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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1)화 (51/106)

<51화>

“왜, 왜 그러세여……?”

나는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이마는 왜 짚는데. 말 좀 해 봐…….’

내가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자, 헤이녹스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네가…….”

헤이녹스가 뒤를 이어 말하려는 찰나, 후작 부인이 끼어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가. 공작은 네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란다.”

“그럼여……?”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그럼 뭘 얘기하려던 거지?’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나의 궁금증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뭐야 잔뜩 궁금하게 해 놓고.’

내가 문득 떠오르는 불만들에 무의식적으로 볼을 부풀리고 있는데, 무언가 내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눈을 한 채 내 볼을 찌르고 있는 렌자드가 보였다.

“머야?”

내 볼 위에 콕 하고 찍힌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하자, 어딘가 멍한 표정의 렌자드가 중얼거렸다.

“말랑거려…….”

“머라고?”

워낙 작은 목소리라 재차 묻는데, 헤이녹스가 날 안아 들었다.

“너는 가끔씩 아이답지 않을 때가 있어.”

‘아이답지 않다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헤이녹스가 말을 이어 갔다.

“집안이 거덜 난다는 걱정 같은 건…… 할 필요 없다. 평생 일어날 일 없을 테니.”

‘평생 일어날 일이 없다니.’

나는 헤이녹스의 짐짓 단호하기까지 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물론 탄제리크 가문이 부자인 거 이 제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단 말이야.’

쉽게 망할 가문이 아니란 것쯤은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지만, 내 안에 소시민적 성향은 렌자드의 소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자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돈을 써 본 적도 없으니까…… 영 감이 안 잡히네.’

게다가 가치 있는 곳에 돈을 썼다면 모를까, 질 나쁜 인형을 바가지까지 써 사 왔으면서 뿌듯해하는 렌자드의 모습을 보니 혈압이 안 오를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 집이 그러케 쉽게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여.”

나는 렌자드를 째릿 노려보며 말했다.

“저런 식으로 쓰는 건 안 대여!”

“저런 식이라면?”

헤이녹스의 물음에 나는 볼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걸 11골드나 주고 사 와서는!”

나는 고개를 돌려 체드만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책 한 권 달랬더니 몇십 권 배달하구!”

‘왜 이리 극단적인 거야 진짜.’

내가 인형 갖고 싶댔지 언제 바가지 써 오랬나?

책 한 권 필요하댔지 언제 전권 사 오랬냐고.

‘그 책 때문에 내 방 한구석이 꽉 차 버렸잖아!’

“난 서재도 업써서 침대 옆에 다 쌓아 둔단 마리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책 냄새를 맡는 기부니 어떤지 아라?”

“좋겠지.”

“물론 좋, 아니!!”

나는 불쑥 끼어든 체드만의 목소리에 그를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미안. 안 끼어들게.”

체드만은 나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입가에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진짜! 내가 못살아. 이런 식으로 돈을 쓰면 안 된다구!”

이건 내 진심 어린 걱정이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속담도 있지만.

나는 이러다가 체드만과 렌자드의 소비 스케일이 더 커질까 걱정이었다.

“아빠두 마찬가지에여!”

체드만과 렌자드가 이런 식의 소비를 하게 된 것에는 보호자인 헤이녹스의 탓이 컸다.

경제 관념에 대해 진작에 교육했더라면 이 지경은 안 왔을 거 아닌가.

“막 함부로 쓰구, 아무 데나 돈 뿌리구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셨어야져!”

헤이녹스에게 안긴 채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곳에서 돈을 허투루 썼다는 거지?”

“그거야 당연히 인형이랑 책을 산 게…….”

“그게 어떻게 허투루 쓴 게 되나.”

“녜?”

예상치도 못한 그의 반응에 나는 잠시 벙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부 록시나, 너를 위해 쓴 게 아닌가. 인형이건 책이건 말이야.”

헤이녹스의 말에 체드만과 렌자드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말이 맞아, 록시나. 나는 그저 인형을 산 것뿐이라고.”

