 손을 덮은 후작 부인의 온기를 느끼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나와 후작 부인이 서먹하다거나 서로 거리를 두는 건 아니었지만, 부인은 중요한 일이 아닌 다음에는 내 방에 잘 오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고 싶을 수도 있고, 자신이 여전히 불편할 수도 있는데 자주 찾아오면 피곤해할까 봐 그러는 듯했다.
‘근데 어쩐 일로 오신 거지? 꽤 급해 보이셨는데.’
내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짧게 ‘아’ 하고 외친 후작 부인이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북부에서 온 서신이란다.”
“북부여?!”
나는 귀에 익은 단어를 듣자 늘어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소식인데여? 아빠가 벌써 오신대여?!”
‘벌써 오는 거야? 진짜?’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탄제리크 공작이 보낸 건 맞단다.”
“그럼 어떤…….”
‘설마…….’
“아슬론 윈터쳇.”
“!”
‘아슬론을 진짜 찾았어?’
그는 신전을 나와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았으며,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질 때쯤엔 이미 그 마을을 뜨고 없었다고.
‘그런데 그런 아슬론 윈터쳇을 찾았다고? 대체 어떻게? 설마 현상금이라도 붙였나?’
잠시 헤이녹스가 아슬론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많은 악행을 떠올린 록시나는 이내 그 상상들을 떨쳐 내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저두 이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거예여?”
막대한 힘이 있음에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었다.
언제 또 폭주할지 모르니까. 게다가 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주위에 나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
내가 사랑하는 이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성력 다루는 방법을 하루빨리 익혀야만 했다.
“언제 온대여?”
‘북부랑 동부의 거리가 좀 되니까……. 넉넉잡아 한 달이면 오려나?’
한 달 뒤에 있을 수업을 위해 아침 산책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후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