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프리실라를 닮았다고?’
빈말이라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럴 리가.’
나는 후작 부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부인은 살짝 웃어 보였다.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군요.”
그러더니 시선을 들어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쳤다.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당연히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답이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헤이녹스를 바라보는데,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동의합니다.”
“……?”
내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모르는 건지, 헤이녹스는 말을 이어 갔다.
“록시나는 프리실라의 딸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자 후작 부인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록시나는 프리실라의 딸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녀는 헤이녹스의 바지를 살짝 잡은 채 올려다보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모양입니다.”
그러곤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이런, 제가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군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부인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며 뒤를 돌았다.
테리온즈 부인이 간헐적인 기침을 하며 안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탄제리크 저택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공작가의 응접실이 고풍스럽고 무거운 분위기였다면, 후작가의 응접실은 조금 더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가?’
탄제리크를 방문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사적인 친분이 있거나, 탄제리크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전자의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방문객을 맞이하는 응접실은 후자에 맞춰 꾸며져 있었다.
탄제리크 가문의 도움을 바라기 전, 그 위세와 무게를 상기하고 시답잖은 말은 꺼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엄숙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마음이 편해져.’
내가 한결 긴장이 풀린 몸으로 소파에 파묻혀 있자, 렌자드가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록시나, 여기 마음에 드는구나?”
“움……. 글쎄.”
분명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곳에는 나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그닥 조은 건 아냐.”
나를 반기지 않는 사람에게 줄 애정은 없었다.
“그래?”
나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체드만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곧 좋아하게 될걸.”
“제가 좀 늦었군요.”
체드만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칼칼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하얀색 문이 열렸다.
지팡이를 짚은 채 나타난 그 중년의 남성은 드문드문 하얗게 센 금발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그가 응접실에 등장하자마자, 렌자드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보고 싶었어요!”
“렌자드! 이게 얼마 만이냐!”
“할아버님.”
“체드만! 키가 정말 많이 자랐구나.”
“그렇습니까?”
아닌 척하지만 체드만 역시 후작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저렇게 뺨에 옅은 붉은 빛이 도는 걸 보면.
응접실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의 재회로 화기애애했다.
헤이녹스와 나만 빼고.
“후작.”
헤이녹스가 삐딱하게 앉은 채로 그를 부르자, 후작은 체드만과 렌자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오. 보다시피 내 거동이 좀 불편하다 보니 준비에 시간이 좀 걸려서.”
그의 말대로 테리온즈 후작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게다가 걷는 데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응접실 근처에 대기해 있던 사용인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왜일까?’
저렇게 힘겨워하는 모습인데도 아무도 나서 그를 부축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때, 후작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네가 록시나구나,”
“아, 녜에…….”
언뜻 호탕하기까지 했던 후작의 표정은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 록시나. 네가 록시나구나, 네가 록시나야…….”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던 후작은 이내 내게 말을 건넸다.
“저택 구경을 좀 하겠느냐?”
“저택…… 이요?”
내가 예상치 못한 말에 떨떠름하게 되묻자, 옆에 서 있던 후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록시나는 테리온즈가 처음이니 저택을 잘 모를 테지요.”
“그렇기는 한데…….”
“그래, 록시나. 이참에 저택 구경을 시켜 주마.”
테리온즈 후작이 당장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지팡이를 짚자 후작 부인이 그를 진정시키듯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거동이 불편하잖아요. 록시나에게 저택 구경은 제가 시켜 줄게요.”
“하지만…….”
후작이 아쉬운 듯 지팡이 손잡이만 만지작거리자, 후작 부인이 작게 미소 지으며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공작께서도 의논할 일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부인의 말에 헤이녹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과는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저택 구경은 부인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헤이녹스까지 나서자 후작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공작이 그렇다면, 알겠네. 대신 체드만과 렌자드는 나와 함께 있자꾸나.”
그리고 그는 못내 아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아쉬운 눈?’
내가 잠시 헛것을 본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후작이 나에게 저택 구경을 시켜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쉬워할 리가 없으니까.
‘나도 참, 렌자드랑 체드만이 후작 부부랑 가까워 보이니 새삼 부럽기라도 했나.’
몇 년 동안이나 후작 부부와 체드만, 렌자드는 만나지 못했지만 교류가 있었음은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어색함 없이 가까울 리가 없으니까.
‘나만 빼고 말이야.’
지난 시간 동안 후작 부부와 만나기는커녕 편지 한 통 주고받은 적이 없으니 서로 불편한 게 당연한 일이건만.
‘갑자기 저택 구경은 왜 시켜 주겠다는 거지?’
