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동부에 가려 한다.”
식사를 하던 헤이녹스가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내뱉은 말에 렌자드가 입을 쩍하고 벌렸다.
“동부라니…….”
렌자드의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처 없이 흔들리자, 체드만이 애써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갑자기 동부에는 왜 가시려는 겁니까?”
헤이녹스는 긴장되는 눈으로 바라보는 렌자드와 체드만 사이에서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볼일이 있다.”
“혹시 광산 때문에…….”
조심스레 묻는 체드만에 헤이녹스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 두었다.
“테리온즈 후작가에 갈 예정이다.”
‘테리온즈?’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바다가 있는 동부에서 유명한 후작가라면…….
‘프리실라의 본가.’
프리실라는 동부 사람이었다. 늘 바다를 보고, 바다와 어울리며 살았다고.
탄제리크가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서부로 온 그녀가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헤이녹스가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는 원작에서 언급된 적이 있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테리온즈 후작가에 간다고?’
테리온즈 후작이 그를 좋게 생각할 리 없다. 그로서는 제 딸이 탄제리크 가문에 가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게다가 프리실라의 죽음 이후로 왕래가 끊기다시피 한 걸 보면 아직 탄제리크가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분명 좋은 말은 듣지 못할 텐데 왜 가려는 걸까.’
내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헤이녹스가 말을 이어 갔다.
“……테리온즈 후작가가 신전과 가깝다더군.”
헤이녹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록시나에게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아버지!”
체드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신전의 힘을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하면 록시나의 신성력을 들킬 수도 있습니다.”
체드만이 우려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테리온즈 후작가는 신전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는 가문 중 하나였고, 그만큼 신전과 가까웠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몇몇 신관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신전을 잘 믿지 않는 탄제리크나 다른 가문들보다는 신성력에 대해 아는 바가 훨씬 많겠지만 그만큼 신전에 이야기가 퍼지기도 좋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가뜩이나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테리온즈가인데, 내 정체를 신전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없어. 후작가에서도 나를 좋게 볼 리가 없고.’
프리실라가 죽고 나서 후작과 후작 부인은 한 번도 탄제리크 저택을 찾아온 적이 없댔으니까.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그들이 과연 내게 신성력이 발현되었다는 것을 함구할까? 그것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신전에게?
‘절대 그럴 리 없지.’
이곳에서 신성력은 축복이라고 여겨지니까. 어떻게 해서든 신전 나의 발현을 알리려 할 거다.
한 마디로 헤이녹스의 말은 도박이었다. 테리온즈가를 믿고 신성력에 대한 자문을 얻을 건지, 다른 방법을 더 찾아볼 것인지.
‘체드만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는 돼.’
그리고 그 사실을 헤이녹스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려는 이유가 대체…….’
“곧 대신관이 돌아올 거다.”
헤이녹스는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 두며 말했다.
“그럼 록시나의 신성력을 알아채는 것도 금방이겠지. 그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렌자드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잖아요…….”
헤이녹스는 고개를 숙인 렌자드를 바라보았다.
“테리온즈는 어떻게든 도울 거다.”
얼핏 단호함마저 엿보이는 그의 말에 체드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테리온즈에서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신전이 알아챌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헤이녹스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체드만과 렌자드, 그리고 나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테리온즈는 너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들이다.”
얼핏 스친 헤이녹스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는 듯했다.
“그게 죄책감 때문이라도 말이다.”
* * *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이네.’
그가 식당에서 동부에 가자고 한 게 고작 반나절 전이었는데, 잠깐 정원을 산책하다 방으로 돌아오니 이미 여행 갈 채비가 끝나 있었다.
‘빠, 빨라…….’
나는 앤의 재빠른 솜씨로 환복과 머리 손질을 마치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동부에 간다니……. 난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단 말이야!’
헤이녹스는 테리온즈 사람들이 나를 도울 거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후작가에서 나를 신전에 넘겨 버리면 어떻게 해……!’
그들의 딸인 프리실라가 낳다가 숨을 거둔 아이니까.
‘날 원망할지도 몰라.’
프리실라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불안한 것을 모두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원래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수도 있는 법이니까.’
프리실라가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 그녀의 부모가 준 사랑 덕분일 것이다.
‘많이 아꼈을 텐데…….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 버렸으니까.’
프리실라의 부모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탄제리크 사람들이 나를 꺼렸던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어쩐지 속이 쓰리네.’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태어나 버렸는걸.’
나는 두 작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든 말든 상관 안 해!’
가 보자고!
내가 입술을 앙다문 채로 서 있는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록시나 지금 나오…… 뭐 해?”
문을 열고 나를 부르던 렌자드는 내 어정쩡한 자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거든!!”
* * *
렌자드와 내가 중앙홀로 내려오자 밖에서는 이미 헤이녹스와 체드만이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음…… 아빠도 지금 가시게여?”
내가 우물쭈물하며 묻자 헤이녹스가 한쪽 눈썹을 까닥거렸다.
“같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나?”