렌자드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두 손까지 꽉 쥐며 말했다.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서 산 거였는데…… 그렇게 별로였어? 싫어서 진절머리 칠 만큼?”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나는 풀이 죽어 보이는 렌자드의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말이 그렇게 되나.’

싫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렌자드가 나를 생각해서 직접 사 온 인형인 데다가 볼 때마다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아 좋았으니까.

‘그냥 난 렌자드가 걱정됐을 뿐인데.’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도 형편없는 거짓말에 속을까 우려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구…….”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내젓는 사이 헤이녹스가 말을 이어 갔다.

“질이 좋지 않은 인형이었다는 건 좀 아쉽긴 하지만, 렌자드나 체드만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너를 위해 쓴 것인데 무엇인들 아까울까.”

내가 입술을 꾹 누른 채 그를 올려다보자, 헤이녹스는 내 머리를 헝클였다.

“앞으로는 그런 걱정하지 말거라. 그게 너를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녜에…….”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녹스가 나를 고쳐 안았다.

“인사도 어느 정도 마친 것 같으니 돌아가자꾸나.”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말했다.

“미안…….”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선물을 준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내가 눈을 내리깐 채 계속 손만 꼼지락거리는데, 체드만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 나도 네가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줄 몰랐던걸. 앞으로는 미리 이야기하고 선물할게.”

‘선물 안 하겠단 말은 안 하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의지는 꺾지 않는 체드만을 바라보며 어쩐지 그답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굳은 표정의 렌자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별로 안 괜찮아.”

그는 화가 나 보이진 않았지만,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렌자드. 별것도 아닌 일에 화내지 마.”

체드만의 가벼운 타박에도 렌자드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떡해. 기분이 많이 나빴나 봐.’

기껏 사 온 첫 선물이 싸구려 취급받는 게 생각보다 많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정말 미안. 진짜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렌자드는 눈썹 하나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웅. 해 달란 거 다 해 주께. 말만 해.”

그러자 렌자드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나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웅.”

“록시라고 불러도 돼?”

“록시……?”

내가 뜻밖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렌자드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응. 나 애칭으로 부르고 싶어.”

‘록시라…….’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웬 애칭인가 싶었지만,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한 렌자드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루 해.”

그러자 렌자드는 신이 난 듯 소리쳤다.

“록시!”

“웅.”

“록시!!”

“웅, 왜.”

“록시!!!”

나는 계속되는 부름에 그냥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별로 대답을 원하는 거 같지도 않네.’

지금 렌자드는 그저 신이 나 내 애칭을 잔뜩 부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애칭 부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나는 그의 시끄러움에 그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렌자드가 많이 기쁜가 보구나.”

후작 부인은 어쩐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애칭까지 허락해 주고, 둘이 정말 친한 것 같아 다행이야.”

나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밝게 웃어 보이는 후작 부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도 걱정이 많았던 거 같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무척이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에게서 미묘한 그늘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게 음울한 기운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계속해서 무언가를 걱정하고, 긴장하고 있는 듯한 모습.

‘프리실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나 때문이었나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와 탄제리크 사람들의 관계 때문에.

‘걱정되었겠지. 내가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까 봐.’

괜한 걱정은 아니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무척이나 어색하고, 서로를 껄끄러워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어쩌다 보니 진심을 털어놓았고, 어쩌다 보니 서로를 용서했고, 어쩌다 보니 익숙해지고 있었다.

서로가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문득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무언가가 목 근처를 꽉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그냥 이상한 일이라 여기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속이 이렇게 먹먹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왜인지 몰려오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입술을 꾹 눌렀다.

정말이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는데, 그걸 어떤 감정이라 함부로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몰려오는 감정에 휩쓸리면 휩쓸린 대로, 눌러 내면 눌러 내는 대로.

흐르는 대로, 그냥 이렇게.

아빠의 어깨에 기댄 채로, 가족의 시선을 받은 채로, 이렇게.

아주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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