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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5)화 (55/106)

<55화>

“나는…….”

헤이녹스가 북부로 가는 것에 대해, 떠남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나를 들여다볼 줄 몰랐다. 정말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를 아는 것도 결국 습관이었기에, 남을 보는 것이 더 익숙한 나로서는 무척이나 생경한 일이었다.

‘솔직히 불안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북부에 전염병 말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니까.

아슬론 윈터쳇이 여전히 북부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이렇게 모든 게 불확실한데, 어떻게 걱정 없이 있겠어.

“나도 안 가셨으면 좋게써.”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으니까.

비록 목숨을 걸고 가는 곳이 아니더라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하면 어떡해.’

서로가 없는 것에 더 익숙해져 버리면, 그걸 더 편하다고 느끼게 되면 그땐 돌이킬 수 없다.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느끼는 순간이 끝이었다. 나는 사이가 나빠지는 것보다 멀어지는 게 더 무서웠다.

‘그렇지만,’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셔짜나.”

‘가스펠트 공작이 무슨 이유로 헤이녹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문을 위해서도, 가주로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가 간다고 하셔쓰니까.”

헤이녹스가 그렇게 결심한 것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빈틈이 없었고, 대상이 무엇이든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래서 걱정되지만.’

그래. 사실 무척이나 걱정되지만, 불안한 마음이 멈추질 않지만,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지만.

“믿어 볼래.”

헤이녹스의 판단을, 그를 믿는 사람들의 신뢰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라고, 어느 순간 편안해진 이 공간에 계속 머물 수 있을 거라고.

그 확신에 차 흔들림 없는 눈빛을.

“나는 믿고 시퍼.”

* * *

헤이녹스가 테리온즈 저택을 떠날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북부에 갈 당사자가 무엇보다 서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는데.”

체드만은 헤이녹스가 북부에 간다고 말한 바로 다음 날 아침, 정문에서 짐이 실리기만을 기다리는 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말려도 소용없었겠구나.”

‘정말.’

나는 체드만의 말에 극히 공감했다.

‘이 정도 속도면 동부에 올 때부터 준비해 둔 게 아닐까 싶은데.’

어쩌면 어제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도 형식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이미 가라고 해 버린걸.

나는 어쩐지 헤이녹스의 계획에 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

그때, 렌자드가 멀리서부터 뛰어오며 말했다.

뒤에는 렌자드가 나만 따르는 것 같다며 투덜댔던 강아지 로이도 함께한 채였다.

렌자드의 다소 소란스러운 등장에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헤이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이거요!”

렌자드가 내민 손에는 비취색의 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번에 록시 곰 인형 살 때 같이 샀어요. 검에 달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서요.”

“렌쟈드 그런 것도 믿어?”

내가 의아함에 묻자, 렌자드는 얼굴을 붉힌 채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거 때문에 산 건 아니야. 그냥 색이 예뻐서 그런 거라고…….”

“그래.”

그 천이 바람에 나풀대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손을 내밀었다.

“꼭 달고 다니마.”

그러곤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집에 천을 꽉 묶었다.

“고맙다.”

헤이녹스의 간결한 감사 인사에 렌자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거 아닌데요…….”

부끄러운 듯 달아오른 렌자드의 볼을 바라본 헤이녹스는 이내 말에 올라탔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그 신관만 찾으면요?”

“그래. 아슬론 윈터쳇만 찾으면 말이다. 가스펠트 공작과는 잘 아는 사이니 우려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군.”

후작이 불편한 다리로 저택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간만에 가스펠트 공작도 만나 보나 했더니 말이야.”

“당신은 안 돼요. 북부는 나들이하듯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 말이에요.”

후작 부인의 단호함에 헤이녹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 기사단을 지원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후작 부부께선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아이들 좀 살펴 주십시오.”

“그건 걱정 말게.”

헤이녹스는 이내 고개를 돌려 우리를 한 명씩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거라. 걱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으니.”

참 헤이녹스다운 당부에 나는 그만 피식 웃었다.

“그리고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하구나. 마음이 조급해져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헤이녹스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체드만에게 말했다.

“그간 렌자드와 록시나를 잘 부탁한다. 물론 네가 잘할 거란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 저택 일도 신경 쓰지 말고.”

