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저택에서 치료받으실 겁니까.”
헤이녹스가 짧은 정적을 깨고 묻자, 멍하게 서 있던 로이스터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박인 후 깨를 내저었다.
“아마 바로 가야 할 것 같아.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그대로 돌아가면 후궁께서 알아보실 겁니다.”
헤이녹스의 말마따나 지금 로이스터의 옷은 흙과 모래가 잔뜩 붙어 있었으며, 머리는 다소 엉켜 있었다.
게다가 아까 패거리에게 손찌검을 당했는지 입가에는 터진 흔적과 뺨이 붉게 부어 있기도 했다.
‘저대로 돌아가면 로이스터가 황궁을 몰래 탈출했다는 것까지 알아챌 거 같은데.’
로이스터는 지저분해진 옷을 대충 털며 말했다.
“곧 있으면 어머니와 황후 폐하의 식사가 끝날 거야. 그 전엔 돌아가야지.”
“다친 데는 어떠케 하려구…….”
“손바닥 조금 까진 게 다야. 괜찮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는 로이스터는 아까의 발길질로 배가 아픈 듯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자나…….”
혼잣말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퍼렐, 전하를 아펠라 궁 뒷문까지 모셔라.”
“아니,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로이스터가 퍼렐의 호위를 거절하려고 하자, 헤이녹스가 찬 바람이 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님께서 중간에 실종이라도 되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아…….’
헤이녹스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어쨌거나 로이스터는 대 루엔트 제국의 2황자였고, 그가 실종이라도 된다면 오늘 일도 밝혀질 테니까.
“제 딸도 그런 건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헤이녹스가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일행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 어…….”
“아, 이걸 잊을 뻔했군요.”
격식으로 인사 후 뒤를 돌았던 헤이녹스가 로이스터를 탐색하듯 훑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모두에게 잊히는 겁니다.”
‘모두에게 잊힌다는 건.’
오늘 일을 말하지 말란 거겠지. 우리가 황실을 나온 로이스터를 눈감아 주었듯.
로이스터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로이스터는 여전히 헤이녹스의 품 안에 안긴 나를 빤히 보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
“또 보자, 용사님.”
* * *
‘록시나. 이름이 록시나였구나.’
궁에 돌아온 로이스터는 다행히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아펠라 궁에서 록시나와 마주쳤던 날을 떠올렸다.
‘누군지 정말 궁금했는데.’
그날 록시나는 자신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로이스터가 알 수 있는 건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런데 탄제리크라니.’
이미 황실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가문이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가문의 일원이 바로 록시나였다니.
‘게다가 오늘 봤던 그 힘은…….’
눈이 부시면서도 날카로웠던 힘이 로이스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탄제리크에 그렇게 강력한 힘까지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제국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지금도 끌어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가문이 수두룩한데, 저 정도의 힘의 등장이라면 견제가 더 심해질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숨기려고 하는 거야.’
헤어지기 전, 헤이녹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딸이 공격받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어떻게든 힘을 숨기고, 타 가문과의 교류를 최소화하겠지.
‘내가 록시나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황실을 능가할 만큼 위세 높은 탄제리크의 딸, 록시나.
록시나는 모두가 우러러볼 자리에 있었고, 평생을 지배자로 살 것이다.
반면 나는 비록 2황자라고는 하나, 지지해 주는 가문 하나 없는, 사실상 버림받은 신세였다.
‘이런 내가 너와 같은 곳에 설 수 있을까.’
로이스터의 대답은 ‘아니’였다.
* * *
로이스터를 퍼렐 경과 함께 보낸 후 나는 헤이녹스에게 안긴 채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그 골목에는 어쩌다 간 거지.”
“아, 그게…….”
나는 헤이녹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갑자기 그쪽으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고 말해? 그걸 믿을까?’
하지만 없는 일을 지어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당시의 내가 겪었던 이상한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광장으로 가다가 렌자드 손을 놓쳤어여. 바로 뒤따라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여.”
“이상한 기분?”
“주변이랑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났어여.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여.”
“다른 공간이라…….”
