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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3)화 (53/106)

<53화>

“그 핀, 내가 꽂아 줄까?”

렌자드는 조개껍질 핀을 만지작거리던 내게 말했다.

“혼자서는 어려우니까.”

그가 변명하듯 말을 잇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핀을 건넸다.

렌자드는 핀을 받은 후 신중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머 해?”

그의 길어지는 고민에 의아해 묻자, 렌자드는 핀을 꽉 쥐며 말했다.

“예쁘게 꽂아 주고 싶은데…….”

“그냥 아무러케나 꽂아두 갠차나.”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렌자드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건 싫어! 너한테 대충 해 주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음…….’

솔직히 말하면 빨리 핀을 꽂고 다른 곳으로 구경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답답하긴 한데, 모처럼 신난 거 같으니까.’

축제 때 내 손을 놓친 날부터 줄곧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해 있던 렌자드였다.

누구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렌자드는 스스로가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역시 죄책감이려나.’

신성력이 폭주한 이후로 한동안 앓았으니까. 렌자드는 그 때문인지 최근 며칠간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래, 이렇게 신난 것도 오랜만이니까 조금만 봐주자.’

나 역시 시무룩해져 있는 것보다 렌자드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말을 좀 험하게 해도 속은 여린 애니까.’

내가 애써 입을 다문 채 서 있은 지 대략 몇 분이 흐른 후에야 렌자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어떠케 꽂았길래 이러케 오래 걸려?”

내가 궁금함에 핀 위로 손을 올리려고 하자, 렌자드가 다급하게 나를 손길을 막았다.

“안 돼! 지금 건들면 머리가 망가질 거야.”

“그럼 거울로 확인해 보실래요?”

나와 렌자드의 대화를 듣던 상인이 거울을 내밀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가까이로 얼굴을 댔다.

“오…….”

‘생각보다 잘 꽂았는데?’

예상외로 렌자드가 꽂아 준 핀의 위치는 적절했다.

‘잔머리도 좀 튀어나오고 그럴 줄 알았는데.’

아무리 렌자드가 신중하게 했다고 한들 분명 투박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핀은 앞머리 옆에 잘 꽂혀 있었다.

“고마워.”

내가 만족스러움에 미소 지은 채 말하자, 렌자드가 뿌듯한 듯 활짝 웃었다.

“아가씨, 도련님.”

그때, 나와 렌자드 뒤에 서 있던 사용인이 조심스레 우리를 불렀다.

그제야 저만치 뒤에 서 있던 후작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은데.’

나는 상인을 향해 고맙다고 인사한 후 렌자드의 손을 잡아챘다.

“얼른 가자!”

부인은 다리도 좋지 않을 텐데 너무 무신경했다.

후작에 비하면 덜 했지만, 후작 부인도 확실히 거동이 쉽진 않아 보였다.

밀려오는 죄송함에 서둘러 렌자드와 함께 후작 부인에게로 다가가자,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장신구는 샀니?”

“네! 이걸 선물 바다써여!”

내가 머리 위의 핀을 가리키자, 후작 부인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을 받았다고?”

“네. 동부에서 조은 추억만 쌓고 가쓰면 조켔대여.”

“……그렇구나.”

후작 부인이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마님!”

멀찍이 서 있던 기사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후작 부인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챈 후작 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기사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방금 후작님으로부터 전령새 하나가 날아왔는데.”

그는 다소 긴장된 모습의 나와 렌자드를 바라보더니, 입을 꾹 다문 채 종이를 내밀었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든 후작 부인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가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렌자드, 록시나.”

“녜.”

“말씀하세요, 할머니.”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나와 렌자드가 고개를 들자, 후작 부인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나들이는 이대로 끝내야 할 것 같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여.”

“중요한 일이 생긴 거죠?”

렌자드의 물음에 후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공작과 너희 할아버지께서 단단히 결심하신 모양이다.”

그녀는 우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자꾸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 * *

“아버지!”

후작의 집무실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문 너머로 고성이 들려왔다.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곳으로 가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에요!”

“체드만.”

“차라리 전령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겁니다!”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그걸 기다린단 말이지? 아니, 애초에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나?”

“아버지 제발!”

“목소리 낮추게.”

큰 소리를 듣다못해 후작 부인이 집무실 문을 열어 버렸다.

“사용인들도 다 듣는 곳에서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할머니.”

그녀를 발견한 체드만이 서둘러 후작 부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좀 말려 주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애원하듯 말하는 체드만을 바라본 후작 부인은 고개를 들고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했다.

“공작. 이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상대는 정착하는 이가 아닙니다. 언제 또 장소를 옮길지 모르니 확실한 지금 나서야 합니다.”

