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탄제리크 저택 내에는 기대감 섞인 분주함이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의 생일 파티라니!’
앤은 들뜬 마음으로 짐을 나르며 얼마 전 나누었던 렌자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앤 맞지?”
멀리서부터 달려와 제 팔을 잡은 채 숨을 고르는 렌자드에 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 맞습니다.”
“너 록시나가 뭐 좋아하는지 알지?”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거요?”
골똘히 고민하던 앤은 마땅한 게 생각이 나지 않는지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가씨께선 드레스에도, 보석에서 별로 관심이 없으셔서…….”
“그래도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뭐든 좋으니까 하나만 말해 봐.”
“음…… 아가씨께선 책 읽는 걸 좋아하세요. 특히 디칼 님과 역사 수업을 하신 날에는 꼭 서재에 가서 관련 서적을 읽어 보시곤 하니까요.”
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렌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책을 사다 줄 순 없잖아.”
“아가씨께선 책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생일 선물인데?”
“생일 선물이요?”
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렌자드를 바라봤다.
“도련님께서 아가씨 생일을 챙겨 주시다니…….”
앤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에 렌자드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동안 한 번도 생일을 챙겨 준 적이 없더라고.”
“생일을 안 챙겨 주신 것뿐만 아니라…….”
매해 다가오는 생일 때마다 방에 틀어박혀 홀로 쓸쓸하게 있던 록시나를 떠올린 앤은 잠시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렌자드를 바라봤다.
“처음 준비하시는 생일 선물일 테니 확실히 책은 좀 부족한 것 같네요.”
“…….”
앤의 뼈 있는 말에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지 렌자드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그 모습에 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달달한 걸 좋아하세요. 특히 주방장님이 해 주신 파이라면 뭐든 맛있게 드시고요.”
“파이?”
‘파이라면 저번에도 먹고 있었지.’
식당에서 록시나와 대판 싸웠던 날에도 주방장이 구운 애플파이를 먹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그땐 왜 그랬지!’
체드만이나 헤이녹스는 단 걸 입에도 안 대는 편이라 렌자드도 디저트는 즐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갓 구운 애플파이를 먹고 있는 록시나가 왜 그렇게 얄미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렌자드는 고개를 크게 내저으며 괜히 시비 걸었던 자신을 애써 부정하고 말했다.
“그치만 푸이치 파이는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록시나가 어떤 걸 받아야 좋아할지 골똘히 고민하던 앤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렇게 앤이 떠올린 방법은 생일 파티였다. 렌자드도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문득 걱정이 몰려왔다.
‘결국 아버지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헤이녹스는 쉽게 허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실에 사치품을 진상하는 상단의 물건은 물론이고 옆 왕국에서도 구하기 어렵다는 귀중품까지 잔뜩 사들여 저택 한구석이 꽉 찼을 지경이었다.
출정한 동안 하지 못했던 소비를 지금이라도 하겠다는 듯 헤이녹스의 지출은 거침이 없었다.
드레스 한 벌에 수도에 위치한 작은 저택 하나 값이라는 의상실에서는 록시나가 입을 드레스부터 일상복, 머리띠와 같은 작은 장식품까지 색깔별로 맞추었다.
‘이젠 괜찮으신 걸까?’
록시나의 생일은 동시에 프리실라의 기일이기도 했다. 그날만 다가오면 늘 우울해했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잖아.’
헤이녹스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을 쏟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늘 우선순위였던 일조차도 제쳐 두고 이만큼의 자본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록시나의 생일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겠지.
‘그럼 나도 질 순 없지.’
난생처음 챙겨 보는 동생의 생일이다. 그간 챙겨 주지 못한 미안함을 담아서라도 렌자드는 이번 생일 파티를 잊지 못할 기억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퍼렐 경! 거리로 나가자!”
저택을 나서는 렌자드의 얼굴에는 불그스름하게 홍조가 올라와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 * *
요즘 저택 분위기가 이상하다.
‘앤이 곁에 있는 시간도 줄고, 방 밖으로도 못 나가게 하고.’
언제나 차분하고, 또 조용했던 저택에 이런 부산스러움이라니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했나?’
하지만 누가?
탄제리크 저택에 사적으로 찾아올 만큼 가까운 지인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황제가 와도 오만할 헤이녹스가 지인 하나 왔다고 크게 신경 쓸 리도 없고.
‘헤이녹스가 어디 다시 출정이라도 가나?’
그거 말곤 달리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좋으니까 나 방에서 좀 내보내 줘…….’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몸에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나 할 것도 되게 많은 사람이라고.’
비록 내가 어리고, 작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앓아눕기까지 했지만 실제로 나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하루빨리 신전에 가 봐야 하는데.’
