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서둘러 향한 헴델 마을은 고요했다.
거리에는 누구도 돌아다니지 않았으며, 관리되지 못한 건물들이 녹슬어 있었다.
헤이녹스와 동부에서부터 함께한 탄제리크의 기사들이 지나가자 마을 주민들은 조금 열린 창틈으로 그들을 엿볼 뿐이었다.
“인적이라곤 보이지도 않는군.”
한때 활발했던 시내였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마을이 이렇게나 엉망이 되다니.’
아무리 전염병이 심했대도 이 정도의 속도는 영주가 마을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는 탓이 분명했다.
‘이곳의 영주가 누구…… 아.’
오래 지나지 않아 헴델 마을의 영주를 떠올린 헤이녹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헨튼 뱅쇼.’
그는 가진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욕심을 가진 자로, 명예로운 귀족답지 못하고 탐욕스럽다는 평을 받는 이였다.
‘싸늘한 세간의 평판치곤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자가 실제로는 어떤 행실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헤이녹스의 평은 간결했다.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주변을 위할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한 이.
남은 거라곤 귀족이라는 자존심뿐.
헤이녹스가 경멸할 만한 가치도 없는 이였다.
영주에 대한 평을 내린 헤이녹스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거기…… 좀 주세요!”
“여기 ……의 다리에서 출혈이……!”
멀리서 사람들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주님. 전방에 천막이 있습니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기사에 헤이녹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처에 치료소가 있는 모양이군.”
그들이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가자, 그곳에는 때가 탄 하얀 천막들과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이 보였다.
“각혈을 멈추질 않아!”
“폐까지 무리가 간 모양이군. 어서 양동이를 가져와!”
“의원님, 제발 제 동생 좀 봐주세요. 눈을 뜨질 않아요!”
“의원님!”
마을의 입구에서 마주한 섬뜩할 만큼의 황량함과는 상반되는, 무척이나 급박하고 간절한 모습이었다.
“환자들이 치료받는 곳이니 저희가 확인하겠습니다.”
전염병이 옮을 것을 우려한 기사가 나서려 하자, 헤이녹스가 한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럴 필요 없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선 돌아가지 못할 것 같으니.’
헤이녹스는 모든 것이 확실해야 했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무엇도 믿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건 언제나 예외를 만들었고, 그 예외는 늘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아슬론 윈터쳇은 함께 찾는다. 누구든 흔적을 발견하는 즉시 내게 알리도록.”
“존명.”
헤이녹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정말 이곳에 있을지 모르겠군.’
헤이녹스가 출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슬론 윈터쳇은 사람이 많은 곳은 극도로 꺼렸으니까.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비명이 난무하는 곳에 과연 아슬론 윈터쳇이 있을까.
게다가 대신관과 크게 사이가 틀어져 신전을 떠난 그였다.
‘사실 버려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만.’
어쨌건 아슬론은 공식적으로 신전과 척을 친 상황이니 모습을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다.
‘이곳에 없어도 좋으니…… 부디 살아만 있으면 좋겠군.’
록시나에게는 누구보다 아슬론이 필요했다. 둘은 꽤 닮은 점이 많았으니.
록시나와 비슷한 나이에 발현한 것이 그러했고, 대신관을 능가할 만한 신성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대로 록시나를 두면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시방편으로 힘을 억누르고 있는 아티팩트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분명 신성력이 새어 나오고 있다.’
경매에서 수도 저택 한 채 값을 들여 산 아티팩트였건만, 록시나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헤이녹스는 진심으로 걱정됐다.
이러다 록시나의 발현 사실을 신전이 알게 될까여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한 걱정은,
‘혹여 자책을 하게 될까.’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 뜻하지 않게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라고 공격하지 않을 수 없고, 미워하는 이라고 공격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해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헤이녹스는 신성력에 의해 피해받을 이보다 누군가를 상처 주고 그보다 더 괴로워할 록시나가 걱정되었다.
“네가 절대 외롭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느냐.”
아마도 너는 곤히 자고 있느라 듣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줄곧 그리 생각했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아끼겠노라고.
부족한 아버지지만, 이제 와 나설 자격이나 있을까 싶었지만.
“도저히 혼자는 못 두겠구나.”
다시 그 방 안에 홀로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도록,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너는 이런 나를 부끄러워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의 아버지니까.
그러한 명분으로 나에게는,
너를 지킬 방법이 생겼다.
* * *
나와 체드만은 냉전 상태였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 혼자 삐진 거였지만.
