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안토니오가 고개 숙여 정중히 부탁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헤이녹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헤이녹스는 눈앞에 이 늙은 의사가 왜 초면인 자신에게 이리 위험한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신전을 믿지 말라니.’
전장에서 돌아온 후로부터 은밀하게 신전의 동향을 보고 받고 있던 헤이녹스에게 신전을 견제하는 또 다른 이의 정보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 그에게 왜 이리 위험한 발언을 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대는 나와 처음 만나지 않았나. 그런데 대체 무얼 믿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헤이녹스의 싸늘한 비웃음에도 안토니오는 시선을 굽히지 않았다.
“저는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한 만큼, 수많은 보호자를 봐 왔습니다. 그중에는 치료비를 낼 수 없어 가족을 포기하는 사람도, 끝까지 놓지 않는 이도 있었지요.”
안토니오는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공작님께선 공녀님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더군요.”
“……가족이니 당연한 거 아닌가.”
헤이녹스의 죄책감 어린 대답에 안토니오는 갈라진 목소리로 느리게 답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세상엔 가족이라고 늘 절대적인 애정이 뒤따르진 않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안토니오의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저는 이 가문 사람들에게서 공녀님을 향한 진심을 봤을 뿐입니다.”
“그게 이런 말을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제 경험상, 가족을 아끼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
“제가 공작께 드리고 싶은 말은, 신전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입니다.”
안토니오는 헤이녹스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나 견제하셔야 합니다. 신전은 더 이상 청렴한 신의 대리인이 아니니 말입니다.”
“무언갈 봤군.”
헤이녹스는 안토니오의 단호한 말에 그가 전쟁터를 떠돌며 본 신관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라 확신했다.
“신관에게서 신전의 부패를 봤나?”
헤이녹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안토니오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성급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신전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헤이녹스와 안토니오는 둘 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전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안토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헤이녹스가 따라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번엔 헴델로 가 볼까 합니다.”
“동부 경계 근처에 있는 마을 말인가.”
“요즘 그곳에서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다더군요.”
“그 원인 불명의 전염 말인가? 아직 소재는 파악 중인 걸로 알고 있네만.”
“예. 그런데 헴델이 아무래도 수도와 먼 곳이다 보니 식량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미 병에 걸린 이들은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있고요.”
“그곳은 북부 소관이라 황실이 개입하기가 쉽지 않지. 워낙 폐쇄적인 곳이 아닌가.”
“맞습니다. 북부는 척박한 기후 탓에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지요.”
“그대의 신분은 보장되어 있는 건가?”
안토니오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협회에서 면허증도 재발급받았지 뭡니까.”
“여전히 북부는 엄격한 모양이군.”
“늘 그렇듯 말이지요.”
안토니오가 매무새를 가다듬어 나갈 준비를 마친 후 헤이녹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탄제리크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의 담백한 태도에 헤이녹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력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뒤따르는 법이지.”
안토니오가 의미심장한 헤이녹스의 말을 이해하게 된 건 헴델 마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진찰비를 확인한 후였다.
* * *
“집사. 록시나는 아직 자고 있나?”
“예. 많이 피곤하셨는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집사에 보고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긴 헤이녹스는 록시나의 방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 자리에 멈춰 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는 헤이녹스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집사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곤히 주무셔서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실 겁니다.”
“그런가.”
집사의 말에 한숨 놓은 헤이녹스가 느리게 방문을 열었다.
집사의 말대로 록시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 가슴팍이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신성력이 발현되기 전, 록시나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한 줄 아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헤이녹스는 록시나의 머리카락을 귀에 꽂으며 말했다.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너무 슬퍼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헤이녹스는 턱에 세게 힘을 주었다.
“아이가 엄마라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게,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 잘못한 게 없는데도 먼저 고개를 숙이도록, 내가…….”
집사는 이를 악물며 버티는 헤이녹스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스스로를 탓하진 마십시오. 그땐 주인님께서도 어리셨잖습니까.”
집사의 위로 섞인 말에 헤이녹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미 없는 소리. 나는 이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어.”
그땐 성숙하지 못해서, 아내를 잃고 제정신이 아니어서, 텅 빈 가슴 속 공허가 너무 커서.
그런 건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록시나는 그보다 더 어렸고, 작았고, 또 약했으니까.
“이번엔 너를 정말로 잃는 줄 알았다.”
숨이 넘어가며 점점 의식을 놓고, 삶을 포기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록시나를 헤이녹스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이 늦은 거 안다. 네겐 너무 갑작스러우리란 것도.”
하지만 아이야.
“나는 너를 지켜 주고 싶다.”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부터 너를 보호하고, 드넓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 주고 싶다.
“그러기엔 내게 아직 부족한 게 많아.”
당장 눈앞에 놓은 적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탄제리크의 몰락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승냥이 떼가 수두룩했다.
“네가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해 주마.”
너를 기억하며, 그들을 베어 나가겠다.
“걸림돌은 모두 없앨 테니, 너는 부디 평탄한 길만 걷거라.”
네가 웃는 모습을 그리며, 네가 내게 안기는 모습을 그리며.
그리하여 나는 더 강해지겠다.
* * *
나는 기절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깨어났다. 그날부터 헤이녹스는 내 수업을 전면 중단했고 심지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못 하게 했다.
‘아, 디칼이 기다릴 텐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은 몰래 저택 내 서재에 가려다가 들켜서 그대로 침대 위로 연행된 적도 있었다.
