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앤은 처음 나의 말을 듣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이해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돼요, 아가씨. 그러다간 이가 전부 상해 버릴 거에요.”
“먹구 잘 양치하면 대자나.”
“그래도 지나치게 많은 설탕은 몸에 좋지 않아요.”
앤의 고집을 꺾은 건 뜻밖에도 헤이녹스였다.
“그냥 주게.”
그는 나와 앤의 신경전을 다소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앤에게로 승기가 기울 때쯤 내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해에 한 번뿐인 생일이잖나. 하루쯤이야 먹고 잘 씻으면 될 일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헤이녹스를 올려다봤다.
‘웬일로 마음에 드는 말을 다 하지?’
헤이녹스라면 당연히 앤의 말을 들으라고 할 줄 알았다. 실제로 지나친 양의 설탕은 몸에 좋지 않으니까.
‘처음 축하받는 생일이라 조금 너그러워졌나?’
실제로 헤이녹스의 얼굴은 평소의 굳은 모습보다 한결 풀린 듯 보였다.
앤과 헤이녹스 주변 사용인들의 얼어붙은 반응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헤이녹스가 무슨 의도로 허락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반길만한 일이었다.
나는 곤란한 듯한 표정의 앤의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오늘만이에요!”
“웅. 오눌만!”
앤은 짧은 한숨을 쉬며 내게 케이크가 종류별로 담긴 트레이를 끌어왔다.
‘케이크!’
그간 방 안에서 조용히 요양만 하느라 디저트는 꿈도 못 꿨다.
‘스튜에 간도 안 돼 있었지!’
내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먹었던 그 스튜는 정말…….
‘매번 스튜에 다른 재료를 넣으며 신경 써 준 푸이치한테는 미안하지만,’
정말 맛없었다.
‘말 그대로 맛이 없었지. 그냥 아무 맛도 안 났어.’
그렇게 밍밍하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스튜는 난생처음이었다.
밍밍해서 내가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이젠 미각이 상실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 설레…….’
나는 오랜만에 풍겨 오는 짙은 단내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까부터 설탕이 코팅된 딸기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데, 이 정도면 먹어 달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포크로 딸기 케이크를 가르자,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생크림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안에 넣은 딸기 케이크는 말 그대로, 최고였다.
‘너무 맛있어…….’
새콤달콤한 딸기와 부드러운 생크림이 혀에 닿자, 그간 죽어 있던 내 미각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단 건 이런 맛이었지…….’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맛이었다.
글썽이는 눈물을 매단 채 정신없이 케이크를 퍼먹다 보니 어느새 빈 그릇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생크림 하나 남김없이 먹은 후에야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어…….’
다음 케이크를 먹기 위해서 트레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앤을 비롯한 사용인들은 어째선지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렌자드와 체드만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게다가 헤이녹스는,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놀랍게도 헤이녹스는 웃고 있었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은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왜…… 왜 그러지?’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의심부터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그게 평소 무표정한 얼굴로 냉기만을 뿜어 대던 헤이녹스라면 더더욱.
‘최근에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다지만…….’
그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낯설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드는 어색함에 나는 눈만 도르르 굴렸다.
‘너, 너무 빨리 먹었나?’
한 조각이 꽤 컸는데도 나는 말 한마디 없이 순식간에 케이크를 해치워 버렸다.
‘좀 더럽게 먹은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서둘러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소매로 닦아 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가, 가치 먹을 사람……?”
그러고 보니 이 많은 사람을 앞에 세워 둔 채 혼자만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빠르게 눈을 돌리며 함께 나눠 먹을 상대를 확인하던 나는, 만만한 렌자드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렌쟈드, 가치 먹쟈.”
“나?”
렌자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같이 먹어도 돼?”
왜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활짝 웃는 렌자드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래, 가치 먹쟈구!”
렌자드는 내게 재차 확인을 받은 후에야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 형도 같이 먹어도 될까?”
렌자드는 포크를 쥔 채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그게, 형도 레몬 케이크를 좋아하거든…….”
“아니야, 록시나. 너 많이 먹어.”
렌자드의 말에 체드만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를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
“체드만두 얼릉 와.”
나는 왼쪽 빈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체드만을 바라보았다.
“여기 안자!”
그러자 체드만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하얀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그럼, 그럴까……?”
나는 오른쪽에 렌자드, 왼쪽에 체드만을 앉힌 채 든든한 마음으로 다시 케이크를 먹었다.
아니, 먹으려고 했다.
삐딱하게 고개를 숙인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뭐, 뭘……?’