“자네 마음도 알겠네만, 아이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헤이녹스는 체드만과 렌자드, 그리고 나를 번갈아 보았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아이들 좀 보살펴 주십시오.”

“아이들은 돌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죄송합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부인은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같은 의견인가요?”

“미안하오, 부인.”

그의 대답에 후작 부인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은 채 비틀거렸다.

“일단 앉으십시오.”

헤이녹스는 후작 부인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얼떨결에 후작 부인과 함께 소파에 앉게 된 나는 도저히 현재의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헤이녹스랑 후작 부인은 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건 렌자드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설명을 좀 해 보세요.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후작 부인의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에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후작이 나와 렌자드를 바라보았다.

“우선 아이들은 내보내는 게 어떻소.”

“시러요.”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큰일이 생긴 거 같은데……. 정확히 무엇과 연관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꼭 들어야겠어.’

내가 결연한 표정으로 소파에 버티고 앉아 있자, 렌자드 역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도 반드시 들어야겠어요.”

그러자 헤이녹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원한다면 남거라. 결국엔 너희들도 알아야 하는 일이니.”

착잡한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슬론 윈터쳇이 헴델 마을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아슬론 윈터쳇?’

어딘가 익숙한 게, 분명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슬론 윈터쳇, 아슬론 윈터쳇이 대체 누구…… 아!’

그의 이름을 몇 번 곱씹던 나는 기억 한편에서 ‘아슬론 윈터쳇’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차기 대신관 후보!’

그는 8살에 신성력을 발휘해 단숨에 대신관의 자리까지 넘볼 만큼 수재 중 수재였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끝내 대신관과 대립해 신전에서 나왔다는 정도로만 간략히 묘사되어 있었다.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신전을 나오게 된 걸 반겼다고 했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슬론 윈터쳇이 헴델 마을에 있다고?’

신전에 있지 않다는 걸 봐선 그가 이미 대신관과 한바탕한 후 나온 시점이라는 얘기인데…….

‘근데 헤이녹스가 아슬론 윈터쳇을 왜 찾지?’

헤이녹스는 아슬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 두 사람은 접점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황실의 편도, 신전의 편도 아닌 아슬론 윈터쳇이 헤이녹스에게 도움이 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후작 부인은 헤이녹스의 언질로 대충 짐작한 듯했다.

“확실한 건가요?”

그녀는 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참듯 주먹을 꽉 쥐었다.

“믿을 만한 이가 보낸 정보네.”

후작의 말에 부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여기까지 올 리 없으니 직접 간다는 거군요. 하지만…….”

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헴델은 현재 전염병이 돌고 있는 곳 아닌가요. 그 수가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맞소. 완전히 국경을 폐쇄해 버릴 정도지.”

“그렇다면 어떻게…….”

부인이 의아하단 듯 묻자 헤이녹스가 입을 열었다.

“식량 조달을 명분 삼아 갈 겁니다. 북부에서는 전염병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국경을 닫긴 했지만, 현실은 농사조차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식량난이 있을 거라는 말이군요.”

후작 부인의 말에 헤이녹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북부도 도움이 필요할 테지요. 전염병보다 굶주림에 죽는 이가 더 많으니, 절대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북부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 모양인데.’

그 확산 속도도 엄청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더 큰 듯했다.

‘그런데 거길 간다고? 직접?’

믿을 만한 수행원을 보내는 게 더 안전하지 않나. 언제 북부가 또 태도를 바꿔 국경을 닫아 버릴지 모르니까.

나는 계속되는 이야기를 끊고 결국 입을 열었다.

“안 가시면 안 대여……?”

‘정말 걱정된단 말이야. 전염병에 걸리거나 북부에서 못 돌아오면 어떻게 해.’

내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헤이녹스가 말했다.

“걱정 말거라. 아슬론 윈터쳇을 찾는 대로 금방 돌아올 테니.”

“왜 찾으시는 건데여? 그 사람이 꼭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나는 헤이녹스가 이토록 아슬론 윈터쳇을 찾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슬론 윈터쳇이 신성력 다루는 법을 알고 있다.”

“!”

헤이녹스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도 어린 나이에 개방했으니 네게 도움을 주는 게 어렵지 않겠지.”

“그럼 록시가 신성력을 숨길 수 있다는 말이에요??”

렌자드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후작이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찾는다면 말이지.”

‘뭐야. 그럼 결국…….’

나 때문이잖아.

“저 때문에…….”

꼭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식량만 보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헤이녹스가 직접 가려는 건.

“저 때문이자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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