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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29)화 (29/106)

<29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고집은 왜 쓸데없이 세 가지고 남의 말을 들어 먹지 않는 걸까?

“다음부턴 퍼렐 경 말 드러! 렌자드가 머 아는 게 있다구 나서.”

내가 깊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자, 잔뜩 위축된 렌자드의 모습이 보였다.

내게 고맙다는 인사나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잔소리를 들으니 실망한 모양이었다.

‘좀…… 심했나?’

말하고 보니 어린애한테 너무 말이 거침없었나 싶기도 하고.

불쌍하게 고개를 푹 숙이곤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렌자드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사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맞긴 하지. 제국 제일가는 부자 가문의 차남이니까. 그런 거리에서 물건을 직접 살 일도 없었을 테고.’

나 주겠다고 좋은 마음으로 사 왔을 텐데 너무 나무란 것도 같았다.

‘에효.’

나는 렌자드가 자꾸만 안타까워 보이는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나 마음 약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는 렌자드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담에는 나랑 가치 가든가.”

“……어?”

렌자드는 예상치 못한 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 나 잘 못 들었어. 한 번만 더 말해 줘.”

“다음에는 나랑 가치 가자구!”

나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또 사기당하지 않을라면 나랑 가치 가야 할 꺼 아니야!”

내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자, 렌자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정말…… 정말 나랑 같이 가?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그래…….”

‘그동안 많이 달라졌으니까.’

내가 깨어난 시점부터 탄제리크가 사람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했다.

그 고집 세던 렌자드가 어서 나으라며 선물을 챙겨 주고, 묘하게 내게서 선을 긋는 듯하던 체드만은 수업을 빼고 나를 찾아왔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헤이녹스였지.’

헤이녹스는 그 냉담한 태도는 어디에 두고 왔는지, 여전히 뻣뻣했지만, 그 안에 왜인지 모를 애정이 묻어났다.

‘얼마 전에도 그랬고.’

약 기운에 눈을 감을락 말락 하며 몽롱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 헤이녹스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거의 감긴 내 눈꺼풀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곤 침대 옆에 앉아 서류를 읽었지.’

사실상 제국에 없어선 안 될 인물이자 한 가문의 가주인 헤이녹스에게는 언제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잠조차 자지 못하는 날이 수두룩했는데.

‘매일 밤마다 나를 찾아오는 줄은 몰랐어.’

금방 잠들어 버려서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 의자를 만져 보면 온기가 남아 있었다.

‘렌자드도 더는 툴툴거리지 않고.’

오히려 뭔가를 챙겨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분홍색 보석이 잔뜩 박힌 토끼 인형을 가지고 오기도 하고, 목 부분에 흰색 레이스가 달린 노란색 원피스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저 커다란 인형을 직접 사 들고 온 것도 그렇고.’

이젠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게 분명했다. 그 전에 나에게 사과했을 때부터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모두 내가 죽을 뻔해서 그런 거겠지.’

렌자드가 다 꺼져 가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했던 말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엄마가 생각난다고 했었으니까.’

프리실라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건 렌자드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땐 나도 거의 죽어 가고 있었고.’

울먹거리던 렌자드를 떠올리면 왜인지 가슴이 아파 왔다. 프리실라가 떠나던 그날도 이랬을까 싶어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야.’

사랑하던 가족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렌자드에게 내 아픔은 또 다른 트라우마를 만들었겠지.

심하게 앓았던 2주 동안 렌자드가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걸 떠올리자니 괜히 애틋했다.

‘노력이 가상해서 봐준다, 내가.’

내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새침하게 고개를 치켜들자, 렌자드가 눈을 빛내며 재차 물었다.

“정말? 정말이지?”

풀이 죽어 있던 렌자드는 금세 신이 나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너 다 나으면 거리에 가자! 곧 축제도 열린대! 수도에서 열리는 건데, 한창 꽃이 폈을 때라 꽤 볼만 할 거야. 그리고 또…….”

“그래, 그래.”

나는 흥분해서 말하는 렌자드의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루시온델 극장에도 가자. 거기에서 연극은 본 다음에 거리 구경을 하는 거야. 거기 근처에서 아버지만 한 인형을 판대!”

“인형?”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무래도 나한테 인형을 공수하던 중에 소문을 하나 들은 모양이었다.

렌자드는 내가 그 인형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응!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엄청 많아서 경쟁도 치열하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 돈 많으니까. 얼마가 들더라도 사다 줄게.”

가슴을 팡팡 두드리면서 자기만 믿으라는 듯한 렌자드의 태도에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게 얼만데?”

“30골드.”

“야!!”

얘 경제 관념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 * *

렌자드의 머리가 꽃밭인 경제 관념을 한참 고쳐 주자, 잔뜩 풀이 죽은 렌자드는 검술 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방을 떠났다.

며칠 안 쓰던 목을 갑자기 썼다니 따끔거려서 좀 잘까 싶어 이불을 덮는 순간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록시나.”

