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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9)화 (59/106)

<59화>

“유감스럽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어.”

사실 ‘그’ 헤이녹스 탄제리크가 하는 부탁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아직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딸이라면 도울 이가 널리고도 널렸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내가 전부니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혼자 남아 있는 것만큼 괴로운 게 또 없으니까.

이 사람들에겐 의원 몇 명과 아슬론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당신이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모르겠어. 공작가 재산으로라면 대신관도 부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뭐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헤이녹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관에게 부탁이라……. 그게 적절한 대답이라 생각하나?”

다소 날이 선 듯한 헤이녹스의 말에 아슬론은 저도 모르는 사이 흠칫거렸다.

“그건…….”

헤이녹스의 말이 맞았다. 공작가와 대신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쯤이야 아슬론이 모를 리 없었고, 지금의 대신관이 황실과 결탁하였다는 것 정도도 어렴풋이나마 예상하고 있었다.

‘황실파나 다름없는 대신관에게 딸을 내보이라고 하다니.’

명백한 아슬론의 실수였다.

“방금 건 실언이었어. 사과하지.”

헤이녹스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슬론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진심이야. 수도에서 해결하지 못할 정도라면, 혹시 공녀가 불치병에 걸리기라도 했나?”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헤이녹스는 이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불치병이라…….”

어찌 보면 불치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런 헤이녹스의 생각을 듣는다면 불경하다며 경을 칠 게 분명했지만,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족쇄나 다름없으니.”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더더욱.

“그러고 보니 정말 불치병이나 다름없군.”

자신을 갉아먹는 일,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는 일.

지금의 록시나에게 신성력이란 그런 존재였다.

있을수록 독이 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공작의 딸이…….”

아슬론은 헤이녹스가 자조하듯 내뱉은 말로 얼추 상황을 예상했다.

“발현을 한 모양이네. 마탑주가 아닌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아마도 신성력인 거 같고.”

‘공작이 골치 좀 아프겠네.’

탄제리크 가문과 신전은 대외적으론 아무런 문제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봐도 드러나는 균열이 있었다.

“하지만 공작가에서 신관 하나쯤 매수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공작의 딸이 신성력을 다루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다룰 수 있도록 지도할 적당한 선생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게 헴델까지 찾아올 만한 일인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아슬론에 헤이녹스는 재차 입을 다물었다.

핵심을 묻는 질문만 하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헤이녹스에 아슬론은 점점 답답해졌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야 내가 도울지 말지 판단할 거 아니야.”

그 말에도 계속되는 침묵에 인내심이 깊지 않은 아슬론이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신관님, 치료소 앞에서 주민들이……!”

급하게 아슬론을 찾은 의원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헤이녹스의 눈썹 한쪽이 들렸다.

“……안토니오 세르보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의원이 옆을 돌아봤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이곳에 어떻게…….”

안토니오는 뜻밖의 인물에 놀라 물었다.

“자네가 헴델 마을로 간다는 건 들었지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공작님께선 어쩌다 이곳에 오시게 된 겁니까?”

질문하는 안토니오를 잠시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고개를 돌려 아슬론에게 말했다.

“주민들에게 문제가 생겼다지 않았나.”

그들의 재회를 보고 있던 아슬론은 골치 아파졌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은 후 천막을 나섰다.

“혹시 공녀님께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천막에 둘만 남자 조심스레 물어오는 안토니오에 헤이녹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폭주했네.”

“폭주를 했단 말입니까? 어찌 이런 일이……. 지금 상태는 좀 어떱니까?”

안토니오는 록시나의 소식에 무척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발현을 했다 한들 폭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잦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녀님과 신성력의 상성이 맞지 않은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헤이녹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력이 넘쳐서겠지.”

헤이녹스는 신성력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검기를 다루는 소드마스터로서 타인의 기운을 기민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딸, 록시나는 넘칠 정도로 많은 신성력을 가진 상태, 즉 신성력 과잉이 문제였다.

“자네가 처음 진찰을 했을 때도 그게 이유 아니었나.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발현 이후 신성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거겠지. 오히려 더 늘고 있는 것 같군.”

“허어…….”

어느 힘이든 발현 당시에 노출되는 기운이 가장 강한 게 보편적이었다.

