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 자리에서 사과라도 할걸.’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스스로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침도 거르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내가 식사 시간이 지나서도 식당에 나타나지 않자 걱정된 렌자드와 후작 부인이 직접 찾아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문도 열어 주지 않은 채 그냥 입맛이 없다고 하고 말았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꼬이게 된 걸까.
‘나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인데.’
체드만을 상처 주고 싶은 생각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떠케 사과해야 할지 모르게써.”
어떤 식으로 말해야 체드만에게 다시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체드만과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록시. 일단 문 좀 열어 봐. 할 말이 있어.”
“자, 잠깐!”
‘문 열면 뭐라고 얘기하지? 체드만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혹시 나한테 화났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걸까?’
그렇다면 나도 사과를 해야 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과 체드만에게 상처를 줄 말을 한 것 모두.
‘그치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갠히 말을 꺼냈다가 또 상처 주면 어떠케.”
‘그건 정말 싫단 말이야…….’
내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자, 몇 초간의 정적 이후 체드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문 열어 봐.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
체드만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계속 이렇게 지내긴 싫어. 전처럼,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
이대로 체드만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록시.”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체드만의 시선을 피했다.
“앉아서 얘기할까?”
“……웅.”
나와 체드만은 창가 옆 의자에 앉아서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누가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어떤 타이밍에 입을 열어야 할지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런 적막을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가 애써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미안해.”
체드만이 먼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듣기 싫어할 줄은 몰랐어. 그렇게 티를 내는 것도, 그냥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체드만은 느리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지나쳤어. 너는 몇 번이나 싫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전부 무시했던 거야. 너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체드만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정말 미안…….”
그는 록시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미안함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화가 난 모습의 록시나를 보았을 때, 체드만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무 심했구나.’
이제껏 걱정이라는 이유로 했던 말들이 록시나에게는 전부 듣기 싫은 잔소리로 와닿았겠구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듣기 싫다는 록시나의 말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체드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의지와 달리 자꾸 말이 나가.’
저렇게 하면 몸에 안 좋을 텐데, 저렇게 하면 나중에 더 우울해질 텐데, 저렇게 하면 많이 피곤할 텐데.
록시나가 하는 모든 행동이, 체드만은 불안했다.
사실, 아무리 록시나가 아이라고 하더라도 그 애가 또래답지 않게 성숙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체드만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잔소리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가 더 잘 챙겨야 돼.’
체드만은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아버지가 몇 년 전 출정을 갔을 때, 내가 록시나를 잘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매일 방에 틀어박혀 무얼 하는지, 무얼 먹는지조차 알 수 없던 록시나를 그대로 두지 않고 매일 방문을 두드렸더라면, 매일같이 함께 식사하자고 이끌었더라면.
그랬다면 록시나가 상처받는 일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너무 미안해서 그랬어. 앞으로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더 신경 쓰고 싶었어. 저번처럼 네가 외롭지 않게, 혼자 슬퍼하는 일 없도록 내가 함께하고 싶었어.”
방에 혼자 있으면 우울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체드만은 그랬다.
분명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건 편하고,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지만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해가 지나가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여유가 아니었다. 나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종의 격리였다.
스스로의, 그리고 타인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
그래서 체드만은 걱정이 되었다. 늘 방 안에만 있는 록시나가 다시 예전처럼 외롭다고 느낄까 봐.
그때와는 달리 우리가 옆에 있다고, 너를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네가 디저트 먹는 거 하나도 안 미워. 오히려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단 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잖아.”
혹여 정말로 몸이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정말 혹시라도, 네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때는 못 버틸 거 같아.’
너를 향한 미안한 마음보다,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보다.
“네가 행복하도록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밉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부끄럽고, 또 허무해서.
“동생 한 명 지키지도 못하는 이가 가주가 될 자격 같은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록시나에게 사과하러 왔고, 체드만은 드디어 열린 문에 서둘러 그녀를 살폈다.
‘……울었구나.’
록시나의 눈이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부어 있었다. 눈 주변이 붉기도 했고.
‘나 때문이겠지.’
체드만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견딜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체드만이 쏟아 낸 말 이후로,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먼 사이가 되어서라거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힘들게 내비친 진심이 누구도 선뜻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무거웠기 때문이다.
* * *
헤이녹스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의원들과 지친 환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로브를 쓰고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
‘역시 신관은 없군. 하긴, 신전에서 이런 곳까지 파견할 리가 없지.’
이렇게나 아파하는 이가 많음에도 북부에 전염병이 심각하다 말할 수조차 없으니.
애꿎은 영지민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던 헤이녹스의 귀를 사로잡는 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별일 아니야.”
‘신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를 칭하는 말이 들리자 헤이녹스는 서둘러 그 방향으로 다가갔다.
“신관님. 이 환자 피만 좀 멎게 해 주십시오. 나머지 처치는 제가 할 터이니.”
“알겠어. 그다음 환자는 어디에 통증이 있는 거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투. 가볍고 아이 같으면서도 왠지 모를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
“아슬론 윈터쳇.”
헤이녹스가 간절히 찾던 자, 현재 대신관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자, 신의 종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자.
그가 지금, 헤이녹스의 눈앞에 있었다.
“이렇게 금방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근처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아슬론은 이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헤이녹스 탄제리크.”
아슬론은 조금 전의 그 소년 같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이가 된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오면 안 될 곳이라도 온 것처럼 말하는군.”
헤이녹스의 태연한 말에 아슬론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당신이 날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알다시피 나는 내 두 발로 신전을 걸어 나왔어. 그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내게 찾아올 이유는 없지. 그것도.”
아슬론은 헤이녹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헤이녹스 탄제리크라면 더더욱.”
그의 날이 선 말에도 헤이녹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우선 어디든 떠나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사람들의 시선이 좀 곤란한 것 같아 말이야.”
헤이녹스의 말대로 그들 주위엔 낯선 이를 경계하는 시선이 가득했다.
“여기서 그쪽의 정체가 밝혀지면 조용한 삶 따위 물 건너가 버릴 텐데.”
그의 말에 아슬론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헤이녹스를 노려보았다.
“따라와.”
아슬론 윈터쳇은 가장 구석진 천막 앞까지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오래 머문 것도 아닌데 말이야.”
“딱히 숨기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더군. 그 정도 신성력을 쓰는 젊은이가 자네 말고 더 있나.”
아차 싶은 마음에 잠시 말을 잃었던 아슬론은, 이내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무슨 용건이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곳까지 직접 행차하셨느냔 말이야.”
“용건이라…….”
“별것도 아닌 일이라면 당장 꺼져. 목숨을 살리느라 바쁜 곳이니까.”
아슬론이 금방이라도 자리를 떠 버릴 듯 움직이던 그때, 헤이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딸에게 문제가 생겼다.”
“……딸?”
아슬론 윈터쳇은 헤이녹스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의심했다.
‘딸? 지금 헤이녹스 탄제리크가 딸이라고 한 건가?’
헤이녹스가 누군가의 앞에서 가족을 언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리 자주 마주친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했던 건, 대신관이 그를 거의 반강제로 황궁에 데려왔을 때뿐이었다.
“공작이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짐짓 비꼬는 것 같기도 한 아슬론의 말투에도 헤이녹스는 흔들림 없었다.
“그래서, 정말 무슨 일이지?”
그 모습에 조금 흥미를 잃은 아슬론이 묻자, 헤이녹스는 주저 없이 말했다.
“내 딸을 좀 살려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