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나는,
‘빚을 지게 생겼네…….’
헤이녹스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따라 그 무감한 얼굴에 다른 감정이 떠오른 듯했다.
‘괜한 말을 해서…….’
누구든 성격이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무리 남한테 관심이 없는 헤이녹스라 해도……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언짢겠지.’
내가 사과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헤이녹스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적당히 평범하게 생긴 것 같다만.”
‘……뭐래?’
적당히 평범히 생겼다고? 헤이녹스가? ‘그’ 헤이녹스 탄제리크가?
“아빠, 저 귀가 이상한 거 가타여. 아빠가 평범하게 생겼다는 헛소리가…….”
“제대로 들었군.”
내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잠시 고장 난 청각을 고치려고 하는 순간, 헤이녹스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흔한 얼굴이잖나.”
“하.”
순간 떠오르는 어이없음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평범? 저 얼굴이 평범?’
그 황당함은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던 체드만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버지. 장난치시는 겁니까?”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이미 큰 소리로 웃고 있던 렌자드 역시 슬며시 입꼬리를 내리며 체드만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나와 체드만, 렌자드가 모두 비슷한 눈빛으로 헤이녹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진심이다만. 장난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를 모르겠군.”
말뿐이 아니라 정말 헤이녹스는 그의 말에 오류가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빛나는 햇빛을 후광처럼 등지고 있는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이건 기만이야…….’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헤이녹스를 바라보는 동안, 체드만이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왜 수없는 청혼서 중 탄제리크를 택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가볍게 턱을 괸 채 말했다.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겠지.”
‘아…….’
나는 절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보낸 청혼서 역시 답장이 돌아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 아버지께선 어머니가 상대도 모른 채 그저 탄제리크이기에 청혼을 수락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것만은 아니겠지.”
‘그래! 그것 때문만이 아니겠지!’
드디어 그가 수락의 이유를 깨달은 것 같아 들뜨려는 순간, 헤이녹스가 말했다.
“안쓰러워서일 거다.”
“안쓰러움…… 이여?”
“프리실라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청혼서를 거절당한다는 건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 그러니 받아 준 거다.”
‘뭐라는 거야…….’
나는 확신에 찬 헤이녹스의 표정에 할 말을 잃었다.
‘진짜 안쓰러웠으면 그 많은 청혼서를 다 받아 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왜 하필 그중에서 헤이녹스를 택했을까.
‘본인만 몰라, 본인만…….’
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그만 이마를 짚었다.
“록시나…….”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포기해 버린 듯한 렌자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껏 아버지는 늘 옳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헤이녹스에 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말해 봤자 뭐 하겠어.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거.’
내가 몸에 힘을 탁, 풀고 의자에 기대려는데, 헤이녹스의 옆에 앉아 있던 체드만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록시나.”
“왜…….”
체드만은 힘이 다 빠진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참고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혼인을 결심했다고 하셨어.”
‘하하…….’
이럴 줄 알았다고…….
* * *
“록시나, 일어나 봐.”
나는 나를 흔들며 깨우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에…….”
“저기 봐!”
“먼데…….”
내가 실눈을 뜨려는데, 문득 훅 하며 콧속으로 낯선 냄새가 들어왔다.
‘……바다?’
물비린내, 그리고 끈적한 바람, 간간이 섞여 날아오는 모래알까지.
‘진짜 바다다…….’
나는 재빨리 마차 창문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와…….”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른 바다와 반짝이는 파도.
‘진짜 동부구나.’
넋이 나간 듯 빠르게 변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체드만이 물었다.
“록시나는 동부가 처음이지?”
내가 여전히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자, 체드만이 말을 이었다.
“동부의 바다는 아름답기로 유명해. 귀족들이 휴양지로 많이 오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쿠나.”
렌자드 역시 지난 몇 년간 방문하지 못했던 동부가 반가운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귀족이 휴양지로 많이 찾는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면 나도 오고 싶을 거야.’
맑고 높은 하늘과 밝은 표정의 사람들.
‘이토록 자유로운 도시를 누구도 떠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렇기에 나는 프리실라를 더 알고 싶었다.
이런 바다와 자유로움 속에서 자란 그녀가 고리타분한 예법에 따르는 것은 다른 귀족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을 거다.
나는 이 모든 걸 두고 서부에 온 프리실라와 그런 그녀를 사랑한 후작 부부가 더 궁금해졌다.