둘이 있어 봐야 적막만 가득할 게 뻔해 거절할까 생각도 했지만, 어딘지 밝은 후작 부인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테리온즈 부인과 단둘이 함께하는 구경에는 침묵만이 가득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내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꽤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록시나는 동부에 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겠구나.”
“녜.”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고?”
“마차에서 계속 자서 갠찮았어여.”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내게 다시 물었다.
“동부의 바다는 어떤 것 같니?”
“아름다운 거 가타여.”
“모래사장도 정말 부드럽지?”
“음……. 아직 밟아 본 적이 업써서 잘 모르게써여.”
“아, 바다에 가 보지 못했구나.”
테리온즈 부인은 말을 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후작 부인은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가리켰다.
“저곳이 프리실라의 방이란다.”
“엄마의…… 방이여?”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문을 바라보았다.
‘프리실라도 끝 방을 썼나 보네.’
보통 귀족은 난방이 잘 되지 않는 끝 방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서쪽 끝 방 역시 한기가 잘 드는 편이라, 앤이 꼼꼼하게 창틀을 막아 두었다.
‘나는 그 방이 집무실과 가장 먼 곳이라 쓰는데, 프리실라는 왜 끝 방을 썼던 걸까?’
내가 의문을 가지는 사이, 후작 부인이 방의 문을 열었다.
“어……?”
방의 주인이 없어 많이 낡았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방은 금방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작은 책상과 의자, 책장에 놓인 여러 권의 책들과 깔끔한 침구, 먼지 하나 끼지 않은 전등은 지속적인 관리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듯했다.
의아해하는 내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후작 부인은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프리실라는 더 이상 이 방을 사용하지 않지만, 언제나 함께하던 때와 같기를 바라 관리해 왔단다.”
“그러쿠나…….”
후작 부인이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프리실라가 왜 이 방을 썼는지 궁금하지 않니?”
내가 궁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 부인은 방 안에 놓은 소파에 걸터앉았다.
“프리실라는 바다를 좋아했다. 물론 동부의 아이 중 바다를 싫어하는 이는 없을 테지만.”
그녀의 눈은 과거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마치 헤이녹스가 프리실라를 떠올리던 그때처럼.
“잠시 이리로 와 보겠니.”
테리온즈 부인의 손짓에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창문을 더 활짝 열었다.
“와…….”
나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테리온즈 후작가 뒤편에는 정원 대신 바다가 있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때문에 바다와 가장 가까운 맨 끝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마치 저택이 물 위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건 마차에 난 작은 창문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애가 이 저택에서 가장 사랑하던 것이었단다.”
‘이런 곳이라면 나라도 매일 보고 싶을 거 같아.’
한 번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다.
내가 노을과 만나 반짝거리는 바다의 잔물결을 보고 있는 동안, 후작 부인은 말을 이어 갔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엄마라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야. 배려가 고마운 줄 알고,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아이였지.”
‘……먼저 프리실라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내 앞에서 자신의 딸에 관한 이야기는 꺼릴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게 그러질 못하니까.
하지만 후작 부인은 꽤나 덤덤하게 프리실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왜 그 애가 탄제리크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였는지 아니?”
나는 그녀의 질문에 동부로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체드만은 헤이녹스의 얼굴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테리온즈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 때문이란다.”
“……네?”
“얼굴 때문이라고.”
“거짓말…….”
‘뭔가 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정말로 그냥 얼굴 때문일 리가 없어.’
좀 더 말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후작 부인은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정말이란다. 프리실라는 연회에서 마주친 공작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지.”
“어…….”
내가 가만히 눈만 끔벅이고 있자 테리온즈 부인이 조금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언가 더 대단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니?”
“어, 엄청난 건 아니더라두 완전 얼굴 때문일 줄은…….”
내 어벙벙한 표정에 테리온즈 부인은 이제껏 짓던 옅은 미소와는 달리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정말, 반응이 그 아이와 똑같구나!”
그녀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내가 남편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했을 때, 프리실라도 그런 얼굴이었단다.”
“엄마가요……?”
“프리실라는 남편이 내게 끈질기게 구애한 줄 알고 있었거든.”
“그럼 그게 아니라는……?”
“완전히 반대야. 구애는 내가 먼저 했단다.”
“홉!”
충격의 연타에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나 고상하고 우아한 후작 부인이 먼저 구애를 하셨다고……?’
내 속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테리온즈 부인은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야.”
“당연하져…….”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리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테리온즈 부인이 나직이 말했다.
“너는 정말 그 애와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