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며칠을 자다 깨기만 반복하다 보니 시간 감각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마차가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의 하늘에서 노을이 지고 있는 걸 보면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헤이녹스를 따라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며 렌자드의 옷을 붙잡고 말했다.
“깨우지 그래써…….”
괜히 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자, 체드만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걸.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러자 렌자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어차피 아버지가 너를 눕히신 거…….”
“렌자드.”
렌자드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몇 발자국 앞에서 걷던 헤이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가고 싶다고 했지?”
분명 그냥 묻는 말인데, 눈빛에서 어딘가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나 자는 동안 렌자드가 뭐 잘못했나……?’
나만 느낀 게 아닌지 렌자드 또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어, 저는…….”
“옆으로 와서 얘기해라.”
“앗, 네!”
헤이녹스의 말에 렌자드가 후다닥 달려가자, 내 옆에 있던 체드만이 작게 웃었다.
“부끄러우신가 봐.”
‘부끄러워? 헤이녹스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체드만을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체드만은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가끔 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
“가끔?”
“응. 출정 가시기 전에 말이야.”
‘출정 가기 전이라면…… 프리실라가 살아 있을 때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체드만은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괴롭지 않아 보였다.
“티 내는 걸 싫어하셔서 늘 뒤에서 몰래 하셨거든.”
‘그러니까 뭘?’
나는 체드만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어쩐지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머니는 전부 알고 계셨겠지만.”
‘어머니…….’
체드만이 내 앞에서 프리실라를 언급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드만이 프리실라를 떠올릴 땐 이런 표정이구나.’
그립고 보고 싶은, 애틋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만 같은 얼굴.
프리실라를 떠올릴 때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연되어 괴로워하는 렌자드나 감당할 수 없는 한기를 뿜어내는 헤이녹스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다정했고, 사랑했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떠올리는 모습.
체드만은 프리실라를 온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왜인지 그런 체드만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저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선명해서.’
프리실라를 잃은 아픔과 그녀를 떠나게 만든 신전을 떠올릴 때면 동반되는 증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의 애틋함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선명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 모습이 맞는 게 아닐까.
사랑했던 어머니를, 평생의 동반자를, 저택을 이끌 안주인을 잃은 사람의 얼굴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응당 느꼈어야 할 슬픔과 애틋함이 분노와 거짓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걸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말 내 탓일까 봐.’
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발치에 치이는 작은 돌만 보고 있자 체드만이 내 양 볼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게 뭐 하는……!”
볼이 눌려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체드만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내가 시선을 돌리며 시침을 떼자, 체드만은 평소의 유순한 표정과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라도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
“…….”
“너 미안해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그롬?”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체드만을 올려다보자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냥 좋다고.”
그렇게 말하는 체드만의 입가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저런 아버지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틈을 내어주신 적 없었거든.”
프리실라를 말하면서도, 체드만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부터, 아버지는 영원히 냉정하고 딱딱한 분이실 줄만 알았는데.”
체드만은 눈가를 얇게 접으며 웃었다.
“네 덕분이야. 아버지께서 예전의 모습을 보이시는 것도, 함께 외출하는 것도.”
그는 내 머리를 흩트리며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미소 지었다.
“생일 축하해, 록시나.”
그러곤 체드만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헤이녹스와 렌자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갈게요!”
나는 내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체드만의 뒷모습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미 호화로운 저택에서 모두에게 생일 축하를 들었고, 선물마저 받았는데도.
그늘진 노을 아래에서 그에게 들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 새삼,
기뻤다.
* * *
“벌써 시장이 섰나 봐!”
하나둘 늘어서는 시장의 상인들과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렌자드가 흥분하며 말했다.
“저번에 시녀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길거리에 파는 닭구이가 그렇게 맛있다더라고!”
“닭구이?”
‘통으로 된 걸 파는 건가?’
내가 관심을 보이자, 렌자드는 더 신이 나 대답했다.
“응! 뼈는 바르고 살만 꼬치에 끼워 파는 거라는데, 엄청 맛있대.”
“그래?”
“맛있겠지! 내가 하나 사 올까? 아니다. 다른 것부터 먹어 보자. 일단은 입구에 있는 저 과일 주스부터 마셔 볼래?”