신전에 대한 의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지만 그뿐, 실질적으론 어떤 진전도 없었다.
‘황실에 있는 금서는 열람할 수도 없으니까 신전이라도 가 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물론 신전이 프리실라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그리 쉽게 알려 주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신성력이 발현한 상태로 신전에 가는 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지만…….
‘그치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대로는 답답하기만 하니 직접 찾아라도 가 보는 수밖에.
한시가 급한 와중에 방에서 나가지조차 못하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일어나기만 하면 다시 이불을 덮어 버리질 않나,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겁하고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질 않나.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도무지 그게 뭔지 모르겠어!’
진짜 헤이녹스 출정 가나? 아님 렌자드가 또 사고 쳤어? 설마 체드만이 뭘 잘못한 건 아니겠지?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점점 더 불안해졌다.
“몬데! 대체 몬데!”
답답함에 아우성을 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그때였다.
“아가씨.”
“앤?!”
나는 반가운 목소리에 재빨리 문 근처로 다가갔다.
“벌써 일어나 계셨군요!”
작은 티팟과 초코칩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있던 앤은 내가 깨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평소에 비해 일찍 일어난 편이기는 했다. 잠을 열 시간 넘게 자고도 낮잠을 한 시간이나 더 잤으니까.
“그냥 눈이 떠져써.”
온종일 침대에서 자고 먹고 또다시 자기만을 반복해서 그런지 이젠 잠이 오지도 않았다.
“군데 오늘 아침이 초코칩이야?”
내가 파이나 쿠키처럼 단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밥 다 드신 후에 드릴게요!’라고 말하던 앤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초코칩?’
내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앤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단 거 먹고 힘내셔야 하거든요.”
‘힘내야 한다고?’
내가 무슨 일 때문인지를 생각하는 사이 앤은 나를 거울 앞 의자에 앉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주 좋아. 이러케 좋을 수 이쓸까 시플 정도로.”
“다행이네요.”
앤은 싱긋 웃으며 손으로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어딘가 밝은 기색의 앤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군데…… 앤 무슨 좋은 일 이써?”
“좋은 일이요?”
“웅. 기분 좋아 보여.”
“그런가요?”
나의 말에 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듯 애매한 대답을 하며 웃었다.
“저는 조금 감격스러울 뿐이에요.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니까요.”
그러곤 다시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앤은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흠…… 뭐든 손꼽아 기다렸다니까 나쁜 일은 아니겠지.’
나는 앤이 반가운 누구라도 만났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구태여 더 질문하지 않았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앤은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검은색 머리를 손질한 뒤, 반으로 묶어 하늘색 리본으로 고정했다.
“공녀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리자, 사용인 셋이 하얀색 천으로 덮인 무언가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머야?”
내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물건을 탐색하자, 방으로 들어온 사용인 중 한 명이 천천히 천을 들췄다.
“어……?”
“직접 만든 드레스예요, 아가씨.”
“직접…… 만들었다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앤과 다른 사용인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생일 선물이에요.”
‘선물이라니…… 아.’
그러고 보니 이맘때가 프리실라의 기일이었던가?
프리실라의 죽음과 신전에 정신이 팔려서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드레스를 바라만 보고 있자, 앤은 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와 말했다.
“저희의 선물을 받아 주실래요?”
‘아…….’
나는 그 미소에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음을 참기 위한 침묵이 길어지자 앤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
내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앤은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운 채 다른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역시 좀 부족하죠? 저희 솜씨가 좋지가 못해서…….”
“아니!”
나는 서둘러 앤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론 거 아니야. 그냥…….”
‘너무 좋아서 그런 건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싫은 게 아니라고, 정말 고맙다고 그런 간단한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빨리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오해하지 않을 텐데…….’
내가 답답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일만 반복하자, 앤은 알겠다는 듯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말해 주셔도 괜찮아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왜인지 안심이 되어 요동치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한번 입어 보실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과 사용인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드레스는 리본과 같은 푸른빛이었다.
어깨와 드레스 밑단에는 하얀색 레이스가, 가슴팍에는 푸른 리본과 그 위에는 녹음이 물든 듯한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아가씨……. 어쩜 너무…….”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는 앤의 눈은 감동에 젖은 듯 촉촉해져 있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하고…… 아니 내가 아가씨께 이런 불경한 말을……! 아니다. 지금 이럴 게 아니지.”
금방이라도 칭찬을 쏟아 낼 듯 한껏 몸을 부풀리던 앤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눈에 힘을 줬다.
“어서 나가요, 아가씨.”
“어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앤은 가슴팍 위에 손을 올린 채 싱긋 웃었다.
“기다리는 분이 많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