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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4)화 (54/106)

<54화>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좀 가까워지나 싶었더니, 또…….’

차근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 무척이나 생경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는데.’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헤이녹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 아니다.”

그는 무척이나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초인적인 힘은 사람을 가려 가며 발현하지 않는 법이야. 때론 황족이 그 주인이 되기도,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이가 그 주인이 되기도 하지.”

그의 말이 맞았다. 신성력은 사람을 가려 발현하지 않았다. 선택권 역시 주어지지 않았으며 나는 거절할 새도 없이, 그저 그럴 운명이었던 거다.

그럼에도 자꾸만 불편한 이 마음은 왜인지.

“록시.”

문득, 꽉 쥐고 있던 주먹 위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고개를 들자, 꽤나 의연한 표정의 렌자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께선 금방 돌아오실 거야.”

렌자드의 말에 체드만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께서 강하시다는 걸 이 제국에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게다가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무슨 큰일이 생길까 싶지만.”

체드만은 무릎 위에 있던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곳 역시 또 다른 전장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그 수를 걷잡을 수가 없고, 식량은 부족하고.”

체드만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은…… 감염병을 직접 치료하는 의원이 아니더라도, 참전하는 병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아버지가 될까 봐…….”

“형…….”

체드만을 부르는 렌자드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놀랍게도,

“너무 무서워요…….”

울고 있었다.

애써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다 부르트도록 깨문 채로.

정말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훌쩍이거나 울음을 삼켜 내는 소리조차도. 내가 만약 고개를 들지 않았더라면, 체드만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거다.

“오라버니…….”

너무도 낯선 그의 목소리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나와 눈이 마주친 체드만은 볼 위로 떨어진 눈물을 서둘러 닦아 냈다.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습니다. 결국 선택은 아버지가 하실 일이지만요.”

“체드만.”

“떼를 쓰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확신이 서면 그때 가셔도…….”

“체드만 탄제리크.”

헤이녹스는 변명을 하듯 중얼거리던 체드만에게 말했다.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헤이녹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체드만에게로 다가왔다.

“너희들과 상의 한번 없이 결정한 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심했어.”

그는 소파에 앉아 있던 렌자드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그게 아슬론 윈터쳇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니 록시나도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다.”

헤이녹스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슬론 윈터쳇을 찾으러 가는 것도 맞지만, 그것 말고도 꼭 북부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수행원 같은 존재로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길래…….”

체드만의 물음에 후작 부인이 다독이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일은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가스펠트 공작이 직접 만나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거다.”

‘가스펠트라면…… 북부를 이끄는 대표 가문이잖아.’

정치에 큰 관심이 없으나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어 탄제리크와 함께 황가의 견제를 받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럼 가스펠트 공작이 직접 남부로 오면 안 되는 거예요?”

렌자드의 물음에 후작 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가스펠트는 어딘가로 이동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야. 섣불리 남부행을 택했다가 북부에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영지민 간의 차별이 생기겠군요.”

체드만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가주로서도 곤란한 일이다. 금전적 피해는 물론이고 당장 영지민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체드만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 북부행은 필수적이겠네요.”

나는 어쩐지 축 처진 듯한 모습의 체드만을 바라보았다.

‘많이 걱정되나 보다.’

아무리 듬직하고 똑부러지는 아들이라도 결국 아버지 일에는 이성적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고.’

항상 이성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약점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지지자인 존재.

그런 모순된 사람이, 체드만에게는 아버지인 모양이다.

* * *

“형, 괜찮아?”

집무실을 나온 렌자드가 체드만에게 다가가 묻자,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어.”

“그치만…….”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라는 말을 뒤에 덧붙이고 싶은 것 같지만 렌자드는 꾹 참는 모양새였다.

‘내가 봐도 확실히…… 괜찮진 않아 보이는데.’

엄청나게 우울하다거나 슬퍼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좀 실망한 거 같다고 해야 하나.’

헤이녹스가 미리 말하지 않은 것 때문인지, 자신의 가지 말라는 말에도 북부행을 택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어쩐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헤이녹스가 북부를 가는 것에는 어느 정도 내 책임도 있었기에 가만히 선 채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체드만이 내게로 다가왔다.

“록시나.”

“어, 어?”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내가 더듬거리며 답하자, 체드만이 살포시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구냥…….”

‘좀 찔려서 그러지…….’

헤이녹스나 후작 부부는 내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째선지 이 죄책감은 덜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러게 신성력 같은 건 왜 발현해서…….’

온 제국민이 신의 사랑을 받는 증거라며 추앙하는 힘이지만 내겐 잘 알지도 못하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능력일 뿐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이런 힘이 생긴 이유가 뭐야.’

원작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나에겐 더 생소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라면 또 모를까.’

엄청난 능력이라지만 나는 다룰 수도 없고, 다루는 방법도 모른다.

‘있으나 마나잖아.’

나에게는 필요 없는 힘이었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가야 했다.

‘이렇게 민폐만 끼칠 거라면 차라리…….’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그 순간, 체드만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록시나는 괜찮아?”

“응……?”

“아버지께서 가시는 거, 너는 괜찮냐고.”

“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줄곧 나 때문에 헤이녹스가 북부에 가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래서 그가 가는 것에 대한 내 감정은 어떤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는…….”

나는, 나는 모르겠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

“난 싫어.”

머뭇거리다 말한 내 목소리 사이로 렌자드가 끼어들었다.

“나는 싫어. 아버지가 안 가셨으면 좋겠어. 계속 여기에 계셨으면 좋겠어. 그치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

헤이녹스가 북부에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스펠트 공작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아슬론 윈터쳇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래, 아슬론 윈터쳇.

제 발로 신전을 벗어난 천재. 나는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내 목숨이 달렸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다.

“금방 돌아오실 거야.”

체드만의 말에 렌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제 헤이녹스가 북부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보였으나 내 속은 더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헤이녹스와 함께할 기회를 뺏은 건 나니까.’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일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미안. 나 때무니야.”

모른 척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아쉬움 가득한 둘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해서,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내가 평범했다면…….”

“록시나.”

체드만은 단호한 투로 나를 불렀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잖아.”

“맞아, 록시.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내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체드만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버지께서도 다른 볼일이 있는 거라 하셨잖아.”

“그치만 오라버니들이…….”

“난 아버지를 믿어.”

체드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나와 마주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하셨으니까. 아버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하지 않는 분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체드만의 목소리에는 두터운 믿음이 깔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믿어.”

언질 없이 전장으로 떠나고도, 몇 년 동안의 교전을 겪고서도, 단 한 번 편지한 적 없으면서도 마침내 승리했으니까.

그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다. 그에게 ‘할 수 있을까’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다’는 것만 존재했을 뿐.

비록 무신경하고 다정하지 못한 아버지라도, 한 번도 믿지 않은 적 없었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아버지이며, 유일한 기사였으니.

“록시나, 너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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