적극적인 렌자드의 권유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 웅. 나두 마셔 볼래.”
“알았어!”
빠르게 대답한 후 벌써 사람들이 줄이 선 곳으로 달려가는 렌자드를 보며 헤이녹스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묻지도 않는군.”
‘지금 자기한테 안 물어봤다고 그러는 거야?’
나는 표정에 변화도 없이 중얼거린 헤이녹스를 잠시 황당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마시고 싶었으면…….’
괜히 투덜거리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가 시장에서 파는 저 음료를 굉장히 마셔 보고 싶어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 헤이녹스도 사람인데 좀 마셔 보고 싶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자 헤이녹스의 의외인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문득 그에게서 느껴지는 동질감에 헤이녹스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뭐지.”
헤이녹스가 팔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힘에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자, 나는 그를 조금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제 거 나눠 드릴게여.”
옆에서 큽, 하고 체드만의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역시 헤이녹스가 시장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거야. 아무도 권하지 않는데 공작 체면상 먹고 싶다고 말도 못 하고…….’
먹고 싶음에도 꾹 참아 왔을 헤이녹스를 떠올리자 안타까움이 한층 더해졌다.
내가 약간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헤이녹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요.’
당연히 헤이녹스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탄제리크 가문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그가 가져야 할 위신 때문에 음료 하나 마음대로 못 마신다는 게 안타까웠다.
‘오늘은 꼭 먹게 해 줘야겠어.’
나는 헤이녹스가 오늘은 반드시 시장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걱정 마세여. 제가 꼭 드실 수 있도록 할게여!”
‘떼를 써서라도 먹을 수밖에 없게 해야지. 나 때문에 억지로 먹었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 못 하겠지?’
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헤이녹스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웃었다.
“그래.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앗!”
‘앤이 열심히 손질해 준 머리인데!’
나는 생일 파티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 나를 열정적으로 꾸며 주던 앤을 떠올렸다.
‘고생했을 텐데 해 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망가뜨렸네……. 미안해, 앤.’
이 집안 남자들은 왜 이렇게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는지, 체드만이 만져 흐트러진 머리를 겨우 정리해 놨더니, 헤이녹스가 다시 쓰다듬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엉킨 머리를 대충 손으로 풀며 속으로 앤에게 앞으로는 머리를 풀어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황실이 주최한 축제라 그런지 거리는 꽤나 깨끗했고, 볼거리도 많았다.
활기가 도는 시장에 상인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즐거워 보였고, 축제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먹을거리를 들고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록시나, 이거 어때?”
얼굴에 미소를 걸친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묻는 렌자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팔찌?”
“응. 동부에서 난 조개껍데기로 장식한 거래.”
‘동부에 바다가 있나?’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동부를 상상하며 작은 조개껍데기를 만지작거리자, 뒤에 서 있던 헤이녹스가 가판대 위의 팔찌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동부에 가지 못한 지도 꽤 되었군.”
“동부에 가 보셔써여?”
“그래.”
탄제리크 영지는 서부에 위치해 있는 데다 황궁은 수도인 중앙에 자리해 동부에는 갈 일이 많지 않았다.
“머 때문에 가신 거지?”
내가 이유를 몰라 갸우뚱거리자 조개껍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헤이녹스와 렌자드 대신 체드만이 답했다.
“록시나는 한 번도 안 가 봤겠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가판대에 있던 팔찌를 전부 계산한 헤이녹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동부에 프리실라의 무덤이 있다.”
‘무덤……?’
“마지막을 탄제리크보단 프리실라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보내게 하고 싶었다.”
‘아, 프리실라의 고향이 동부였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헤이녹스는 방금 산 팔찌 중 하나만 남기고 전부 퍼렐 경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프리실라는 바다를 좋아했지. 그녀의 친정인 후작저도 해변가에 있었다.”
“아…….”
내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자, 헤이녹스는 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프리실라는 바다 구경하길 좋아했다.”
그는 내 손목에 봉투에서 꺼낸 팔찌 하나를 걸어 주며 말했다.
“선물이다.”
헤이녹스는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불이 꺼진 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이 눈에 띄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별을 바라보다, 이내 하늘에서 눈을 떼고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축제가 끝나면, 동부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