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후작 부인이 록시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는 말에는 정말이지 단 한 스푼의 과장도 없었다.
록시나가 프리실라의 이야기를 들은 후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다 이내 피곤한 듯 소파에 앉아 고개를 까닥거리자, 후작 부인은 그런 아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사랑스럽구나.’
이 조그마한 아이가 만나고 싶어 프리실라가 매일 노래를 불렀더랬다.
“아가, 너 그거 아니?”
후작 부인의 말에 록시나가 애써 눈을 뜨며 대답했다.
“멀여……?”
“아니다. 미안하구나, 내가 괜히 너를 깨웠어. 얼른 자렴.”
그러면서 부인은 록시나를 안아 복도로 나왔다.
“마님, 제가 데려다드리겠…….”
“쉿.”
부인은 손을 내미는 시녀에 고개를 내저으며 록시나를 안은 채 빈방으로 향했다.
종종거리는 시녀에도 꿋꿋이 고집을 꺾지 않은 후작 부인은 록시나를 침대에 눕히고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감사해여…….”
이윽고 밀려오는 피곤함에 완전히 눈을 감아 버린 록시나를 보며 부인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프리실라가 너를 만났다면 참 좋아했을 텐데.’
이렇게 예쁜 아이를 한 번 안아 보지도 못하고 떠난 프리실라가, 부인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너는 네가 공작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후작 부인은 록시나가 정말이지 프리실라를 빼다 박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고마움을 알고,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비록 함께 대화를 나눈 건 잠깐이었지만, 숱한 사람들을 만나 봤던 후작 부인은 단번에 록시나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다정하게 자랐구나.’
삐뚤어질 법도 한데 록시나는 한 번 그러질 않았다.
지난 몇 년간, 후작과 후작 부인은 불편한 몸을 대신해 매달 탄제리크가로 편지를 보냈다.
간단한 안부부터 근황, 가주 자리를 대신하는 체드만에게 보내는 조언과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렌자드를 위해 보내는 선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록시나에게만큼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프리실라가 죽는 순간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어쩌면 못난 부모라고 한심하게 생각할까 봐.
편지를 썼다가, 더 좋은 말로 고쳐 썼다가, 구겼다가, 다시 썼다가
결국 보내지 못하고 쌓인 편지만 족히 서른 통이 넘었다.
‘이런 우리를 너는 이렇게나 따뜻하게 안아 주는구나.’
그간 록시나가 받았을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는데, 도리어 위로받고 있었다. 이 작지만 똑부러지고 속 깊은 아이 덕분에.
이토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너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 * *
“하아암…….”
눈을 뜨기도 전에 크게 하품을 한 나는, 천천히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코끝에서 짠 냄새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냄…… 아,”
나는 그제야 내가 어제 동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마차를 오래 타서 피곤했나.’
머리를 긁적거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바다의 냄새가 선명하게 나지만 프리실라의 방은 아니었다.
‘손님방이려나?’
깔끔하게 정리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문득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고개를 내렸다.
“이게 머…… 야?”
연한 갈색에 군데군데 있는 검정색 털, 말랑거리는 귀를 가진 그건 바로…….
“강아지?!!”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얘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저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내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놀란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혀를 내밀고 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강아지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얘, 머지……? 누구야 얘?”
“어떤 걸 말씀하시는…… 어머!”
내 옆에 떡하니 누워 헥헥거리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한 시녀가 서둘러 다가왔다.
“로이야, 너 여기 있었구나.”
“로…… 이?”
내가 아직도 얼떨떨함에 천천히 묻자, 강아지를 안아 든 시녀가 말했다.
“네, 아가씨. 로이는 이 강아지 이름이랍니다. 마님께서 주인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게 딱해 데리고 오셨어요.”
“그러쿠나…….”
“아가씨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아마 아침에 제가 이 방을 환기시키러 왔을 때 같이 들어온 거 같아요.”
“어, 어 난 괜차나.”
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밖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록시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건 어김없이 렌자드였다.
“일어나 있었구나! 그럼 우리 얼른 내려가자. 할아버지가 같이 아침 식사하재! 형은 이미 내려가 있어.”
“응, 지굼 갈게.”
내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 그동안 시녀의 품에 얌전히 앉아 있던 강아지가 뛰어내려 내게로 달려왔다.
“왜, 왜 그래?”
내가 당황스러움에 내밀던 발을 도로 이불 속에 집어넣자, 렌자드가 작게 손뼉을 쳤다.
“아, 얘가 로이구나?”
“오빠두 처음 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렌자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편지에서도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어제도 바로 자느라 못 봤거든.”
렌자드가 신기한 듯 다가와 천천히 로이를 쓰다듬었다.
“우와, 신기해…….”
로이가 도망가지 않은 채 얌전히 앉아 있자, 렌자드가 더욱 적극적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털 진짜 부드럽다. 오늘 아침에도 빗질했나 봐.”
렌자드가 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계속 ‘우와, 우와.’ 하는 소리를 내자, 나는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빼며 물었다.