‘식사를 거르고 디저트를 먹으려다가 방에 찾아온 앤에게 그대로 빼앗긴 적도 있었지.’
아가씨? 하며 웃는 앤의 어딘가 섬뜩한 미소에 당황해서 그대로 파이를 내주고 말았다.
그때 난 아마도 솜사탕 씻어 먹으려다 다 녹아 버린 걸 보고 망연자실한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이래선 정말 곤란한데.’
신성력까지 발현된 마당에 신전과 프리실라의 관계를 알아보려면 한시가 급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처지인 데다, 뭐만 하려고 하면 방에 렌자드나 체드만이 찾아오는 바람에 조사는커녕 마음 편히 계획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신전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 되는데. 하루라도 빨리 꼬리를 잡아야 하는데.’
여태 헤이녹스를 둘러싼 주변을 살펴본 결과 신전과의 결탁에 가장 의심되는 인물은 황후였다.
하지만 이것조차 심증일 뿐이니 정확한 증거가 필요한데.
‘신전이라…….’
내가 신성력이 있다는 걸 신전에서 알기 전에 먼저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비밀을 밝히는 데 속도를 내야 했다.
내가 약점이라도 되었다간 헤이녹스의 발도 묶일 테니까.
탄제리크의 사람들이 더는 신전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앤은 내가 사흘이 지난 후에야 깨어났다고 했다. 그동안 탄제리크 저택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곧이라도 질식해 버릴 만큼 삭막했다고.
‘내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 탄제리크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었지.’
처음 앤의 말을 들었을 땐, 내가 속상하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애써 위로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앤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저렇게 부르지도 않았는데 방을 찾아오는 걸 보면 말이지.’
지금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원래대로라면 탄제리크 공작가는 점심시간을 앞두고 바쁘게 오전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을 시간이었다.
‘렌자드도 지금이면 검 수업이 한창이어야 할 텐데.’
도대체 왜 내 방에 있는 걸까.
“록시나, 나 들어가도 될까?”
놀랍게도, 렌자드는 내 방문 앞에서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꽤나 뻔뻔한 표정으로.
“드러와.”
나는 렌자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이 난 렌자드는 손에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또 멀 가지고 온 거야?”
내가 한숨을 쉬듯 묻자 렌자드는 관심을 보인 게 고마운지 커다란 무언가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자랑스레 말했다.
“내가 어제 거리에 나갔다가 사 온 거야.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라고!”
‘저 커다란 반달곰 인형이?’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포악한 곰 인형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렌자드는 그런 내 시선을 흥미로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들뜬 목소리로 인형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그날따라 낡은 상점 하나가 눈에 밟히는 거야. 그래서 마부한테 잠깐 멈추라고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지. 그랬더니 이게 뭐야? 너랑 똑같이 생긴 반달곰 인형이 있는 거야!”
렌자드는 아직도 그 짜릿한 순간이 잊히지 않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이건 무조건 사야 한다 싶었지.”
나는 뿌듯한 표정의 렌자드를 보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얼마 주고 샀는데?”
내 질문에 눈을 또르르 굴리던 렌자드는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치며 답했다.
“1골드! 1골드였다! 이렇게 커다란 인형인데 1골드밖에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너를 닮은 인형인데. 손님도 잘 안 오는 것 같길래 쫄쫄 굶을 가게 주인의 가족이 불쌍해서 10골드 더 주고 왔어.”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의 렌자드에 나는 이마를 턱 하고 짚었다.
“호구 쟈식…….”
내 작은 중얼거림이 렌자드는 잘 들리지 않았는지 귀에 손을 대며 물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렸어. 다시 한번…….”
“호구! 호구라구! 너 완전 바가지 쓴 거야!”
이 인형은 크기만 크지 비쌀 이유라곤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거리에 있는 상점에서 샀다고 하지 않았던가.
디칼에게서 수를 읽는 교육을 받고 나서 나는 가장 먼저 이 세계의 화폐와 그 가치에 대해 익혔다.
그런 기초적인 교육을 렌자드도 받지 않은 게 아닐 텐데. 도대체 왜?
‘귀족에게 납품하는 인형 가게도 아니고, 평민이 드나드는 가게에서 인형 하나에 1골드?’
이건 말이 안 된다. 무슨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니고 천이 부들거리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음새조차 허술하기 짝이 없잖아!’
누가 봐도 대충 꿰맨 게 분명했다. 허술한 바느질로 인형의 귀 부분은 벌써 솜이 터져 나올 준비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미쵸…….”
아무리 잘 쳐 줘도 3실버다. 그 이상 부르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만한 인형인데.
‘1골드를 불렀다고? 게다가 팁으로 10골드를 더 줘?’
완전 호구 잡힌 거다. 그 가게 주인은 졸지에 11골드나 벌어 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게 웬 횡재냐 했겠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만큼이나 사기 치기 좋은 상대가 또 없으니까.’
나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지긋한 한심함에 렌자드를 노려보았다.
내 답답하다는 눈빛을 느꼈는지, 렌자드는 위풍당당하게 폈던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구 말구 문제가 아니자나.”
“그럼 대체 뭐가…….”
“진짜 렌자드 바보구나?”
나는 허접한 인형 귀를 잡고 흔들었다.
“이것 바! 벌써 귀가 뜯어지려고 하자나. 그런데 이런 걸 11골드나 주고 샀다구? 호위가 막지도 아나써?”
“……퍼렐 경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긴 했는데…….”
“했는데?”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내가 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