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헤이녹스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묻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록시나의 어깨가 어쩐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헤이녹스는 그런 록시나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동안 한 번 쉬지 않고 록시나의 등을 쓰다듬는 그를 바라보던 후작 부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록시나는 제가 안을 테니 더 있다 오세요.”
그러자 후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는 게 좋겠군. 공작은 이곳에 온 게 무척 오랜만이 아닌가.”
그들의 말에 잠시 머뭇대던 헤이녹스는 록시나의 점차 수그러드는 떨림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후작 부인이 록시나를 안아 들고, 후작과 렌자드, 체드만이 먼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록시나를 토닥이는 것은 헤이녹스로 하여금 낯선 감정을 이끌었다.
프리실라를 껴안던 것과는 또 다른, 어떤 소중함에 대한 감정.
‘아직도 작군.’
조금 전까지 안고 있던 록시나의 어깨는 예전에 보았던 발만큼이나 작았다.
아주 작고,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쥐면 으스러질 것 같은데 꼭 안고 있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프리실라.’
헤이녹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프리실라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
이렇게 늦게야 찾아와서, 한번 안아 주지도 못해서 미안해.
하루 종일 옆에 앉아 있지 못해 미안해. 당신을 더 붙잡아 두지 못해 미안해. 모든 걸 가졌다면서 당신 하나 지키지 못해 미안해.
그가 미안한 걸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프리실라는 언제나 그에게 한없이 과분한 사람이었고, 더 해 주지 못해 애절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무능력함을 되새기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의 말, 지키려 노력하고 있어.’
아이를 사랑해 달라는 말, 이것조차 너무 늦게 떠올렸는데.
당신이 나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만약 당신이 내 곁에 있었다면, 분명 내게 무심하다 타박했을 거라 생각해.
왜 그렇게 늦게야 깨달았냐고, 왜 그 어린아이들을 홀로 내버려 두었냐고, 조금 더 섬세할 순 없었느냐고.
분명 그런 잔소리를 했었을 텐데.
‘들을 수가 없다.’
그 나긋하던 목소리를, 웃음기를 머금다가도 금세 진지해지곤 하던 말투를.
이렇게나 간절한데도, 볼 수가 없다. 만질 수가, 기억할 수가, 추억할 수가.
“록시나가 벌써 5살이라고 하더군.”
시간이 참 빨라. 당신이 떠난 게 벌써 5년이라니.
록시나가 세상에 나오길 기다리던 당신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아이의 생일 같은 건…… 챙기지 못했다.”
헤이녹스가 간 곳은 고작 한 발차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였으니.
“변명하자면, 생일 같은 거 챙길 여력도 없었어.”
체드만의 생일도, 렌자드의 생일도. 그리고 록시나의 생일조차 단 한 번도.
“당신이 왜 그리 걱정했는지 알겠네.”
숨이 다 꺼져 가는 상황에서도 왜 아이들을 그렇게 걱정했는지.
당신이 떠나가는 그 순간에, 그 얕은 숨소리와 걱정이 내가 아닌 아이들을 향한다는 것이,
“서운했다. 정말 유치하게도.”
종종 내게 애 같다고 하던 당신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어.
나는 정말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 같았다. 내 상처를 돌보기에 급급하고, 책임감 따위 질 줄도 모르고.
“비겁하게 도망쳤지. 전쟁터로.”
정말 목숨을 내놓을 마음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죽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다.”
당신이 떠나고 당장이라도 따라가고 싶었다.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프리실라를 잃으며 모든 의지조차 사라진 헤이녹스였지만, 그런 그를 붙잡아 둔 건 고작 몇 초의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하고.”
고작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그 갓난아이 때문에.
헤이녹스는 죽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던 그 찰나의 순간, 헤이녹스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파란 눈동자였다. 무척이나 새파래서 그 안을 가늠할 수조차 없게.”
너무도 투명한 무언가는 오히려 그 속을 알 수가 없다고 했던가.
“정말 웃기게도, 나는 그 눈빛 때문에 나를 버릴 수가 없었어.”
시릴 정도로 푸른 눈에 비치던 그의 절망 어린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체드만과 렌자드, 록시나라는 세 아이를 모른 척했던 그 시간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서.