어째선지 헤이녹스는 좀 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지운 채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단것도 싫어하면서!’
푸이치에게 듣기론 헤이녹스는 단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나친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쓴 것으로 풀곤 했기 때문에, 그의 방에서는 언제나 쓰디쓴 원두의 향이 진동하기도 했고.
그런 그가 이런 설탕 덩어리인 디저트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또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도무지 부담스러워서 케이크가 목 뒤로 넘어가질 않았다.
‘내가 잘못한 건 딱히 없는 거 같은데.’
헤이녹스 빈정이 상할 만한 일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났을 리가 없다.
‘아닌가? 혹시 내가 뭐 실수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뭐 때문에 저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생일 파티를 열어 준 게 헤이녹스이기도 하고, 이 케이크도 전부 헤이녹스 지갑에서 나온 거니까.
나는 애써 케이크 조각을 꾹 삼켜 낸 뒤 입을 열었다.
“고, 공쟉님두 드실래여……?”
‘거절할 게 뻔하지만 예의상 물어는 봐야…….’
“그러지.”
당연히 거절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헤이녹스는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거절 한번 없이 응했다.
“어, 그게…….”
내가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자, 헤이녹스가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싫은가?”
“아, 아녀, 아녀!”
난 손까지 내저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여…….”
내가 말을 끝맺을 때쯤에 이미 헤이녹스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싫은 건 아니지만…….’
헤이녹스가 날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정말 나를 미워한다면, 이런 생일 파티도 열어 주지 않았겠지.’
헤이녹스 스스로도 그간 그가 무관심했다는 걸 알기에 노력하고 있는 중일 거다.
‘그치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잖아…….’
헤이녹스와는 말을 많이 나누어 본 것도, 즐거운 무언가를 함께한 적도 없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가 어렵고, 조금은 불편했다.
애써 헤이녹스를 피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사용인들을 보았다.
‘계속 서 있는 건가?’
지치지도 않는지, 그들은 아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 아플 거 같은데.’
물론 주인을 모시는 게 그들이 할 일이지만, 우리가 도움이 필요 없을 땐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모두 생일 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하던 중,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케이크를 떠올렸다.
‘어차피 저거 다 먹지도 못할 거고…….’
나는 고개를 올려 헤이녹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공쟉님.”
헤이녹스가 말하라는 듯 눈썹 한쪽을 까닥이자,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남은 케이크는…… 다룬 사람하구 나눠 머거도 될까여……?”
‘내 생일 파티니 내 마음이긴 하지만 돈을 낸 건 헤이녹스니까.’
내가 눈을 껌벅거리며 헤이녹스를 바라보자,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근처에 서 있던 앤을 불러 케이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앤, 이거 다 가치 머거.”
“이 케이크를요?”
앤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흰 괜찮아요. 아가씨께서 건강해지셔서 이렇게 드시는 것만 봐도 기쁜걸요.”
앤은 저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늘 나와 함께하는 게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앤이 나를 진심으로 아껴서 뭐라도 더 해 주려고 하는 것처럼, 나도 줄곧 그들을 위해 무언갈 해 주고 싶었다.
비록 아직은 내가 어린애에 불과하다지만, 그들이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신성력으로 앓기 전에도, 그 후에도 변함없이 나를 위해 줬으니까.’
가주인 헤이녹스가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사용인들 또한 나를 홀대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오히려 더 챙겨 주려 노력했다. 그게 헤이녹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일지 모르는데도.
따뜻하고 다정한 공작 부인을 잃은 건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그들이 프리실라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헤이녹스가 귀환한 직후 서늘하던 저택의 분위기에서도, 내가 신성력으로 앓던 때도, 점차 나아지던 때도.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를 위하고 있다는 것쯤은 누워 있는 동안에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드레스도 같은 의미겠지.’
파티 준비를 하고, 이 넓은 탄제리크 저택을 관리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이에도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직접 선물을 만들어 준 게.
처음 그들이 내게 이 드레스를 보여 줄 때, 나는 보았다.
긴장으로 떨리던 어깨와 피곤이 드리워진 눈 밑, 바느질 중 다친 상처가 뒤덮고 있는 손가락을.
‘진심이 아니라면 꾸며 낼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모습이 이곳에 적응하는데 얼마나 큰 보탬이 되었는지, 나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아마 모르겠지.
“내가 아직은 해 줄 수 있는 게 업찌만,”
나 혼자서의 힘으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언제나 고마어. 모두에게.”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져 내리는 이 생크림 같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건 모두 그들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지만, 이게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라면.
줄곧 가지던 그 고마움을,
“내 선물을 바다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