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가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나는 시녀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새초롬한 인상의 소녀가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입은 남색의 원피스는 평소에 입던 옷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이렇다 할 장식도 없어, 무척이나 차분해 보였다.
“고마어.”
나는 시녀에게 작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록시나, 준비는 끝났니?”
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후작 부인의 목소리에 나는 문을 열며 말했다.
“네, 다해써여.”
잠시 나를 바라보던 후작 부인은 내 잘 정돈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입었구나.”
그러곤 내게서 손을 뗀 후작 부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핀 아니에여?”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후작 부인은 가볍게 끄덕였다.
“프리실라가 동부에 살 때 가장 아꼈던 핀 중 하나였단다. 보석 알 사이 사이에 조개껍데기 가루가 뿌려져 있어서 바다의 눈부심이 떠오른다고 했거든.”
후작 부인의 말대로 핀은 작지만 반짝거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럼 이건 엄마 거 아니에여?”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후작 부인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프리실라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너에게 주길 더 바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러더니 내 머리에 조심스레 핀을 꽂았다.
“예쁘구나. 정말 잘 어울려.”
그녀의 말에 내가 어색하게 머리 위에 핀만 만지작거리자, 후작 부인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자꾸나.”
후작 부인과 손을 잡은 채로 아래로 내려오니, 이미 준비를 마친 렌자드와 체드만, 헤이녹스가 후작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평소보다 차분하고 정돈된 모양새였다.
“록시나.”
멀리서 오는 나를 먼저 발견한 렌자드가 한 발짝 다가왔다.
“어서 타자. 할아버지도 함께 가신대.”
“할아버지두여?”
내가 예상치 못한 동행인에 되묻자 후작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도 오랜만에 딸애가 보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시다고…….”
내가 말끝을 흐리며 묻자, 후작이 손에 든 지팡이를 흔들었다.
“이게 있으니 괜찮다. 주치의도 어느 정도의 움직임은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아…….”
내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의 옆에 서 있던 헤이녹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록시나.”
“녜에.”
나는 차마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답했다.
프리실라를 잃었음에도 밀려오는 죄책감에 아직까지 제대로 그리워하지도 못한 그였다.
‘화내면 어떡해.’
이미 너무 괴로워한 그였기에, 프리실라의 묘를 찾아가겠다고 한 것이 괜히 그의 상처를 들쑤시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헤이녹스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나를 들어 올렸다.
“어어?”
갑작스러운 시야 변화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헤이녹스는 나를 마차 안에 앉히며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
내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헤이녹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또 어디에서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내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네 탓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 줄 알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헤이녹스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는 사이에 렌자드가 올라타자, 마차의 문이 닫혔다.
“체드만 오빠눈? 할아버지랑 할머니눈?”
내가 고개를 들어 묻자, 내 건너편에 팔짱을 끼고 앉은 헤이녹스가 말했다.
“체드만은 후작, 후작 부인과 함께 다른 마차를 타고 올 거다.”
“아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이내 손을 뻗어 내 눈 앞을 가렸다.
“조금 걸리니 눈 좀 붙이거라.”
순식간에 어두워진 시야에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 * *
“록시나, 도착했어.”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도착해써……?”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의 풍경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꽉 잡거라.”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나를 안아 옮긴 헤이녹스를 따라 렌자드가 내렸다.
“록시나, 오는 길에 멀미가 나지는 않았니?”
나는 후작 부인이 다음 마차에서 내리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느라 몰라써여.”
나의 대답에 후작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프리실라도 유난히 멀미가 심했는데 말이야.”
그녀는 나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애는 마차를 자주 타는 편이 아니었지. 바로 앞의 거리조차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과는 달리 직접 걷고 느끼는 걸 좋아했어.”
나는 후작 부인의 말에 프리실라가 해변가 근처를 자주 산책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런데 사실 그게 좋아서만은 아니었단다. 프리실라는 유난히 멀미가 잘 나서 마차에만 타면 그렇게 고생했거든.”
“엄마가여?”
“그렇단다.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이 타야 하는 날에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아 버리더구나. 잠을 자면 멀미가 났는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후작 부인의 말에 나는 아까 전, 나의 눈을 가려 주었던 헤이녹스를 떠올렸다.
‘내가 멀미가 날까 봐 자라고 한 건가?’
프리실라가 유독 멀미가 심하다는 것을 헤이녹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에게 프리실라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생생한 기억이었으니.
내가 새삼 느껴지는 헤이녹스의 배려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후작 부인이 작게 웃었다
“공작은 티 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나 언제나 진심인 사람이기도 하지.”
‘언제나 진심…….’
