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후작을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잠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후작이 되묻듯 눈썹 한쪽을 들썩이자 헤이녹스가 말을 이었다.
“록시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헤이녹스의 긴장을 읽었는지 그를 바라보던 후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록시나에 대해서는 나 역시 한없이도 부족한 사람인데 말이야. 도움이 되지 못할 걸세.”
“신전과 관련된 일입니다.”
“신전이라?”
헤이녹스가 고저 없이 내뱉은 말에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프리실라의 죽음에 관해서라면 이미 이쪽도 충분히 의심하고 있으니, 걱정 않아도…….”
“록시나에게.”
헤이녹스는 후작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말했다.
“신성력이 발현되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늙다 보니 귀가 어두워져.”
헤이녹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후작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헤이녹스는 그러한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덤덤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발현된 지는 좀 되었습니다. 아티팩트로 억제해 오던 중이었고.”
“…….”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지만 지금 헤이녹스에겐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억누르던 힘이 폭발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숨기기만 할 수 없습니다.”
헤이녹스는 고개를 들어 후작과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록시나를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이녹스에게는 그답지 않은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곧 대신관이 제국으로 돌아오면 록시나가 발현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전에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한 그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격양되어 있었다.
“공작가의 이름이 필요하다면 그게 무엇이든 응할 테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록시나를…… 이대로 떠나보낼 순 없습니다.”
헤이녹스는 마차에서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리던 록시나의 모습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집무실 소파에서 옅은 숙면을 취하면서도 식은땀을 흘린 채 눈을 뜨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도무지 록시나의 젖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서. 전부 부족하고 멍청한 제 탓인 것 같아서.
흔들리는 모습을 그 누구의 앞에서도 보여 주지 않았던 헤이녹스였다.
언제나 침착하던 그였으나, 록시나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헤이녹스도 여유로울 수 없었다.
“신성력과 관련된 일은 신전이 가장 잘 알겠지만, 저는 여전히 신전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헤이녹스가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후작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미치겠군. 록시나가 발현을 하다니, 하필 신성력을…….”
후작은 신전과 가까운 만큼 그들의 치부 역시 알고 있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인 그들이 얼마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는지,
후작 또한 그런 탐욕스러운 이가 가득한 곳에 록시나를 보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신관을 소개해 주면 되는 건가? 그러면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어?”
후작의 다급한 질문에 헤이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신전에 속하지 않은, 사적으로 아는 사이였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대신관과는 안면도 없으면 좋겠고, 절대 록시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외부에 퍼트리지 않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이라면…….”
고민하듯 헤이녹스의 말을 곱씹던 후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 있긴 하네.”
후작은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대신관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녔으나 사이는 좋지 않아. 오히려 서로를 혐오하는 것에 가깝지. 실력은 8살에 이미 입증되었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도 아니야.”
하지만 곧 후작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네.”
“문제라면?”
헤이녹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후작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원체 자유로운 인물이라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네. 찾는다 한들 도와주리라는 확신도 없고.”
“그게 누구입니까?”
후작은 깊은 밤의 부엉이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아슬론 윈터쳇.”
“아슬론이라면…….”
“한때 차기 대신관으로 칭송받았던 자네.”
아슬론 윈터쳇.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 신전에 버려졌다. 신관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던 그는 8살이 되던 무렵 신성력이 발현되었고.
“아슬론 윈터쳇이라면 신성력을 다루는 데에는 분명 능숙하겠지. 그 역시 어린 나이에 발현하기도 했고. 하지만.”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슬론의 행방을 모르지 않나.”
차기 대신관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아슬론은 현 대신관과의 이유 모를 갈등으로 사이가 틀어진 이후 신전을 나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항간에는 그가 제국을 완전히 떠나 버렸거나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직도 신전에서 그를 찾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테리온즈 후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이 이번에 구텔 왕국으로 향하는 사절단에 참여한 것 역시 실은 아슬론 윈터쳇을 찾기 위함이란 얘기도 있네.”
“대신관으로선 이만한 명분이 없었겠군요.”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구텔 왕국에 대신관이 간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구텔 왕국에는 전쟁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 많았고, 대신관의 신성력으로는 그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슬론 윈터쳇의 위치는 알아낸 겁니까?”
헤이녹스의 질문에 테리온즈 후작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파악되지 않았네. 하지만 확실한 건, 구텔 왕국에 있는 건 아니라는 거야. 대신관이 제국으로 돌아오는 시기를 앞당긴 이유도 그 때문이지.”
후작의 말에 헤이녹스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신전에서 아슬론을 찾기 전에, 먼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테리온즈 후작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헤이녹스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록시나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군.”
후작이 언뜻 덤덤해 보이는 말투로 말하자. 헤이녹스는 손에 세게 힘을 주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 딸인데.”