“아녀! 그냥 바쁘시니깐 나중에 오시려나 했거든여…….”
그러자 헤이녹스는 나를 번쩍 안아 마차 위에 태웠다.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마차 안에는 가는 길에 보기 위한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애잔하다. 정말 할 일이 많긴 많나 봐.’
내가 좀 쉬라고 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마차 구석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헤이녹스를 째려보자, 그는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건 모두 급한 사안이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어.”
“쉬는 게 미적거리는 거에여?”
내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자 헤이녹스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록시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
“록시나 말이 맞아요.”
헤이녹스 다음으로 마차에 탄 렌자드가 잽싸게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엄청 급한 건 벌써 다 끝내셨잖아요. 어제도 밤새우셨죠?”
당당하게 말하는 렌자드에 헤이녹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그 시간까지 깨어 있던 건가?”
헤이녹스가 금방이라도 꾸짖을 것처럼 묻자 렌자드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그러니까…….”
렌자드가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눈만 도르르 굴리는 동안 체드만이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렌자드의 말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급한 사안을 하루 넘게 두는 일이 없으시잖습니까.”
체드만은 들고 온 담요를 내 무릎 위에 덮어 주며 살짝 미소 지었다.
“오늘 바람이 차대. 덮고 있어.”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어 보인 체드만은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헤이녹스의 옆에 앉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동할 때만큼은 쉬세요. 그렇게 무리하시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말을 마친 체드만이 빙긋 웃으며 바라보자 눈을 마주치던 헤이녹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그저…….”
헤이녹스는 들어 올린 오른손으로 체드만의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의외다 싶어 말이야.”
“뭐, 뭐가 말입니까?”
체드만이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헝클어진 머리를 황급히 정돈하자, 헤이녹스가 피식 웃었다.
“걱정한 건가.”
그러자 체드만이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거, 걱정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사실을 말한…… 어쨌건 아닙니다!”
체드만은 평소의 어른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눈에 띄게 당황해 있었다.
‘저러니까 진짜 어린애 같네.’
늘 어른스럽게만 느껴지던 체드만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새삼 어리구나 싶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흐뭇해 웃으며 바라보는데 헤이녹스가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말했다.
“네 말대로 하지. 무리하지 않겠어.”
“정말여??”
내가 헤이녹스의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그가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급했던 것 같군.”
“그러면 앞으로는 일을 줄이신다는 거져?”
내가 눈을 반짝이며 헤이녹스를 바라보자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밤을 새우는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하지.”
그러더니 여전히 마차 한쪽에 고이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향해 턱을 까닥였다.
“저것들만 끝내고 말이다.”
‘밤새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만 해도 어디야.’
제국 여기저기에 영지가 있는 헤이녹스니 해야 할 일도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밤을 새우지 않겠다고 말했고, 그는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당장이라도 저 서류를 밖에 흩뿌려 버리고 싶지만…… 이쯤에서 타협해야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케 하시는 게 조켔어여. 아빠가 저걸 처리하지 않는다면 케인이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니까여.”
당장 헤이녹스가 일을 내팽개친다면 그 업무는 고스란히 그의 보좌관인 케인이 떠안게 될 게 분명했다.
‘그건 너무 불행하잖아…….’
안 그래도 날이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 같은데 거기다 일이 더 추가된다면 정말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케인이 얼마나 능력자인데.’
“케인은 중요한 사람이에여. 야근 수당도 꼭 챙겨 주셔야 한다구여! 빈손으로 부려만 먹으면 쪼잔한 악덕 주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몰라여!”
탄제리크의 압도적인 위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가문이 많은 지금, 작은 약점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아빠는 조금…… 성격이 나쁘게 생겨쓰니까 더 안 좋게 볼지도 모르구여.”
브라운가는 대대로 탄제리크에 충성하는 봉신 가문이었다.
원작에서 탄제리크가 다 망해 갈 때도 끝까지 곁을 지켰던 거의 유일한 가문인 데다가, 케인은 아카데미에서도 늘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런 사람을 과로로 잃는다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무언가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주전자 끓는 소리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체드만이 보였다.
“머야. 무슨 일 이써?”
영문 모를 일에 내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 옆에 앉아 있던 렌자드가 소리치듯 말했다.
“나 도저히 못 참겠어!”
그러더니 입을 활짝 연 채로 고개가 넘어가도록 웃기 시작했다.
“진짜, 크큭,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슨 생각이라니……?”
‘인재 붙잡아 둘 방법 궁리하는 중인데?’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만 보자 체드만이 웃음기 다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확실한 분이야. 케인에게 꼬박꼬박, 크흠, 수당을 얹어 주고 계시니까 그런 걱정은…….”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온 듯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던 체드만은 결국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뭐야, 왜 저래.’
“록시나.”
내가 이상한 걸 보듯 체드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평소보다 더 낮은 헤이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순간 마주친 헤이녹스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성격이 나쁘게 생겼나?”
“앗!!”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진심에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생각만 한다는 게 전부 말해 버렸다…….’
하여간 요 입이 방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