오늘 무슨 날인 걸까? 아니면 내 방에 꿀이라도 몰래 숨겨 놨다거나.

‘아, 또 누구야?’

나는 피곤함과 몰려오는 짜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

그리고 나는 뜻밖의 인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드만?”

조금 놀랍게도, 내 방을 방문한 인물은 체드만이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닌 게 지금은 점심을 막 지난 시간이었고, 체드만은 후계 수업을 한창 받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어떠케 와써?”

내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묻자, 체드만이 한쪽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살짝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잘 있나 궁금해서.”

“그러쿠나…….”

체드만은 내 침대 옆, 렌자드가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웅.”

괜찮다 못해 힘이 펄펄 넘친다.

렌자드 때문에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이렇게 침대 위에만 누워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나 이제 다 나아써.”

“그래?”

내가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의지를 담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체드만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아…….’

살짝 열어 둔 창틈 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체드만의 금색 머리카락에 닿아 눈부시게 빛났다.

이럴 때면 보지도 못했던 프리실라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지는 것 같았다.

‘헤이녹스도 프리실라의 이런 모습에 반한 걸까.’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칼은 따듯한 햇빛을 모두 담아 넣은 것 같았다.

헤이녹스와는 달리 선이 얇은 체드만은 미소를 지을 때 서늘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모든 걸 이해할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

헤이녹스가 새벽의 차가운 달 같았다면, 체드만은 싱그럽게 웃는 태양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체드만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록시나?”

갑작스러운 태도에 의아한 체드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두 손으로 볼을 챱! 하고 움켜쥐었다.

‘체드만이라면 밖으로 나가게 해 줄지도 몰라!’

렌자드야 아직 어린 데다가 철이 안 들어서, 괜히 데리고 나가 달라고 했다간 요란스럽게 굴어서 헤이녹스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하지만 체드만이라면 가능하겠지!’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가 차분하고 머리도 좋으니까. 가주 대리까지 맡은 경험이 있으니 작은 나를 서재로 데려가 주는 정도는 일도 아닐 거다.

“나 쫌 데리구 나가 죠!”

“데리고 나가 달라고?”

“웅!”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체드만을 바라봤다.

“나 너무 심심해! 방에만 있는 거 지루하단 말야.”

“심심하다고?”

체드만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인형이라도 사다 줄까?”

“아니!!”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왜 인형을 못 줘서 안달이야.

“나 인형 별루 안 조아해!”

“인형을 안 좋아한다고?”

‘뭐 어린애면 다 인형만 좋아하는 줄 아나 보지?’

안타깝게도 나는 실용성도, 가성비도 별로인 인형은 좋아하지 않았다.

내 짜증 담긴 대답에 체드만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재차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꽤나 진지한 그의 표정과 길어지는 생각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책 읽는 거 조아해.”

“그래?”

‘그래. 그러니까 얼른 나를 서재로…….’

“그럼 책 사 줄게.”

“머?! 아니 잠깐만……!”

내가 의자에서 일어선 체드만의 소매를 황급히 잡았지만, 체드만은 그 위에 손을 겹치며 미소 지었다.

“금방 가져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곤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가 버렸다.

“머야……?”

나는 멍한 표정으로 점점 멀어지는 체드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얘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지……?’

나는 나갈 수 있고, 너는 없다 뭐 그런 뜻인가?

“체드만…….”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얄미워어!!”

* * *

‘길버트 이 자식.’

여동생이면 분명 인형을 좋아할 거라더니.

체드만은 결국 전해 주지 못한 인형을 꽉 쥐었다.

‘그렇게 확신하더니.’

길버트는 체드만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의 어머니가 프리실라와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인데, 그 덕에 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잦았다.

‘저택에 왔길래 도움이 될까 싶어 물어봤더니.’

헤이녹스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체드만이 바빴던 탓에 그간 둘은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헤이녹스가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체드만은 가주 대리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계자 수업을 재개했고, 덕분에 전보다는 여유로워진 상태였다.

때문에 어제, 길버트는 오랜만에 체드만을 보기 위해 탄제리크 저택을 방문했다.

체드만은 길버트 또한 여동생이 있기에 잘 알 거라 생각했고, 록시나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추천해 달라 말했다. 그리고 길버트가 확신에 차 말한 대답이 인형이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군.’

록시나가 인형을 좋아하지 않는 건 여타 여자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체드만에겐 길버트의 신뢰가 대폭 깎이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책을 좋아한다니.’

의외의 대답에 놀랐지만 체드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책을 좋아하는 거지?’

역사서? 아니면 예법서?

또래의 영애들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종류별로 사야겠어.”

체드만은 록시나가 듣는다면 기함할 소비 계획을 세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방으로 향하는 체드만의 표정은 너무 일찍 철이 든 후계자가 아닌, 선물을 눈앞에 둔 또래의 아이처럼 기대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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