헤이녹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한 말을 되뇌었다.
그에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발이 가는 곳에 도착하니 그 골목이었어여.”
“거기에 2황자가 있었나 보군.”
“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내가 그 골목까지 간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렌자드의 손을 놓쳤으면 다시 잡기 위해 달려야 하는데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으니.
‘정말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헤이녹스도 짚이는 구석이 없는지 미간을 더 찌푸렸다.
‘이런 일 때문에 걱정을 시키다니.’
오늘 축제 나들이는 내가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나와서 당사자가 사라졌으니.
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여. 제가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전부 망쳐 버렸어여…….”
그러자 헤이녹스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뭘 망쳤다는 거지. 축제를? 아니면 나들이?”
“둘 다요…….”
내가 어깨가 축 처진 채 말하자, 헤이녹스는 나를 몸에서 조금 떨어뜨려 바라보았다.
“축제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다. 별다른 사고도 생기지 않았고. 그리고 나들이라면.”
헤이녹스는 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후 말했다.
“또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바쁘시잖아여. 제가 시간을 또 뺏을 수는 없…….”
“고작 하루 가지고 뺏었다고 하는군.”
헤이녹스는 나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말했다.
“얼마든지 뺏어도 좋으니 다치지만 말거라.”
“…….”
그 순감부터 나와 헤이녹스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도 성급하게 말을 꺼내지 않았고, 길어지는 침묵에도 불안하지 않았다.
“저를…… 걱정하셨어여?”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헤이녹스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했다.
“이상한 걸 묻는구나.”
“…….”
“너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넌 내 딸이니까.”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여…….”
“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자, 헤이녹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는 잘만 부르더니 이제 와서 낯가리는 거냐.”
“제가 무슨 말을 했었…… 져?”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저히 실마리가 잡히는 게 없었다.
“말만 해 주시며는 바로…….”
“아빠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제야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이 너무 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졌나.’
무슨 이유에서든 확실한 건, 내가 헤이녹스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하는 헤이녹스는 평소와 같이 냉정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어째선가 그가 서운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헤이녹스와 서운함이라니. 정말 사이가 먼 두 단어 같지만 나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헤이녹스도 나도 더 말을 잇지 않으니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나는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말했다.
“아빠.”
아빠. 내가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이름. 아마 이번에도 부를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말.
너무 어색해서 ‘아빠’하고 발음하는 혀가 아렸다.
‘아까는 잘만 불러 놓고.’
고작 주위가 조금 조용해졌다는 이유로 입안을 채우는 단어가 생경했다.
‘아빠.’
나는 이 단어가 내게 익숙해질 때까지 발음해 보았다.
언제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불러야 하는 걸까.
“아빠. 저…….”
나는 질문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
헤이녹스가 나를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에.
헤이녹스는 한 팔로 나를 들어 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번만 더…….”
“아빠.”
“한 번만…….”
헤이녹스는 내 뒤통수를 감싸 그의 품 안으로 끌었다.
골목 한가운데 선 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나!”
“어디 있어?”
헤이녹스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귀에 익은 이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렌자드?”
“록시나!”
렌자드는 멀리서 날 알아봤는지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록시나! 형! 록시나 여기 있어!”
렌자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와 숨을 헐떡이면서도 나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어떤 이상한 놈이 괴롭힌 건 아니지?”
렌자드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질문을 쏟아 내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갠찮아.”
“록시나.”
렌자드가 부르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온 체드만도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혹시 넘어져서 손목이 삐었다거나 무릎이 긁히진 않았지?”
“나 정말 갠찮아. 아무 데도 안 다쳣써. 멀쩡해.”
“그럼 다행이고…….”
체드만이 한시름 놓아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 있던 렌자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내가 손을 놓치는 바람에…….”
아무래도 렌자드는 내가 사라졌을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된 모양이었다.
‘렌자드도 많이 놀랐겠지.’
사람이 쏟아져 나오던 광장 앞에서 나와 떨어졌기에 걱정이 많았을 거고.
“렌자드…….”
나는 울먹거리는 렌자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