“……네.”

그렇게 대답한 체드만은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챈 헤이녹스의 물음에 체드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방 오실 거죠?”

‘아.’

역시 체드만도 걱정된 모양이다. 내게 그렇게 헤이녹스를 믿는다, 아버지는 한 번도 신뢰를 저버린 적 없다,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엔.

‘체드만도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자꾸만 걱정되고, 불안하고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렌자드와 내가 보는 앞에선 태연하게 굴어야 했겠지.

그런 체드만의 마음을 아는지 헤이녹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약속하마.”

헤이녹스는 준비를 마친 기사들 수십 명과 사용인들, 꼼꼼히 쌓인 짐들을 돌아보았다.

“준비는 다 마친 것 같군.”

“몸 조심히 다녀오게나.”

후작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헤이녹스가 고삐를 세게 쥐었다.

“아.”

출발하려던 헤이녹스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편지하거라.”

적적할 것 같으니.

헤이녹스는 그 짧은 한마디만을 남기고 떠났다.

“……들어가자.”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체드만이 이내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 *

며칠간의 밤샘과 야행 끝에 헤이녹스와 그의 일행은 북부에 도착했다.

“탄제리크 공작.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소.”

가스펠트 공작은 저택 정문에 나와 그를 맞이했다.

“몇 년 전에 황궁 회의에서 보고 편지는 종종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군.”

헤이녹스와 가스펠트 공작은 젊은 시절 함께 전장을 오고 간 동료로, 서로 간의 신뢰가 두터워 아직까지 연락을 이어 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가스펠트 공작.”

헤이녹스는 연속된 밤샘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가스펠트 공작을 마주했다.

“급한 요청에도 응해 주어 고맙소. 오는 동안 여독이 많이 쌓였을 테니 일단 올라가 쉬시오.”

“급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헤이녹스는 장시간의 움직임에 지쳤을 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일행의 숙소 먼저 준비해 주면 좋겠군.”

“그럼 공작은…….”

“무슨 일인지 전달부터 받겠네.”

헤이녹스의 단호한 말투에 가스펠트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은 여전하군. 그 대쪽 같은 고집 말일세.”

가스펠트 공작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점을 좋아하는 거지만 말이야.”

가스펠트 공작은 헤이녹스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과 기사들에게 외쳤다.

“저택에 들어가면 사용인들이 방을 안내해 줄 걸세. 충분히 쉬고 내일 다시 만나지.”

그러곤 고개를 돌려 헤이녹스를 이끌었다.

“공작은 우선 집무실로 이동하지.”

가스펠트 공작은 집무실에 도착하자 서랍 안에 있던 지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가 가스펠트 영지이고, 그 옆이 북부의 드웬델 백작 영지네.”

“드웬델 영지가 구텔 왕국과 국경과 맞닿아 있는 걸로 아는데.”

“맞네. 드웬델 백작이 많이 힘써 주고 있지. 그런데.”

가스펠트 공작이 손가락으로 드웬델 백작령 옆을 가리켰다.

“이곳의 움직임이 좀 이상하네.”

“구텔 왕국이? 지금 막 전쟁이 끝났을 텐데.”

헤이녹스의 말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대신관이 들르기도 했지.”

“그 상태로 타국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수상해.”

구텔 왕국은 피해가 심각한 상태였다. 가족과 집을 잃은 사람이 넘쳐흘렀고, 기아와 부상당한 사람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할 터였다.

“지금의 구텔 왕국에게 전쟁 자금을 지원해 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네. 질 게 뻔한 싸움을 누가 지지하겠나.”

가스펠트 공작은 지도 위 구텔 왕국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 구텔에게 누군가 헛바람을 불어넣는 모양이야.”

“설마…….”

“맞아. 대신관이네.”

그의 말에 헤이녹스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구텔의 왕이 제안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는?”

“신전과 황실이 가깝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점이 분명 구텔 왕에게 혹할 만한 점이었을 거고.”

“……제국이 아닌 제3국을 노려 내부의 시선을 돌리려는 거군.”

“맞소. 제국의 도움으로 경제난도 해결할 수 있고.”

헤이녹스가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가스펠트 공작이 천천히 입을 뗐다.

“대신관의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

“황후일 거라 확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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