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황자님은 우선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기사의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이스터를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로이스터는 시선만으로 압도당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경멸의 눈초리를 쏘아 대던 황후에게서도,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황제에게서조차 느껴 보지 못한 중압감이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살기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로이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록시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자리의 누구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황급히 고개를 떨군 로이스터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떨었지만, 헤이녹스는 조금도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반지를 뺄 정도로 대단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딸에게 직접 듣겠습니다.”
‘딸이라고……?’
의문에 잠긴 로이스터를 일별하고 헤이녹스는 시선을 돌렸다. 주변을 휘감고 있던 힘의 흐름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 것이다.
날뛰기 바빴던 힘이 정돈되며 소용돌이의 세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성공했군.”
소용돌이를 빤히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나지막이 내뱉음과 동시에 하얀 신성력의 빛이 사라지고 록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용사님!”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나는 안도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퍼렐 경과 로이스터를 보며 웃었다.
“안녕.”
그러곤 고개를 돌려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헤이녹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빠.”
헤이녹스는 눈을 찡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한테 화가 나셨을까.’
멋대로 행동했으니 그럴지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헤이녹스에게 다가갔다.
“멋대로 해서 죄송…….”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헤이녹스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얼마나…….”
‘어?’
놀랍게도, 헤이녹스의 얼굴이 닿은 어깨가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다.
“아, 아빠……”
나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얼떨떨했다.
“아빠…….”
“……가서 이야기하자.”
그러곤 헤이녹스는 그대로 나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차가웠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평소와 같이 무미건조하게 명령한 헤이녹스는, 어느덧 포박이 된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패거리와 퍼렐 경 옆에 서 벌벌 떨고 있는 로이스터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설명은 내일 황궁으로 가 듣겠습니다.”
“아, 아빠!”
나는 황급히 헤이녹스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 애는 잘못한 거 업써여!”
‘몰래 나온 것 같은데 가뜩이나 황궁에서 눈치 보고 있는 애를 또 쥐 잡듯 잡는 거 아니야?’
“얘는 잘못한 거 업써여. 정말이에여!”
“……네가 죽을 뻔했는데 누구도 잘못이 없다?”
분명 낮은 목소리였는데, 나는 어째선지 고함을 치는 것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쳤다.
“저 사람들이 괴롭혀서 도와주다가 그런 거에여.”
나는 바닥을 구르며 곡소리를 내는 패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 때문인데…….”
그러자 헤이녹스는 퍼렐 경에게 나를 넘긴 후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퍼렐.”
그는 패거리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명령했다.
“록시나 눈 가려라.”
“끄아아악!!”
퍼렐 경이 손으로 내 눈을 가리기가 무섭게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눈만 가리면 뭐 해. 소리가 다 들리는데!’
나는 작은 양손으로 서둘러 귀를 막았다.
퍼렐 경의 손 아래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나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남자의 비명에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듣기 싫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 시간이 끝나길 바라던 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늘게 눈을 뜨고 퍼렐 경의 손가락을 조금 벌리자 그 너머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어깨를 떨고 있는 로이스터가 보였다.
양팔 사이로 얼굴을 가린 채 떠는 로이스터는 누가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안 되는데…….’
나에게조차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평생 궁 안에서만 살아온 로이스터는 어떨까.
나는 파뜩 고개를 들었다.
“퍼렐 경!”
“아가씨. 눈을 감으셔야,”
“내려 줘.”
“안 됩니다.”
퍼렐 경은 여전히 고개를 뻣뻣하게 든 채 단호하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퍼렐 경!”
나는 여전히 귀를 막고 몸을 떨고 있는 로이스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걸 그냥 두고만 봐.’
곧이라도 쓰러질 듯 애처로운 떨림이 로이스터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어서 생긴 일인데.’
이대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퍼렐 경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퍼렐…….”
“안 됩니…….”
단호하게 거절하려 고개를 숙인 퍼렐 경은, 마주친 내 간절한 눈빛에 잠시 멈칫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전보다 더 울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한 번만…….”
퍼렐은 내 거듭되는 부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입니다.”
나는 그가 팔을 내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구석으로 달려갔다.
‘어떡해…….’
가까이에서 본 로이스터는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겁에 질려 있었다.
압도적인 헤이녹스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심해지는 로이스터의 떨림에 나는 패거리를 향해 이를 갈았다.
‘나쁜 자식들.’
세상 물정 모르는 애를 판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이고.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겹쳐진 팔 틈으로 얼굴을 박은 채 떨던 로이스터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머리카락 틈으로 살짝 드러난 로이스터의 눈가는 어느샌가 붉게 물든 채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용사님……?”
누가 봐도 운 것이 분명한 눈으로 로이스터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왜 여기 이썻써?”
‘애초에 어째서 로이스터가 여기 있는 거야? 황궁에서는 어떻게 나온 거지?’
나는 패거리에게서 협박을 당하고 있던 로이스터를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떠올렸던 질문을 내뱉었다.
“대체 여기에는 왜…….”
퍽-
“으윽!”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하, 한 번만 기회를……!”
두려움에 찬 남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로이스터는 다시 자신의 두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나는 그런 로이스터의 행동에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대답 듣는 건 나중이야.’
가장 급한 건 로이스터가 안정을 찾게 하는 거니까.
나는 로이스터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축제 온 게 처음이야.”
나는 일부러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로이스터가 헤이녹스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어.’
신경을 덜 쓰다 보면 떨림도 조금은 가시겠지.
아니나 다를까 로이스터는 살짝 고개를 들며 나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들이랑 아버지랑 가치 논 것두 처음이구, 길거리 음식을 먹은 것까지 전부.”
‘이런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오늘 하루는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온 가문 사람들에게 받는 진심 어린 생일 축하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비록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린 듯 이곳까지 와서, 잘 다루지도 못하는 신성력을 개방했다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만약 발길질을 당하는 로이스터를 모른 척 지나갔다면 나는 오늘이 가족과 첫 나들이를 한 날이 아닌, 누군가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으로 기억했을 거다.
“나는 이짜나, 사실 이런 거 정말 해 보고 시펐거든.”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그게 나한테는 간절했다.
‘생일 축하 같은 건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어.’
내 생일은 곧 프리실라의 기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가도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축하를 받았고, 예상 밖의 시간을 선물받았다.
“사실 축하받고 싶다는 것두 전부 바람일 뿐이었찌만.”
축하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 모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정말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소원이었다. 주위에 누구든 쉽게 이루는 일이었지만 나만이 그러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나조차도 아끼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주길 바라 왔으니까.
내가 챙겨야 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나 하나만 소중히 하면 됐는데.
‘그걸 못했네.’
부족한 곳에서 시작했으니 조금이라도 뒤처질까 봐,
나는 나를 끝없이 몰아붙여만 왔는데.
‘뜻밖의 축하를 받아 버려서 정말, 정말로…….’
기뻐.
가문 사람들과 함께한, 그리고 가족과 함께한 그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행복해서.
이 시간을, 지키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