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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50)화 (50/106)

<50화>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후작이 다가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제가 미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여.”

정말 나를 미워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게 옳다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이 이런 것이었다면, 이런 종류의 기억이었다면.

나라도 잊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웠을 것이고, 놓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싫었는데…….”

이렇게 할 거라면 나를 왜 낳았을까.

이토록 미움 당할 일이라면 나를 왜 선택했던 것일까.

나를 괴롭히던 렌자드도, 무신경한 체드만과 헤이녹스가 정말 미웠지만, 그중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프리실라에 대한 내 마음이었다.

한 번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도 어떠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

나는 프리실라와 한 번 마주해 본 적 없었으나, 그건 나에게 있어 독이 되기도,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녀와 내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녀를 마음껏 원망할 수 있었고, 또 알지 못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마음 편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프리실라는 나에게 정말이지 애매한 존재였다.

딸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이었는데, 나에게는 그런 그녀의 선택이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날들이었다.

정말 그녀가 희생했다는 것에 한없이 박수를 보내 줘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고마운 적 없어.’

그녀의 선택은 일방적이었다. 물론 자신의 희생에 대해 배 속의 아이의 의견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렌자드랑 체드만은?’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었고, 또 사랑받고 싶어 했고, 사랑하고 싶어 했다.

무뚝뚝한 헤이녹스가 줄 수 있는 애정의 종류가 있듯, 프리실라가 줄 수 있는 애정이 있었다.

렌자드와 체드만은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따뜻한 감정에 대해서도 배웠어야 했는데.

프리실라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선,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고 떠났다.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정말 사랑하던 사람은 이미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프리실라가 조금만 더 이기적인 선택을 했더라면, 남겨질 이들에 대해 조금만 더 걱정했더라면.

버림받은 것 같은 더러운 기분과 불쾌함에 대해 느낄 일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당신이 떠나가고 남겨진 이들은 당신 앞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나는 그런 그들 옆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게 궁금해서 이곳에 왔는데.

‘마음이…… 이상해.’

전부 당신 탓이라고,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렌자드에게 괜한 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무신경한 헤이녹스와 선을 긋는 체드만의 태도가 나를 위축되게 만든 것도,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

그렇게 탓하고 싶었는데.

‘이런 감정이 드는 건 정말 이상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서,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그렇지만.

이제는 그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해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당신을 추억해서도 아니다. 보고 싶다는 감정 때문도 아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여.”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도,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비석 앞에 모여서,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든 채 비석을 가만히 바라보자, 체드만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록시나도 같이 가 볼래?”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체드만이 나를 비석 앞으로 이끌었다.

“어머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렌자드 옆에서, 체드만은 나와 손을 잡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손을 잡은 아이가 록시나예요.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나 이제 다섯 살이 되었고요.”

그리고 그건,

‘체드만이 프리실라를 떠나보낸 지 5년이 다 되어 간다는 거겠지.’

갑작스레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전장으로 떠나 버렸을 때, 체드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다 보니 가주 대리 자리에 올랐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방계의 손을 타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나는 처음 알게 된 체드만의 속내에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정말 잘 이끌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업도 더 늘리고 가주 일 배우기에 집중했는데,”

체드만은 잠시 입술을 꾹 짓누른 후 말했다.

“그게 잘 안 됐어요.”

그의 말에서는 약간의 자책감과 또 다른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제가 이렇게 나약한 줄 몰랐어요. 잘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 거대한 가문을 수장으로서 이끈다는 것은 많은 능력을 요했고, 후계자 수업으로 이론을 배운 것이 전부였던 체드만에게 가문의 대표가 되는 것은 당연히 많은 시련이 뒤따랐을 것이다.

“아버지가 왜 매일 그렇게 바쁘셨는지, 알 것도 같았어요. 비록 전 아버지에게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렴풋이는요.”

체드만은 말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웃음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제가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거고요.”

그렇게 말하는 체드만에게서 허탈함이 묻어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체드만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나를 돌아본 체드만은 능숙히 어두운 낯빛을 지우고 평소와 같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았다.

“록시나, 너도 한마디 할래?”

“나……?”

갑작스런 체드만의 제안에 나는 다시금 갈등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실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후작 부인이나 렌자드에게 들은 게 전부였고,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에게 가까운 척하는 것도 민망했다.

하지만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렌자드와,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내려다보는 체드만, 그리고 뒤통수 위로 쏟아지는 눈빛들에 선뜻 거절하지 못하고 비석으로 다가갔다.

“어…….”

나는 프리실라의 이름이 단정하게 새겨져 있는 비석 앞에 서 머뭇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프리실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선뜻 운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체드만이 작게 속삭였다.

“하고 싶은 말 해. 최근에 한 일도 좋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

나는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여.”

“큽!”

나는 어쩐지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고개를 돌렸지만 후작이나 후작 부인이며 탄제리크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처음 뵙습니다. 록시나 탄제리크에여.”

첫 만남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부터 했다.

“저는, 이제 다섯 살이 되었어여. 생일이 얼마 전에 지났거든여.”

처음 받은 축하였으며, 동시에 프리실라의 기일이었던 생일은 정말이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색하지만 속이 간질거렸어.’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자, 다시금 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음……. 아! 축제에서 길 잃은 적도 있어여. 죽을 뻔했지만 축제는 재밌었어여.”

방금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렌자드가 움찔했던 거 같지만, 일단 못 본 척했다.

“아! 저번에는 체드만 오라버니가 선물을 줬는데…… 제가 책을 사 달라고 했거든여? 근데 글쎄, 서점을 다 쓸어 온 거에여!”

‘아 갑자기 생각하니까 또 황당하네.’

내가 책을 사 달랬지 언제 전집을 사 달랬냐고.

“또, 또! 렌자드는 무슨 인형을 사 왔는데 너덜너덜한 걸 가지구 와서는 10골드를 넘게 줬다는 거에여!!”

‘아, 다시 생각해도 속 터지네, 정말.’

그런 허술한 인형을 1골드도 아니고 11골드나 주고 사다니.

‘바가지 씌우는 사람 보면서 누가 속을까 했는데,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었네.’

“아주 호구가 따로 업써. 집안 아주 거덜 내겠네…….”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

고개를 돌리자 렌자드가 여전히 부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어쩐지 특이한 걸 봤다는 듯한 표정에 나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뭐지? 뭔가 말실수했나?’

나는 내가 한 말을 빠르게 돌이켜 봤다.

‘너무 친근한 척했나? 아니면 묘지 앞에서 너무 떠들어서 그런가? 좀 흥분했던 거 같긴 한데…….’

나는 나의 방정맞음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좀 조용히 했어야 했는데 그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생각하니까 속이 터져서…….’

나는 소란스럽게 한 것을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록시나…….”

시름 가득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헤이녹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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