모든 책임을 떠안긴 채 홀로 편하려 했던 어리석은 판단이 어떤 결말을 만들지.
헤이녹스의 죽음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내 등에는 너무도 많은 책임이 있어. 사람의 목숨이란 게 달려 있어서,
“가끔씩 그게 너무 버거울 때가 있는데.”
포기는 못 하겠어.
그 모든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버렸으니까. 내가 지켜야 하는 건 당신뿐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뒤늦게야 깨달았으니까.
“아주 오래 기다리게 할 것 같아.”
헤이녹스는 프리실라의 비석을 쓸며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다 갈게.”
아이들이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을 때,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제국을 위할 수 있을 때까지.
헤이녹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언덕은 고요했다.
“아마 오랫동안 오지 못할 거야.”
지독하게도 잊히지 않는 그대이기에.
“한 번 보고 나면 너무 흔들려서.”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거든.
누가 당신을 떠나게 한 건지, 누가 우리가 망가지길 바란 건지, 반드시 찾아야 하니까.
그는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됐다. 단호해야 했다. 누구보다 냉정해야 했다. 남아 있는 그의 가문과 그를 따르는 가신들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라도 프리실라의 죽음은 묻혀선 안 됐다.
헤이녹스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설령 그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이래도. 돈과 시간 따위 상관없이 그는 정말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정말 무너질 것 같은 날이 오면.
“그때 다시 올게.”
당신은 나를 가장 약하게 하면서도 한없이 강하게 만드는 존재였으니.
프리실라,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 * *
“우와아!”
나는 마차가 멈추자 재빨리 내려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동부의 바다가 아름답다는 것은 앤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정도가 달랐다.
‘정말 푸르네.’
바다는 그 안이 다 비칠 정도로 푸르렀고 사람들은 그 주변에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네.’
“록시! 같이 가야지.”
따라 내린 렌자드가 나의 손을 잡았다.
“마침 오늘 시장이 서는 날이니 함께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후작 부인은 나를 밝은 낯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은 거동이 쉽지 않아 체드만과 먼저 저택으로 간다고 하는구나. 우리끼리 구경해 보는 건 어떠니?”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조아여!”
나는 한 손으로는 렌자드를, 다른 한 손으로는 후작 부인을 잡은 채 거리를 걸었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가자,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바람이 섞여 밀려왔다.
“저기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란다.”
후작 부인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과일과 채소, 각종 공예품 등을 가판대 위에 둔 상인들이 보였다.
“오늘 새벽에 들어온 고기야!”
“우리 집 농장에서 직접 딴 사과랍니다! 맛은 내가 보장해요!!”
“토마토 오늘만 3실링에 팝니다.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상인의 목소리가 클수록 가판대 앞에 모여드는 사람의 수도 많아졌다.
나는 시장의 활발함을 보며 여태까지 제국에서 본 모습 중 가장 생동감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사람 사는 거 같아.’
어딘가 정돈되어 있고, 주변에 배치된 병사 탓에 긴장한 모습이던 수도 상인과는 달리, 동부의 사람들은 정말이지 자유로워 보였다.
“이것 봐, 록시나! 저번에 수도에서 샀던 조개껍질하고 비슷하지?”
어느새 저 멀리 공예품을 파는 가판대로 간 렌자드가 조개껍질로 만든 물건을 흔들며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상인이 웃었다.
“수도의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지요. 이건 제집 앞바다에서 직접 주워 와 만든걸요.”
“예쁘다…….”
나는 비취색의 조개껍질 위 은은하게 있는 펄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도에서 온 손님인 모양이네요.”
상인은 코를 찡그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기분이다. 그 핀 그냥 가져가세요!”
“어째서…….”
렌자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상인이 고개를 숙여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테리온즈 후작님의 손님이시죠?”
“그걸 어떻게……!”
나와 렌자드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상인이 멀찍이 선 후작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후작 부인이 계신 걸 봤답니다.”
“아…….”
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테리온즈 가문의 손님이라면 분명 좋은 분이시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후작 부부에 대한 깊은 신뢰가 스며 있었다.
“부디 동부에서 좋은 추억 쌓고 가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