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언덕을 무사히 오르자,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세워진 수십 개의 비석이 보였다.
‘의외네.’
프리실라는 테리온즈가의 유일한 적장녀였고, 동시에 탄제리크가의 안주인이었기에 무덤 역시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여기에는 프리실라의 비석만 있는 게 아니네?’
커다란 나무들 아래에는 프리실라의 것을 포함한 수십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유난히 많은 꽃이 놓여 있는 비석이 눈에 띄었다.
“저거…….”
내가 그 비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후작 부인은 어쩐지 슬픈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가 프리실라가 있는 곳이란다.”
나는 그 비석을 보는 순간, 왜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분명 처음 보는 건데.’
어쩐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한 느낌.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운, 그리운 무언가를 발견한 그런 기분.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해 본 적 없었으니까.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한 번 본 적 없는 남인데, 세상을 뜬 지 몇 년 후에야 만난 우리인데, 이런 오묘한 느낌이 드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가만히 멈춰선 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렌자드가 비석 앞으로 달려갔다.
“엄마.”
렌자드는 비석 앞에 무릎을 세워 앉은 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가가려는데, 렌자드가 느리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엄마.”
렌자드는 4년 만에 처음 보는 프리실라의 비석임에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도 이곳에 왔던 것처럼, 비석 앞에 앉아 말했다.
“저 월터 경한테 검술을 배우고 있어요. 엄마가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요.”
렌자드는 그가 본격적으로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는 것부터 차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아침마다 푸이치가 파이를 만들어 줘요. 록시나가 좋아하는 종류로만. 가끔씩 서운하기는 한데, 그래도 록시나가 먹는 거라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어.”
“렌자드.”
렌자드는 체드만이 부르는 소리에도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얼마 전에는 로시움 축제에도 갔다 왔는데 볼 게 엄청 많았어요. 마지막에는 폭죽이 엄청 화려하게 터진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결국은 못 봤어요. 내가 손을 놓치는 바람에 록시나가 길을 잃어버렸거든요.”
렌자드는 눈을 내리깐 채 덤덤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동부에는 어제 도착했어요. 저택에서는 로이라는 강아지도 봤는데요, 조금 무섭게 생기긴 했는데 엄청 착하더라고요. 근데 나보다 록시나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렌자드는 대꾸 없이 혼자 중얼거리면서 가끔씩 자신의 이야기에 웃기도 했다.
“해변에도 갈 거예요. 엄마가 조개껍데기를 좋아했다고 해서 직접 주워 보려고.”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인 렌자드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마는 어떠세요? 저 엄마는 뭐 하는지 궁금해요.”
돌아오는 답이 없을 거라는 건 렌자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선 무언가 안에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러면 또 싫을 거 같아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멈추지 않는 렌자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나에게 보이는 건 렌자드의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렌자드…….’
내가 다가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렌자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는, 엄마는…….”
뒤이어 들리는 말에, 비석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던 헤이녹스가 멈칫거렸다.
“제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렌자드의 목소리는 평소 장난스러운 그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엄청 보고 싶은데……. 엄마는 안 그래요?”
점점 커지는 렌자드의 목소리에 체드만이 다가가려 하자, 헤이녹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매일 밤마다 엄마가 생각나요. 문을 열고 책을 읽어 주러 오실 것만 같아요. 아침에는 커튼을 거두며 잘 잤냐고 물어보실 것만 같아요, 악몽을 꿨다면 안아 주며 걱정 말라고 하실 것 같고 엄마가…….”
렌자드는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아직 아이라고, 엄마가 그러셨잖아요. 아직 아이니까 괜찮다고. 뭐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으면서 왜 이렇게 갑자기…….”
‘…….’
“엄마가 너무 미운데, 너무 보고 싶어…….”
‘아…….’
내 안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나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던가. 내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내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있던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살아온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맹목적이고, 다른 것을 볼 줄도 모르고, 상황을 이해할 생각이 없고,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어린아이라면 그런 것이라고, 사람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무언가와 더 닮아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착각이었어.’
렌자드는 있는 그대로일 뿐이었다. 고통을 느끼고, 그만큼 슬퍼할 수 있고, 타인의 시선이 감정에 닿는 일이 없고.
네가 이렇게나 아팠다는 걸. 괴로웠다는 걸. 이렇게나 사랑받았더라면 그 관심이 고프기도 하겠다는 걸.
순식간에 사라진 사랑을 갈구할 법했다. 너도 아이였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지금껏 다 큰 어른도 수습하지 못할 감정을 너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너는 얼마나 더 담담하게 슬픔을 받아들여야 했던 건지.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 이 현실이 얼마나 가혹하고, 냉정했는지.’
왜 항상 그 사람의 전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야 깨닫는 것일까.
아,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다.
나에게 상처가 있었듯,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란 걸.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었으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터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고개를 돌리자,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체드만이 보였다.
그는 더는 부정할 수도 없이 울고 있는 렌자드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흘리지 못했다.
체드만에게는 수많은 명분이 필요했다.
친구를 만날 명분, 하루쯤 수업을 빼고 쉴 명분, 가주의 자리를 대신할 명분, 후계자의 자리를 지킬 명분. 그리고 어느새 그의 어깨에는 타인의 앞에서 감정을 억제할 명분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체드만은 얼마나 많은 명분과 맞이해야 했던 걸까.’
나와 렌자드보다 아주 조금 더 일찍 태어났을 뿐인데, 헤이녹스와 프리실라의 첫 아이였을 뿐인데, 이 탄제리크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그의 미래는 당연한 수순처럼 정해져 있었다.
얼마 전에는 체드만의 방으로 직접 그를 찾으러 간 적이 있다.
푸이치가 구워 준 스콘을 직접 가져다주는 길이었는데, 어째서인지 한창 후계자 교육을 받아야 할 체드만의 방이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 없는 방에 오래 머무는 것은 실례인 듯해 접시만 두고 얼른 나오려던 찰나, 나는 체드만의 책에 꽂힌 길고 납작한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다.
그 은색 책갈피 위에는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디칼에게 제국어를 배운 후 한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글자 읽기에 빠져 있던 나는 신이 나 그 글귀를 읊었다.
‘가문을 번영케 하리라.’
분명 책갈피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가문을 번영케 할 것이라는 말이 마치 각인처럼.
체드만이 후계자니까, 후에는 탄제리크의 가주가 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참느라 불거진 눈동자, 주먹을 꽉 쥔 채 떨리는 손, 짓눌려 새하얘진 입술까지.
‘내가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 후계자의 무게를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던가, 어린아이의 생떼 한 번 쓰지 못하는 체드만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었나.
뒤를 돌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후작 부인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후작이 애써 지팡이로 온몸을 지탱한 채 힘들게 버티고 있었고, 헤이녹스는.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주 고요하게, 그는 그저 비석을 바라보았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고, 그게 다였다.
그를 처음 본 나였다면, 정말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정의 내리고 싶지는 않아.’
신성력이 발현하고, 열이 펄펄 끓던 순간 흐릿하게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게 환영일지, 나의 소망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 모습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을 잃는다는 건 어떤 일인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놓은 채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겪어봐야만 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아픔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고 믿어 왔는데.
‘내가 간과하고 있었어.’
직접 겪는 것과 그걸 바라보는 것의 차이를.
‘너무도 가볍게 생각했어.’
모순적이었다. 남이 나의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면서도 나는 그들의 고통을 축소시킨다는 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고서, 나를 알아달라고 떼를 썼다.
어쩌면 렌자드나 체드만보다 더,
정말 어린아이처럼.
문득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는 나의 말에 경악을 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으나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슬프면 운다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