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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44)화 (44/106)

<44화>

그녀의 중얼거림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해도 될까……?’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프리실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테리온즈 부인이 내 입에서 딸과 관련된 말을 듣는 건 싫어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왠지 말해도 될 것 같아.’

그녀는 내 생각처럼 손녀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나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딸에 대해 이야기할 뿐.

그렇게 테리온즈 부인은 나에게 천천히 프리실라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급하게 다가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으며.

나는 그런 테리온즈 부인의 행동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를 배려해 주고 있어.’

테리온즈 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헤이녹스에게도, 체드만에게도, 렌자드에게도.

심지어는 늘 나의 곁에 있는 앤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왜인지는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테리온즈 부인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그게 그녀의 담백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미 나는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런 말…… 한 번도 들어 본 적 업써여.”

나는 수없이 고민하며 속에 묻어만 두었던 말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전 한 번도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드러 본 적이 업써여.”

“어째서?”

“저는 아빠랑 닮았쓰니까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겐 프리실라의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다들 저를 보고 실망한 거 가타써여. 모두가 엄마를 사랑했는데, 저에게서는 그런 엄마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업쓰니까여.”

“프리실라와 네가 왜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저랑은 다르게 엄마는 연두색 눈에 금발이니까.”

“그래. 프리실라는 반짝거리는 녹색 눈이 참 예쁜 아이였지. 그런데 말이다.”

테리온즈 부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록시나 너도 그렇구나.”

테리온즈 부인은 그녀를 올려다보는 나를 담아내듯 눈을 마주쳤다.

“네 눈이 그 아이처럼 빛나. 정이 많고 총명했던 그 아이처럼.”

내가 테리온즈 부인의 말을 듣는 동안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애써 프리실라를 닮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너는 그 아이의 딸이니까.”

“…….”

“그러니 애쓸 필요 없단다. 프리실라의 딸이 되기 위해서 말이야.”

그녀는 마치 나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들의 날카로움이 너를 갉아먹고 있었음을 아노라고.

“그간 공작가를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테리온즈 부인은 어느새 엉켜 버린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해도, 너에게는 전부 변명으로 들릴 거란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부디,”

후작 부인은 나를 향한 따뜻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니?”

“기회…… 여?”

“그래. 내가 너에게 사과할 기회, 너를 사랑할 기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씁쓸함 역시 묻어 있었다.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싶구나. 네가 모르는 프리실라와 너에 대해서 말이야.”

“…….”

“허락해 주겠니?”

부탁하는 테리온즈 부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왜인지 막혀 오는 목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 * *

록시나와 후작 부인이 저택 구경을 위해 응접실을 나간 후, 체드만과 렌자드 역시 휴식을 위해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

“공작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후작은 닫힌 응접실 문을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승전을 축하하네. 북부 전선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

“주어진 임무였을 뿐입니다.”

마치 제국을 승리로 이끈 것에 자신의 공은 없다는 듯한 헤이녹스의 태도에 후작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하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테리온즈 후작은 곧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자한 인상이었던 후작은 얼굴을 굳히자 본래의 냉철하고 단호한 모습이 드러났다.

“공작이 별것도 아닌 일로 동부까진 오지 않았을 텐데. 그것도 록시나까지 데리고 말이야.”

“……후작께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 말이오?”

헤이녹스의 예상치 못한 말에 후작은 다소 당황한 듯 보였다.

“탄제리크의 부탁이라니, 부디 테리온즈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군.”

후작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들을 준비를 마치자, 헤이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혼자 온 게 아닌 만큼 후작께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역시 내 손주들과 관련된 모양이로군.”

서부에서 거리가 꽤 되는 동부까지 체드만과 렌자드, 심지어는 록시나까지 데리고 왔기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탄제리크와 관련된 일일 거라고 후작은 대충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테리온즈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녹스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록시나 때문입니다.”

“록시나라…….”

잠시간 애매한 반응을 보인 후작이 차마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테리온즈 후작 부인과 함께 사라진 록시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아이에게는 용서를 빌고 싶네. 진작 찾아가지 못했던 소홀함에 사죄하고 싶어.”

테리온즈 후작은 마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간헐적으로 떨리는 다리를 꾹 눌렀다.

후작은 프리실라가 죽은 날로부터 지독한 후회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왜 더 자주 찾아가지 못했을까. 왜 더 자주 연락하지 못했을까.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동부가 그립지는 않은지, 서부에 사람들은 잘해 주는지, 이 부모가 보고 싶지는 않은지.

아주 작은 소식일지라도, 별 게 아닌 일일지라도, 오늘 아침 식사는 빵을 먹었다는 것 같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런 걸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보면서, 뻔하지만 소중한 소식을 들으면서, 프리실라가 서부로 간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신할 때쯤, 그때는 말하고 싶었다.

네가 많이 보고 싶노라고, 더 곁에 두고 사랑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도 일찍 떠나가 서운했노라고. 매일 보고 싶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그 얘길 하지 못했는지.

네가 동부에 있었던 것만큼 서부에서도 행복하게 지낸다는 게 안심이 되면서도 서운하였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단단히 먹은 마음이 무너질까 봐.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당장 동부로 오라 말하게 될까 봐.

후작의 시간은 여전히 그때로 멈춰 있었다.