나는 후작 부인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언제나 진심이라면, 나를 걱정하는 마음도 진심이었으려나?’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의문을 가진 이유는, 인정하기엔 아직 부끄러워서.
저 무뚝뚝한 헤이녹스가 나를 염려하고 배려한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곧 밀려오는 낯간지러움에 내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후작 부인이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어서 가자꾸나.”
후작 부인을 따라 드넓은 들판 옆에 난 길을 걷자, 어느샌가 저 멀리 세워진 비석들이 보였다.
“다 와 가는구나. 저기 저 언덕만 넘으면 된단다.”
꽤 되어 보이는 언덕의 높이에 나는 자연스레 뒤를 돌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이따금씩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걸 보니 아무래도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언덕은 오르기 어려울 거 같은데……. 도와드려야 하나? 아니지. 옆에 체드만이 있으니 안 그래도 되려나?’
나는 선뜻 후작을 부축하겠다 나설 수 없었다.
그건 나와 후작이 그리 가깝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응접실에서 처음 후작을 보았을 때, 거동이 불편한 그를 사용인 중 누구도 돕지 않았다.
‘아마도 자존심 때문이겠지.’
무려 동부를 호령하는 테리온즈가의 가주였다. 그런 그가 남에게 의지하는 일이 익숙할 리 없었다. 그러니 주변의 손을 빌리지도 않으려 했던 거겠지.
남에게 의지하는 건 그의 자존심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손을 움찔거리며 후작에게 다가갈지 말지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후작 부인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도와드리렴. 분명 고마워하실 거란다.”
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천천히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그래, 록시나. 불렀느냐?”
지친 와중에도 나에게 상냥히 대답해 주는 후작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혹시 힘드시면, 제가 부축해 드릴까여……?”
내가 조금은 긴장한 채로 후작을 바라보자,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내 크게 미소 지었다.
“그래, 조금 힘이 드는구나. 와서 도와주었으면 싶은데.”
그의 답에 나는 후다닥 달려가 후작의 오른쪽 다리를 잡았다.
‘이, 이게 부축이 맞나?’
원래는 후작이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부축해야 하지만, 그러기엔 내 키가 너무 작았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후작의 걸음걸이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것뿐이었지만, 후작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고맙구나, 록시나.”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후작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비록 힘이 세지도, 키가 크지도 않아 그를 부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후작에게 얼마나 ‘잘’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
“곁에 누군가 있으니 그리 멀게 느껴지지도 않은 것 같구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오묘한 기분으로 비석이 있는 곳까지 그를 부축하였다.
후작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선 안 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동정이나 연민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테리온즈 후작이 동부의 발전을 이루고, 젊은 시절 전장에서 세운 공으로 온 제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검을 놓은 지는 좀 되었지만, 여전히 용맹한 기사의 상징인 그가 마차 사고로 다리 하나를 저는 데다, 걸음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처음은 안타까움, 그다음은 동정과 연민, 도움을 주고자 했던 마음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면 그게 약점이 되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우상이 된다는 건 위태로운 일이었다.
‘평판은 뒤집힐 수 있고, 사소한 일로도 쉽게 흔들리니까.’
견고하다는 건 없었다. 작은 소란에도 뿌리는 드러날 수 있었다. 그게 영웅의 추락이라면 더 쉬웠다.
후작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수십 년간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그가 그를 물어뜯기 위해 준비하는 이에게 단 한 점의 약점도 내비쳐선 안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강해졌을 것이고.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렌자드와 함께 걸어오는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서부의 주인, 제국의 검, 가장 뛰어난 소드마스터이자 탄제리크의 가주.
헤이녹스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는 무척이나 많았다. 그는 그만큼의 업적을 세운 사람이었고, 그만큼의 땀을 흘린 사람이었다.
노력으로만 모든 게 이루어질 수 없다지만, 헤이녹스는 재능도 있었다.
타고난 천재, 제국의 전력, 충성스러운 신하.
모두가 얻고 싶어 목을 매는 수식들을 얻는 것에는 그의 고귀한 태생이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출신만으로 유지되는 일이던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었다.
헤이녹스가 내건 대가는 여유였고, 그게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온 이유였다.
프리실라를 사랑했지만 매일 함께할 수 없었고, 렌자드와 체드만을 아꼈지만 함께 놀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바라볼 여유도.’
그의 매정함을 이해할 생각은 없다. 어린아이에게 그의 차가움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으니.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걸 헤이녹스는 몰랐고, 그래서 성급했고, 불완전했고, 불안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이 애정을 준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빠서, 피곤해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두려워서 같은 말은 더 이상 상처를 주는 것에 변명이 될 수 없었고.
그 탓에 홀로 너무도 외로웠지만,
그럼에도 그가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가 조급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 버렸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