* * *
“테리온즈가다.”
창밖을 보던 렌자드가 한 말에 나는 몸이 급격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도착했구나.’
바다를 봤을 때만 해도 떨리지 않았는데, 프리실라의 부모를 만난다는 생각 탓인지 몸의 긴장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도 아닌데 왜 이러지.’
그저 외가에 방문했을 뿐이다. 테리온즈 후작 부부 역시 내겐 할머니 할아버지일 뿐이고.
‘그럼에도 떨리는 건 프리실라 때문이겠지.’
나를 아낀, 나를 사랑한, 끝내 나를 위해 희생한,
나의 엄마.
테리온즈 후작 부부가 아무리 손주를 아낀다 한들 딸만큼은 아닐 거다.
‘렌자드가 하는 말을 듣자 하니 프리실라가 죽은 이후로 후작 부부는 한 번도 서부를 찾아온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헤이녹스조차 전장으로 떠나 비어 있는 공작가를 도와주지 않은 거겠지.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이런 기분 진짜 싫다.’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처음 이곳에 와서 느꼈던, 애써 부정하던 나를 붙잡고 괴롭게 했던 감정.
탄제리크 저택의 사람들과 지내며 나아진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금 두 어깨를 짓눌렀다.
‘다시는 느끼기 싫었는데.’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 상황이 못내 껄끄러웠다.
자꾸만 나를 악역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은 이 상황이, 이 감정이.
모든 것이 나를 악역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누군가 주어진 역할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줄 알아?’
나의 패악질을 원하는 거라면 유감이지만,
‘그럴 생각 없어.’
어느새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나는 동부의 땅을 밟기 전, 잠시 심호흡했다.
“후우…….”
그리고 내가 내리려는 순간,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록시나.”
“아빠…….”
헤이녹스는 언제처럼 동요 없는 눈동자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그의 말투는 늘 그랬듯 다정하지 못했지만 그 고요함이 내게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응!”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헤이녹스의 손을 잡고 내리자 일렬로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탄제리크 가주를 뵙습니다.”
그리고 사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할머니.”
옆에 서 있던 렌자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느릿하지만 확실한 발걸음,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다홍빛 드레스, 그리고 생기 있는 연두색 눈.
“오랜만입니다, 탄제리크 공작.”
나의 외할머니였다.
그녀의 입가에 지나간 세월을 기록한 듯 옅은 주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고귀한 그녀의 신분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헤이녹스의 곁에 선 체드만과 렌자드를 차례로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너희들도 오랜만이구나, 얘들아.”
“정말 오랜만입니다, 할머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렌자드가 팔을 뻗은 채 다가가 안기자 테리온즈 부인은 렌자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도 너무 보고 싶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렌자드를 바라보던 그녀가 순간 미간을 찌푸리자, 곁에 있던 시녀가 재빨리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래, 고맙다.”
테리온즈 부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곤 입가에 대며 짧게 기침하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후작 부인은 이내 손수건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서는 괴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이 더 안 좋아지신 겁니까.”
헤이녹스의 물음에 테리온즈 부인은 옅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후유증과 같은 것이라……. 가문 사람들의 배려 덕에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과 같은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한 후작 부인은 이내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뜻이겠지.
대답을 바라는 듯한 물음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여, 록시나 탄제리크라고 함니다.”
“그렇군요. 록시나…….”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부인은 이내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정말, 공작을 많이 닮았군요.”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 나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는 이야기였으니까.
프리실라에게서 태어난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벽히 헤이녹스를 빼닮은 모습.
원작에서 혹자는, 록시나를 낳은 것이 프리실라가 아닌 헤이녹스 아니냐며 떠들기도 했다.
비록 프리실라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금방 옥에 갇혀 버렸지만.
‘그만큼 나와 헤이녹스는 닮아 있으니까.’
그건 나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다만 그걸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늘 문제였다.
진심으로 내가 헤이녹스와 닮았다는 것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어미를 죽이고 나온 딸’이 단 한 구석도 어미와 닮지 않았음을 비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만나자마자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낼 거라고 예상했던 후작 부인은 의외로 말이 없었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당신은 어떤 쪽인가요.’
그녀에게서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는데 침묵 끝에 테리온즈 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목구비와 눈동자, 머리카락까지 전부 어린 시절의 공작 그대로입니다. 어쩜 새초롬한 눈빛까지 닮았군요.”
감탄하듯 말하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프리실라도 닮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