헤이녹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이대로 있다간 록시나를 신전으로 보내야 할 겁니다. 그건, 그것만은 절대…….”
괴로운 듯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헤이녹스를 바라보던 테리온즈 후작은 이내 나지막이 말했다.
“전부 내 탓이네.”
후작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질끈 감았다.
“자네가 전장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바로 서부로 향해야 했어. 아이들을 향한 걱정에 어떤 변명도 있어서는 안 되었는데,”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딸의 빈자리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네. 그 두려움이 내 발목을 묶었어.”
큰 마차 사고 탓에 거동조차 할 수 없었던 후작이었지만, 아이들이 가장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여전히 가슴 깊이 사무쳐 있었다.
“록시나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아이더군. 마주친 건 잠깐일 뿐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도 그 아이가 다정하다는 건 알 수 있었어.”
후작은 어딘가 풀이 죽어 있던 록시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른이 되어 아이 하나 지켜 주지 못했어. 록시나와 마주친 순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
이내 후작은 고개를 들고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소문이 하나 있네. 아슬론 윈터쳇의 행방에 대한 소문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후작은 물기가 어른거리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눈으로 말했다.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직접 확인하면 되겠지.”
후작은 그전까지 한 번도 록시나를 본 적이 없었으나, 응접실에 앉아 있던 아이를 바라보게 된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 아이를 반드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후작은 록시나를 마주친 순간부터, 아니 록시나가 동부에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덤덤할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너무 가까워지면 부담스러워할까, 그렇다고 멀리하면 작은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은 록시나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록시나가 있는 응접실로 향하는 순간조차.
황제를 알현하는 순간조차 떨지 않았던 거구의 후작이, 고작 5살짜리 아이 한 명 때문에 이토록 고민했다.
그는 잠깐의 시간으로 록시나의 그동안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다가가는 것 역시 부담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록시나는 알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어깨 위 긴장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북부의 헴델에 돌고 있는 전염병에 대해선 알고 있나.”
“간략하게는.”
북부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헴델 마을은 동부와도 맞닿아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북부는 지금 봉쇄령을 내렸네.”
“식량난이 예상될 텐데도 말입니까?”
“북부의 가스펠트 공작이 헴델의 일은 드웬델 백작에게 일임했다는군. 전염병의 확산이 심상치 않으니 다른 상단의 계약에도 영향이 미칠까 아예 입과 문까지 걸어 잠그려는 모양이야.”
“아슬론 윈터쳇이 몸을 숨기기엔 최적화된 상황이군요.”
“이제 사전에 허락 없이는 쉬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그를 찾으려면 허가가 필요하겠지.”
“북부에서 승인을 내려 주겠습니까?”
헤이녹스의 질문에 테리온즈 후작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쉽지 않을 것 같네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 후작가의 식량을 풀어서라도 말이야.”
후작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찻잔을 쥐며 말했다.
“그대의 딸인 동시에 내 손녀가 아닌가.”
그는 록시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진지했다.
“아슬론 윈터쳇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꽤 들 것 같은데, 그동안은 어찌할 생각인가?”
후작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헤이녹스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협조를 구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동부가 대신관이 있는 신전과는 거리가 멀어 그나마 다행이군요.”
대신관과 같은 고위 사제들은 주로 수도에 위치한 중앙신전에 모여 있었다. 서부는 비교적 수도와 가까웠고 헤이녹스는 그 때문에 서둘러 동부로 내려왔다.
“기간이야 상관없다만, 이대로 저택 안에만 머무는 건 재미가 없지 않나.”
헤이녹스는 탄제리크 영지에서도 쉽게 외출하지 않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헤이녹스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후작이 알만 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애들이 벌써 철이 들어 버린 모양이군. 아이라면 응당 떼도 써야 하는 법인데.”
그러곤 잠시 고민하던 테리온즈 후작은 무엇이 생각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부 내에서는 자유롭게 다녀도 상관없을 걸세. 중앙에 머무는 대신관은 동부의 신성력까지 알아챌 정도로 기민한 사람은 아니니.”
헤이녹스가 동의하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이 말을 이어 갔다.
“동부는 바다가 아름답지. 록시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을 테니 분명 좋아할 걸세.”
그 말에 조개껍데기 팔찌를 받고 기뻐하던 록시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짐짓 진지해 보이기까지 하는 헤이녹스의 모습에 테리온즈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피곤할 테니 공작도 이만 쉬게. 구경은 내일 가는 게 좋겠어. 집사, 밖에 있나?”
후작의 목소리에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애들은 지금 뭐 하고 있지?”
“공녀님은 아직 마님과 함께 계시고, 공자님들께선 여정이 피곤하셨는지 금방 잠에 드셨습니다.”
집사의 막힘없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테리온즈 후작이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부인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가 보오. 둘은 밀린 이야기를 하도록 두는 게 좋겠네.”
후작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이 록시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