과거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현재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후작은 록시나를 마주한 지금에야 깨달았다.

테리온즈 후작의 죄책감으로 점철된 얼굴을 보던 헤이녹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는 후작의 앞에서, 헤이녹스는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프리실라를 잃었다는 사실은 헤이녹스의 일상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는 프리실라를 만나고, 온몸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의 마음속에 그녀 외에는 그 무엇도 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인이었고, 아내였고, 엄마였고, 그의 전부였던 프리실라를 떠나보냈다는 걸 헤이녹스는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소홀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를 지탱해 주고 있던 수많은 이들로부터 도망쳤다.

그렇기 때문에 록시나에게 더욱 미안했다.

‘조금이라도 들여다보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썼더라면 그렇게 갑작스럽게 발현하는 일은…….’

헤이녹스는 검기를 다루는 소드마스터이기에 비록 결이 다른 힘일지라도 기운 정도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록시나의 발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어도 미리 대비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준비할 시간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함께 있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을.’

그러지 못해서 아이를 아프게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한 결과가 이거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했다. 그 어린아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테리온즈 후작은 짐짓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린 헤이녹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참 많이 변했구만.”

헤이녹스가 무슨 의미냐는 듯 시선을 들어 바라보자, 후작이 말을 이어갔다.

“프리실라가 떠나고는 송장과도 다름없었다 들었는데 말이야, 이제야 좀 사람 같아.”

헤이녹스는 원래부터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프리실라가 떠난 지난 몇 년간 그는 신경의 날카로움이 극에 달아 정말이지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았다고.

그가 뿜어내는 버려진 기운에 누구도 쉬이 말을 붙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동부에 머물던 후작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였다.

무언가를 입에 대지도, 숙면을 취하지도 않았으며, 두려울 정도로 그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지내다 결국 전장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는 소식에 후작은 가장 먼저 저택에 남겨진 아이들을 걱정했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네. 프리실라 그 아이가 떠났다는 것이 믿을 수 없도록 괴로웠겠지.”

테리온즈 후작은 잠시 눈을 감으며 말갛게 웃던 딸, 프리실라의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나와 부인 역시 무척이나 아꼈고, 그렇기에 그리 허무하게 떠나보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괴로웠네.”

그날을 떠올리는 후작의 얼굴에 괴로움이 묻어났다.

“그리 서두르지만 않았더라면, 그 사고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프리실라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후작과 후작 부인은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프리실라를 만나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안아 주며 고생했다고, 정말 대견하다고 말해 주고 싶어 서둘렀는데.

사고가 났다. 절벽에서 떨어진 거대한 바위에 깔려 마차가 전복되는 커다란 사고였다.

만약 바퀴가 빠졌다거나 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 정도였다면 후작은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고 곧바로 서부를 향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일이었다.

마차의 문에 다리가 깔린 테리온즈 후작은 당장이라도 치료하지 않으면 다리 한쪽을 잃을 것이 뻔했고, 후작 부인은 다량의 피를 흘리고 정신을 잃은 채 몇 날 며칠을 깨어나지 못했다.

그 예기치 못한 사고가 후작과 후작 부인의 가슴속 평생 대못으로 남았다.

하지만 딸의 죽음에 그대로 모든 걸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프리실라의 죽음에 신전이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평생을 아르타나 여신의 종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네. 신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내가 바친 일생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여신을 향한 테리온즈 가문의 신앙심은 진실되었고, 그 덕에 신전은 후작가의 일이라면 우호적으로 나서 도와주곤 했다.

일평생을 여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후작이었기에, 딸의 죽음과 신전이 관련 있다는 것을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게 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네. 그게 설령 이 제국을 세우고 우리 곁에 숨결로 남은 아르타나 여신일지라도 말일세.”

후작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신전이 왜 신관을 탄제리크 저택에 보내지 않았을까.

상대가 무려 테리온즈 후작가의 외동딸이며 동시에 탄제리크 공작가의 안주인이었는데.

공작가와 후작가의 숱한 부탁에도 신전은 묵묵부답이었고, 후작의 항의에 돌아오는 답신은 ‘유감입니다.’였다.

“공작은 적을 견제하려면 가장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말했지.”

그날 이후로도 테리온즈 후작은 신전을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들이 프리실라를 외면한 진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공작, 그대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알고 있네. 당장이라도 뒤엎어 버리고 싶지만 그러질 못해 속만 타들어 갔겠지.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

후작은 짐짓 잔잔해 보이는 눈으로 녹색 눈으로 헤이녹스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공작, 이것 하나만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그는 이미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진 게 많은 자는 각박해지는 법이야. 내가 가진 걸 지키기에 급급해서 정작 중요한 걸 잊어버리지.”

그리고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고야 마는 게,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지 않나.

“공작은 부디 잃기 전에 깨닫기를 바라네.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 마음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지.”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진실된 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걸 너무도 늦게.

“말이 너무 길어졌군. 미안하오, 공작. 그저 노인네의 중얼거림일 뿐이니 너무 귀담아듣지는 않아도 되네.”

분위기를 환기하듯 허허, 웃으며 말하는 후작의 눈동자에 녹음이 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헤이녹스의 눈에는 보였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잘게 떨리는 다리,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 흐르는 식은땀, 미세하게 흔들리는 입꼬리,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주름진 두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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