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 *
“할 일이라는 게…… 이거여써?”
체드만이 꽤나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기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했더니.
‘산책이라니.’
헤이녹스가 떠난 다음 날,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놀랍게도 후작가의 강아지 로이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양옆으론 체드만과 렌자드를 낀 채.
“이것도 중요한 일이야. 매일 아침 산책을 하는 게 얼마나 좋은데. 피곤함을 덜어 주기도 하고, 걷는 동안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
“알게써. 알겠다구!”
나는 저택에서 나온 후부터 계속되는 체드만의 잔소리에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얘가 원래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애였나?’
되게 다정하고 섬세한 오빠 아니었어? 장난기 같은 거 없이 착한 첫째 오빠 그 자체 아니었냐고!
‘언제 이렇게 말이 많아진 거야…….’
내가 황당함에 고개만 도리도리 내젓자, 그런 나를 본 렌자드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형 잔소리 많아. 몰랐어?”
“몰랏찌…….”
‘알았으면 농담도 안 했을 거야.’
체드만이 이런 잔소리를 쏟아붓게 된 시작점은 나의 장난 섞인 한 마디였다.
‘앞으로는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구 과자도 많이 머거야지. 어차피 아빠도 모르니까!’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헤이녹스가 북부로 가고 분위기가 조금 우울해진 것 같아서 풀어 보려고 한 것뿐이었다고.
‘사실 본심도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분위기를 띄워 보려던 내 본래의 의도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엄청난 변화로 돌아올 줄은……. 그것도 체드만이 그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체드만의 잔소리 폭격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에도 그의 말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운동은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해. 단 음식을 먹고 나태하게 구는 건 물론 피해야 하고.”
‘나태…….’
“특히 록시나는 디저트를 좋아하잖아. 맛있는 걸 오래 먹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필요해. 아, 그리고 오래 자는 것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잠자는 게 당연히 잘못은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자는 건 전부 움직임이 부족해서 그런…….”
“아 진쨔!!!”
‘진짜 짜증 나네 정말.’
“내가 적땅히 하라구 해찌!! 그만 좀 하라구 이제!!”
난 결국 터져 버린 인내심에 화를 내 버린 뒤 홱 뒤를 돌았다.
“록시나,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체드만이 황급히 내 소매를 잡았지만 나는 뿌리쳐 버렸다.
“돼써!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가타? 아까도 한 마디만 더 한다구 해 놓고는 열 마디는 더 했짜나!”
‘내 고막을 위해서라도 당장 이 자리를 떠나야겠어.’
원래 가려던 방향의 정반대 쪽으로 달려가자 뒤에서 렌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록시! 어디 가!”
“렌쟈드 너두 따라오지 마! 둘 다 귀찮으니까!”
‘나쁜 놈들! 내가 디저트가 몸에 안 좋다는 걸 모른 줄 알아?’
그런데도 맛있는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계속해서 생각나는데 어쩌라고!
약간의 억울함에 찔끔 나는 눈물을 훔치며 뛰어가자 로이가 뒤에서 나를 쫓아오며 왕왕 짖었다.
“로이…….”
중앙 정원에서부터 쉬지도 않고 달렸더니 나도, 로이도 숨이 차 헐떡거렸다.
“허억, 허억…….”
‘젠장 너무 힘들어!’
내가 운동 부족이라는 체드만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알아. 내가 더 움직여야 한다는 거. 근데 귀찮은 걸 어쩌라구…….’
“로이 너두 이번엔 좀 너무했다구 생각하지?”
내가 로이의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으며 하소연하자 로이가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역시 너두 그러케 생각하는구나?”
로이만이 나를 이해해 주는 존재라는 생각에 조금 울적해지려던 때였다.
“잠깐만!”
고개를 돌리자 급하게 달려온 기색이 역력한 체드만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듣기 싫어할 줄은 몰랐어.”
“훙.”
‘내가 듣기 싫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데!’
그의 사과에도 풀리지 않는 기분에 팔짱을 끼고 있자, 체드만이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난 그냥 걱정돼서 그랬어. 단 건 몸에 안 좋다고 하니까. 아예 먹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산책이라도 하면 어떨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체드만의 눈에는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핑계로 록시 너랑 같이 있고 싶기도 했고.”
‘록시라니.’
체드만이 나를 애칭으로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마주치면 늘 웃어 주면서도 꼬박꼬박 록시나라고 불렀는데.’
바뀐 호칭에 새삼 놀라고 있는 사이, 체드만이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너는 자주…… 아팠잖아. 그게 디저트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며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는 챙겨 주지 못했으니까, 이제라도 잘하고 싶어.”
‘아.’
어쩌면 오늘의 일도 체드만의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건지 모른다.
