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38)화 (38/106)

<38화>

나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이스터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들으면서도 질문 하나 하지 않았다.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는지도.’

로이스터는 무언가를 더 물어보거나 큰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지만, 몸의 떨림이 잦아든 걸 보니 내 방법은 효과가 있는 듯했다.

로이스터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볼 때,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록시나.”

헤이녹스는 미간을 구긴 채 나를 바라보았다.

“호위와 함께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잠시 눈을 도르르 돌리며 헤이녹스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퍼렐 경에게 놔 달라구 해써여.”

“왜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로이스터를 지켜 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아님 로이스터가 이런 상황에 트라우마라도 생길까 봐?’

뭐라 답하기도 애매했다.

어떤 이유를 대든 내가 로이스터를 도와주려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고, 헤이녹스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물을 게 뻔했다.

‘모른 척하기로 했잖아.’

헤이녹스는 황실의 행보에 촉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황실과의 관계가 있다는 걸 싫어할 수밖에 없다.

내가 곤란한 듯 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자, 결국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팔을 뻗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그는 순식간에 나를 안아 올린 후 뒤를 돌았다.

“잠깐만……!”

그러자 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스터……?’

그는 황급히 헤이녹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 용사님은 나를 구해 주려다 그런 거니까 혼내지 마!”

“……용사님?”

헤이녹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부탁하는 로이스터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록시나를 혼내겠다고 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 그건 아니지만 혹시 오해를 할까 봐…….”

로이스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모습을 관찰하듯 훑던 헤이녹스는 차갑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헤이녹스는 내 눈을 가리고 기절해 널브러진 패거리를 지나쳤다.

“전부 저택 감옥으로 옮겨라.”

“존명.”

퍼렐 경이 남자들을 한쪽 벽에 몰아 두는 동안, 헤이녹스가 고개를 돌려 로이스터에게 말했다.

“2황자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이스터가 몸을 잘게 떨었지만 헤이녹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에 마주친 적 있으시지요.”

그 물음에 로이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녹스와 마주친 적이 있다고?’

로이스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다. 황후와 그녀 가문의 위세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로이스터와 마주쳤다면 아펠라 궁에 헤이녹스가 찾아간 걸까? 그렇게 외진 곳을?

가뜩이나 바쁜 탄제리크가의 공작이 아무런 이유 없이 황후의 눈 밖에 날 일을 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헤이녹스와는 어떻게…….’

내가 예상치 못한 둘의 인연에 머리를 굴리는 동안 헤이녹스가 말을 이어 갔다.

“록시나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줄 모르겠으나,”

헤이녹스는 그저 작은 어린아이를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황자님께서도 우선은 저들과 함께 저택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냉정함 그 자체였다.

“고, 공작. 나는 그저…….”

대답도 채 듣지 않고 뒤돌아 버리는 헤이녹스에 로이스터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떨어졌다.

‘황자인 걸 알면서 저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물론 말도 없이 홀로 골목까지 와버린 데다 멋대로 아티팩트 반지를 빼 버려 폭주까지 했으니 헤이녹스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이대로 로이스터를 저 패거리와 함께 저택으로 데려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일은 내 선택이니까.

로이스터는 내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이곳까지 와 그를 찾은 것도, 개입한 것도 나였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헤이녹스를 바라봤다.

“제가 먼저 끼어든 거에여.”

헤이녹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자,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앞에 골목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얘를 때리고 있써써여.”

“그래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그대로 보고만 있는 건 싫었구.”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었을 텐데.”

“근처에 아무도 없었어여. 그리구…… 사실 제가 나서고 싶기도 했구여.”

나는 어쩐지 놀란 표정의 로이스터를 슬쩍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여. 저 애가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여. 그냥 제가 도와주고 싶었어여. 왜인지눈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찾아온 골목과 그곳에서 마주친 로이스터 필리티움.

이상하리만치 요동치던 신성력과 충동적이었던 내 결정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걱정했을 헤이녹스와 렌자드, 체드만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이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여.”

“……이 모든 걸 모른 척하길 바라는 거냐.”

헤이녹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이유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 이런 무책임한 변명이 어디 있단 말인가.

헤이녹스가 겨우 이런 이유로 넘어가 줄 리가 없…….

“알았다.”

“죄송…….”

나는 멋대로 사고를 친 것에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다 헤이녹스의 대답에 멈칫했다.

‘……알았다, 라고?’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헤이녹스가 살짝 고개를 틀어 로이스터를 바라보았다.

“황실에는 알리지 않겠습니다.”

로이스터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헤이녹스는 서늘히 일갈했다.

“이번 외출은 황제 폐하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마, 맞아.”

몰래 황궁을 빠져나왔던 로이스터는 헤이녹스의 말에 정곡이 찔린 듯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정말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감사 인사는 제 딸에게 하시지요.”

‘나?’

내가 헤이녹스에게 안긴 채 얼떨떨해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황자님을 도운 이유는 딸에게 직접 듣겠습니다.”

헤이녹스의 냉정한 말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로이스터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았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로이스터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먼지투성이인 옷을 입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였지만,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적색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허리를 조금 숙이며 오른손을 앞으로, 왼손을 뒤로한 그는 방금까지 패거리에게 발길질을 당해 바닥을 굴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고맙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서 있지 못했을 거야. 정말…… 정말로 고마워.”

‘아…….’

나는 그의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한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 채 빛나는 로이스터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비 같아…….’

달빛이 로이스터의 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며 넋을 놓고 있자, 로이스터는 황급히 머리칼로 눈을 가렸다.

“미, 미안. 기분 나쁘지?”

로이스터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정돈하자,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당황스러움에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뭐, 뭐가?”

“옷도 더럽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말을 흐린 로이스터는 잠시 머뭇거린 후 입을 천천히 열었다.

“내 눈이 징그럽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뭐?’

로이스터의 눈동자가 징그럽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한 얼굴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 눈엔 이뿐데…….”

“어, 뭐라고?”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로이스터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눈, 예쁘다구.”

“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멍하니 서 바라보는 로이스터에 나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줄곧 했던 생각을 이야기했다.

“빛이 나자나. 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

황후에게 견제당하고, 1황자에게 밀리고, 아버지인 황제에게는 관심조차 받지 못했음에도.

심지어는 질 나쁜 패거리에게 걸려 협박을 당하는 도중에도.

‘눈에서는 빛이 났으니까.’

여태 본 그는 원작에서처럼 모든 걸 놓아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탑을 들어가던 로이스터의 마지막 모습은 모든 걸 다 놓아 버린 표정이라고 했으니까.’

원작에서 로이스터의 등장은 정말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나는 어째선지 포기한 채 탑으로 가는 그의 모습이 선명했다.

‘저 눈이 빛을 잃어버린다니.’

반짝이는 루비 같은 두 눈동자의 생기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야.’

나는 얼굴을 굳히며 로이스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로니까 눈 가리면 안 대.”

제국에서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붉은 눈동자는 분명 로이스터를 위축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불길하다기엔 너무 아름다운걸.’

로이스터의 눈동자는 마치 장인이 한땀 한땀 조각한 것처럼 섬세했다.

‘불행이라기엔 너무 눈이 부셔.’

눈치 보며 색채를 지우기엔 너무 선명했으니까.

“절대로, 흔들리면 안 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