“진짜 부드러워……?”
“응, 진짜로!”
“물지는 않아?”
내 물음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로이는 저택에 와서 한 번도 사람을 문 적이 없어요.”
“정말?”
내가 여전히 걱정된다는 듯 물어보자 렌자드가 나를 바라보며 로이를 쓰다듬었다.
“진짜 안 물어. 이것 봐,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안 물잖아. 되게 순한 강아지인 거 같아.”
“그래……?”
무해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바라보는 로이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에서 내려와 손을 뻗었다.
“어?”
내가 손을 뻗어 천천히 로이에게로 다가가는데, 로이가 앞발을 들어 내 손 위에 올렸다.
“록시나! 로이가 지금 네 손 위에 발 올렸어!”
놀란 듯 큰 목소리로 말하는 렌자드에 나는 멍하니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로이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반대쪽 손을 뻗어 로이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착하지.”
내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로이는 혀를 쭉 내민 채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진짜네.”
나는 기분이 좋은 듯 웃는 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착해…….”
“그치? 로이가 되게 착한 애인 거 같아. 발 내민 거 보니까 머리도 좋은가 봐!”
렌자드가 신나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내 귀에는 렌자드의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안녕?”
나는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투명한 로이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는 록시나야.”
나는 로이의 부드러운 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만나서 반가워.”
“가치 가, 로이!”
방문을 열자마자 빠르게 달려나가는 로이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왜 이렇게 신이 난 거야…….’
이미 저만치까지 간 로이는 기분이 좋은 듯 혀를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헉, 왜 이러케 빠르니……?”
로이를 따라 복도를 한참 뛰었더니 숨이 다 막혔다.
내가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함께 뛰어온 렌자드가 물었다.
“힘들어?”
“보면 몰라?”
내가 당연한 걸 묻는 렌자드를 살짝 노려보자, 렌자드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렌자드는 땀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너, 머야……?”
내가 이상한 걸 봤다는 듯 바라보자, 렌자드가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렌자드 검술 배웠지?’
매일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 그리고 오후 내내 렌자드는 검술 훈련에 매진했다.
‘전에 기사가 되겠다고 그랬던가.’
그 명망 높은 탄제리크 가문의 기사들에게 검술을 배우니 당연히 체력도 좋아야겠지.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나는 쪼그만 내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곤, 렌자드의 등을 툭툭 토닥였다.
“왜 그래?”
렌자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으면서도 토닥이는 손길을 내치지는 않았다.
“드러가자.”
나는 어느덧 도착한 문 앞에서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식당을 들어섰다.
“록시나! 왔구나.”
“렌자드도 어서 들어오렴.”
먼저 식탁 앞에 앉아 있던 후작과 후작 부인은 나와 렌자드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이랑 함께 왔구나. 식당 앞에서 만났니?”
후작 부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녀.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 침대 위에 누워이써써여.”
“침대 위 말이니?”
후작 부인이 의아하다는 듯 말하자, 렌자드가 후작 부부의 옆자리로 가며 말했다.
“방문이 잠깐 열린 사이에 들어갔나 봐요.”
“그렇구나. 많이 놀라지는 않았니?”
걱정 섞인 부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갠차나여. 로이는 착한 애거든여.”
“그러니?”
어째선지 웃음기 있는 말로 나를 바라본 후작 부인은 건너편에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이는 시종들이 맡을 테니 이만 앉으렴. 오늘 식사는 주방장이 특히 더 신경 썼다는구나, 기대해도 좋을 거야.”
“공작가 주방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테리온즈가 주방장도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 자부한다.”
나는 후작이 이어서 하는 말에 탄제리크 저택에 있을 푸이치를 떠올렸다.
‘푸이치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내가 쿠키를 좋아한다는 말에 매일 같이 다른 재료를 넣어 구워 준 푸이치였다.
‘맛있는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
마침 어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자서 배가 고프던 찰나였다.
나는 서둘러 헤이녹스와 체드만 옆의 빈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은 잘 잤어?”
나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묻는 체드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웅.”
그러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헤이녹스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아빠도 잘 주무셨어요?”
사실 나는 식당에 들어서서부터 기분이 좋아진 찰나였다.
‘헤이녹스 얼굴이 조금 밝아졌잖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니 매일같이 헤이녹스를 관찰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조차 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차이였지만 나는 그와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아주 조금 연해졌어!’
사실 헤이녹스의 검은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는 다크서클과도 퍽이나 잘 어울렸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의 피곤함이 덜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어제 늦게까지 일 안 했나 봐!’
밤 늦어서까지 일하지 말라고 체드만과 렌자드와 함께 말한 보람이 있었다.
헤이녹스가 말을 귓등으로만 들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나는 계속해서 방긋방긋 웃었다.
‘은근 세심한 구석이 있다니까.’
“……왜 그러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느리게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 녀?”
“그러면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헤이녹스의 얼떨떨한 반응에도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아빠가 조아서 봐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