어린 동생을 방치했다는 죄책감과 앞으로 겪을 일에 대한 책임감.
‘역시, 속죄 비슷한 거려나.’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는 금발 사이로 체드만의 연녹색 눈이 반짝거렸다.
‘우는 거야?’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분명 눈물같이 반짝이는 것이 고여 있었다.
‘하여간 이 집안 사람들은 그렇게 안 생겨선 왜 이리 속이 여린지.’
체드만 역시 벌꿀 같은 금발과 다정한 연녹색 눈을 가져 동화책 왕자님을 그대로 데려다 둔 듯 아름다웠지만,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만큼 만만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집이 세지?’
지금도 보면 나에게 잔소리를 한 게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하지 않았나.
‘가만 보면 은근 냉정하다니까.’
그의 그 단단한 성정이 부드러운 외견에도 얕보이지 않는 이유인 듯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과를 한다는 건 내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거겠지.
‘지금 사이도 충분히 좋으니 굳이 과거 얘기 꺼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불편해질 것을 감수하고 옛날이야기를 꺼낸 건 그만큼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
체드만의 용기 있는 사과에 마음이 약해져 버린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그냥 안 하겠다고 말해. 지금이라도 그러면 용서해 줄 테니까.’
“앞으로는 그러케 잔소리 안 할 거지?”
거의 정답을 떠먹여 주듯 유도하자, 이내 체드만이 고개를 든 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싫어.”
“와…….”
속 여리다는 거 취소.
당장 취소!!!
* * *
그 시각 헤이녹스는 헴델 마을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직접 가야겠나?”
가스펠트 공작은 헤이녹스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이 전염병으로 엉망인 헴델에 가는 것이라니.
“찾는 것이 있다면 따로 기사를 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니다.”
가스펠트의 걱정 섞인 말에도 헤이녹스는 단호했다.
“직접 확인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두어서는 안 돼. 그새 도망가 버릴 수도 있으니.”
“도망이라면, 사람을 찾는 건가?”
헤이녹스가 무엇을 위해 헴델을 가겠다는 건지 입도 뻥긋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스펠트는 전부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가스펠트에서도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네. 지금 당장 사람을 지원해 주지. 그러니 우선은 드웬델 백작령으로 가는 게…….”
“공작.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헤이녹스는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협조는 내 볼일이 해결된 뒤에 이뤄질 거라고.”
그는 고저 없는 차가운 말투로 가스펠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스펠트는 어디까지나 도움을 청하는 쪽이라는 걸 잊지 않길 바라네.”
완벽하게 타인을 대하는 듯한 헤이녹스의 태도에 잠시 멈칫한 가스펠트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헛웃음을 쳤다.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전우에게도 매정하긴 마찬가지구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럼 공작의 사정이 속히 끝나기만을 기다려야겠군.”
한 발 빼는 가스펠트 공작에 헤이녹스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어서 드웬델 백작을 보기 위해서라면 말이야. 가스펠트 쪽에서 도움을 줄 일은 없나?”
그의 말에 한동안 침묵하던 헤이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헴델 마을에 신관이 있다는 소문, 들어 본 적 있나.”
“헴델 마을에 신관이라.”
가스펠트 공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신성력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거 같군.”
“신성력이 확실한가?”
뜻밖의 정보에 헤이녹스가 급히 묻자, 가스펠트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브를 쓰고 있어 신원은 파악할 수 없지만, 그 하얗고 성대한 힘은 분명 신성력이라지.”
‘성대하고 하얀 힘이라.’
대신관일 리는 없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텔 왕국에 있었으니까.
‘하얀 신성력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신성력을 접하지 못한 많은 이들은 대부분의 신성력이 하얗다고 믿고 있었다. 이는 대신관의 힘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겠지.
새하얗게 정제된 색의 신성력을 가진 건 현재로선 대신관과 아슬론 윈터쳇뿐이었다.
‘아, 최근에 한 명 추가됐군.’
록시나.
헤이녹스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록시나의 발현에 무척이나 놀랐다.
이제껏 봤던 그 어떠한 신성력보다도 순수했으니까.
‘그 정도라면, 성녀 칭호 정도는 우습지도 않겠지.’
성녀. 신에게 직접 선택받은 대리인.
그녀가 하는 말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신의 뜻 그 자체였다.
‘그런 이를 신전에서 놓칠 리가 없다.’
어떻게서든 붙잡고, 신전에 복종하도록 만들 것이다.
신의 뜻을 직접 받드는 이에게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불러일으키니까.
그리고 신전은 그 힘을 절대 옳은 곳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록시나를 세뇌하고, 황실과 신전에 굴복시키며 자신들의 뜻을 이룰 도구 따위로 취급할 테지.
‘내 딸을 그렇게 하찮은 존재로 이용하도록 둘 순 없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