‘아니, 체드만 얘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
내가 아무리 잔소리 듣기 싫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라, 디저트는 내 삶이니 절대 멈출 수 없다, 라고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만 먹으라고 안 해. 다만, 하나 먹을 때 한 시간씩 걸으라는 거지.’
“아아악! 너무 쨔증 나!!”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건 그냥 자기주장이 확실하다 정도였지 이런 걸 말한 건 아니었다고!’
진짜 헤이녹스보다, 아니 렌자드 보다 심했다.
“왜 이러는 건데 대체…….”
매일 한 장시간의 산책 탓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통통 두드리는데,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여.”
“록시나, 나야.”
‘체드만?’
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체드만이 틀림없다.
한때는 저 목소리가 정말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에 좋았지만.
‘이젠 아니야!!’
부술 수 없는 벽 앞에 선 것처럼 꽉 막힌 답답함을 느끼는 지금은 저 따스한 체드만의 목소리는 듣기도 싫었다.
“시러!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또 잔소리할 거잖아!’
아침에도 해 놓고 또 하려고?
‘내가 그렇게 화도 냈는데!’
그렇다.
나는 사실 오늘 아침, 체드만과 다투었다. 그것도 꽤나 심각하게.
때는 후작 부부와의 맛있는 조찬을 하기 위해 식사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
“으음, 날씨 너무 조타.”
오늘 아침은 눈이 멀 듯 뜨겁고 강렬한 태양이 아닌, 섬세하고 따스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고 있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시작이 좋다는 느낌에 모처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식당에 가고 있었는데, 마주쳐 버린 것이다.
최근 내 스트레스의 원인,
체드만 탄제리크를.
사실 체드만은 식사 때마다 꼭 보긴 했지만, 식사를 하러 가던 도중에 만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어차피 식당에 가서도 잔소리 들을 게 뻔한데, 이 복도에서도 들어야 해?’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이 방해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불편해졌다.
사실, 내가 체드만에게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체드만도 내 건강 생각해서 해 준 말인데 너무 모질게 답했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걱정해 준 건데. 그냥 나도 조금은 받아들일 걸 그랬나?’
너무 무시했다는 생각이 드니 스멀스멀 미안함이 피어올랐다.
‘어떡하지. 지금 말할까? 말까?’
내가 언제 말을 해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는 사이, 체드만이 다가왔다.
“록시. 잘 잤어?”
“어? 응…….”
한창 생각 중이던 나는 체드만이 갑작스럽게 말을 걸자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오라버니는 잘 자써?”
“나도 잘 잤어. 조금, 걱정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걱정되는 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체드만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록시가 엄청난 도넛하고 머핀 사이에 깔리는 꿈을 꿨거든. 그런데 하늘에서 디저트가 떨어지는데도 록시는 먹기를 멈추지 않더라고.”
“내가…… 꿈에서까지 디저트를 먹었다고?”
“응. 일어난 직후에는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하하…….”
‘뭐? 내가 도넛하고 머핀에 깔려? 게다가 깔리는 와중에도 먹기는 포기 안 했다 이거지?’
체드만의 말을 듣고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라버니 나…… 놀리냐?”
나의 말에 체드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런 건 절대로. 나는 그냥 평소에도 록시가 디저트를 많이 먹으니까 정말 그런 비슷한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놈의 걱정 걱정!”
‘걱정하면 뭐 어쩔 건데. 내가 하고 싶다는데 뭐 어쩔 거냐고!’
체드만의 그 한 마디에 사과하고 싶던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내가 고개를 홱 돌려 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향하자, 체드만이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따라왔다.
“록시, 다 장난인 거 알지? 요즘 네가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서…….”
“장난?”
나는 뒤를 돌아 체드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장난이면 내가 재미써야지. 근데 난 그런 장난 하나두 재미업써.”
“록시, 그게 아니고…….”
그제야 내가 진지하게 화가 났음을 안 체드만은 얼굴을 굳히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정말 속상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 이건 진심이야.”
이렇게 당황한 모습의 체드만을 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아 용서해 줄까 싶다가도, 내일이면 어김없이 잔소리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먹는 디저트야. 내가 알아서 한다구. 듣기 싫타는데 왜 자꾸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해? 내가 실타는 게 장난 가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체드만 너, 진짜 시러.”
‘헙!’
나도 모르게 나와 버린 심한 말에 내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체드만의 얼굴이 전보다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먹는 디저트와 늦잠에 간섭하는 잔소리가 싫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