그 이후에는 폭발하던 힘이 조금씩 정돈되며 다듬어지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었는데 록시나의 경우 이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보다 더 많아졌다면 이건…… 어쩌면 신의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왔네. 지금 내 딸에게는 힘을 다루는 방법이 간절하니까.”

그제야 안토니오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슬론 윈터쳇을 찾아오신 거군요.”

“그래.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쉽게 발설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슬론이 돕겠다는 의견을 확실히 하지 않는 이상, 헤이녹스는 록시나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그 아이가 위험할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거다.”

“안토니오!”

그때 아슬론이 황급히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나와 봐!”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한 헤이녹스는 안토니오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조금 전만 해도 없었던 마을 주민들이 치료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의 식량을 내놓으시오!”

“대체 얼마나 빼돌린 거요!”

“내 자식은 벌써 사흘째 굶고 있다고요!”

그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은 헤이녹스가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마을 주민들이라면…… 얼마 안 됐습니다. 정오가 좀 지날 때쯤이었던 같군요.”

헤이녹스가 헴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을은 조용했다.

인적이라고 할 건 치료소 근처밖에 없었건만.

“식량이 부족한 모양인데. 그걸 왜 이곳에 와서 따지는 건가.”

“나도 그게 황당해.”

아슬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영주가 준 보급품을 우리가 가로챘다고 하는 것 같은데.”

“영주가 보급품을 내렸나?”

“그럴 리가 있나! 여기 영주는 자기 영지의 문제 따위 거들떠도 안 봐. 제 잇속을 채울 고민뿐이지.”

아슬론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저들이 하는 착각에 환자들이 동요하잖아. 이러면 회복을 하는데도 문제고, 자칫하면 더 많은 사람이 전염될 수도 있어.”

“전염이라. 원인은 파악되었나?”

“아직입니다.”

안토니오 역시 답답한 속을 감추지 못한 채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파악된 건, 이 병의 특징이 각혈이라는 것과 그들의 기침으로 전염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건.”

헤이녹스는 주변을 한 번 가볍게 훑은 후 말했다.

“전염병이 아닌 것 같은데.”

“예?”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안토니오를 보며 헤이녹스는 자신이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를 하나씩 짚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도착해서 간단히 주변을 순찰했네. 딱히 위생이 나쁜 곳도 아니고, 음식이 상할 기후도 아니지.”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생각을…….”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곳과 헴델이 다른 점이 있네.”

“그게 뭐지?”

아슬론이 황급히 묻자 헤이녹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채굴.”

북부로 도착해 가스펠트 공작령과 그 근처의 마을을 돌아보았던 헤이녹스는 왜 하필 전염병이 헴델에서만 발생해 머무르는지 의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이곳의 사정을 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이유.

“헴델은 북부의 거대 채굴장이 있는 곳 아닌가.”

헴델 마을의 성인 대부분은 채굴을 업으로 삼았다. 이곳 헴델에는 북부에서 가장 큰 채굴장이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치료소에 있는 환자 중 채굴을 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나.”

“채굴을 하지 않는 이라면…….”

아슬론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환자들 모두 채굴장 근처에 사는 사람뿐이야…….”

헤이녹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원인은 채굴장에 있을 거다. 먼지나 석회 같은 것과 관련되었겠지.”

“그렇다면 이건…….”

“치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아슬론은 전염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음에 괴로웠다.

당장 급하게 치료를 한다고 해도 환경적인 요인에 다시 노출된다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채굴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왜 없지.”

“그야 당연히 채굴권은 영주의 영역이니…….”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나면 채굴을 멈추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 그 욕심 많은 영주를 어떻게 설득한다는 거야. 애초에 만나 주기라도 할까?”

답답함에 소리친 아슬론은 문득 그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설득이라…….”

헤이녹스는 자신과 조금도 관련 있지 않을 것 같은 단어를 곱씹었다.

“이게 설득이라는 게 필요한 일이던가.”

“아…….”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위치를 상기한 아슬론은 문득 자신의 고민이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탄제리크.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가장 부유한, 제국의 흐름을 잡고 있는 공작 가문.

뭐든 가질 수 있으며 뭐든 버릴 수 있는 존재.

그런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명령이 되었으니 무언가를 원할 때, 공들이는 설득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채굴을 멈추라고 하겠다.”

하지 말라는 명령 한마디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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