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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27)화 (27/106)

<27화>

나는 지금 망할 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중이다.

‘아까도 만났으니 어떻게 대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을 고비를 넘겨야 만날 수 있는 거라면 당장 그러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작정 말을 거는 것뿐이다.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분명히.’

나에게 이 망할 힘을 준 게 신이니, 내가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해서라도 나를 보고 있을 거다.

“어이, 여신님! 어서 나오세여!”

“록시나, 이제 그만해.”

“나오시라니까여! 어쩌다 이런 힘을 줬는지는 몰라도, 적어두 왜 주셨는지는 알려 주셔야져!”

“록시나…….”

이제 렌자드는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 일어나서부터 계속 같은 말만 하고 있어. 이제 그만해.”

“그래, 이러다 목 상하겠어. 그만하고 좀 누워.”

체드만이 내 손을 토닥였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오시라구여! 뭘 말해 줘야지 힘을 쓰든 말든 하져!”

그렇게 내 목소리가 시끄러워서라도 신이 대답하게끔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데 헤이녹스가 다가와 말했다.

“그만하거라. 그렇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는 내가 쓰러진 며칠 새 마음고생 좀 했는지 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일단 멈추고 어떻게 할지 얘기해 보자꾸나.”

“……어떡, 크흠.”

쓰러져 있다가 깨자마자 큰 목소리를 내 무리가 되었는지 목이 따끔거렸다.

내가 조용히 앉아 목 언저리를 매만지자, 헤이녹스는 선반 위에 있던 물컵을 건네주었다.

내가 물을 몇 모금 꼴깍거린 후 물컵을 내려놓자, 다시 선반 위로 컵을 올려놓은 헤이녹스가 하던 말을 마저 이어 갔다.

“신성력은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증거이니 마땅히 축복받을 일이다.”

“록시나가 신성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른 귀족들도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못하겠죠?”

렌자드가 눈을 반짝거리며 묻자, 체드만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 힘은 록시나에게 오히려 독이 될 거야.”

“체드만 말이 맞다.”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며 한 말에 헤이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할 만한 일이라며! 그런데 대체 왜…….”

렌자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자, 헤이녹스가 말을 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호의적인 척 굴겠지.”

“표면적으로라면…….”

“뒤에서는 제 입맛대로 이용하기 위해 온갖 수작질을 할 게 뻔하다.”

헤이녹스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록시나에게 대신관보다도 많은 신성력이 잠재되어 있다면, 신전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신전…….”

렌자드가 이를 으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곳에 들어가 성녀라는 칭호를 받고 평생을 갇혀 있어야 하겠지.”

‘성녀라니…….’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은 탄제리크 가문에, 그것도 희대의 악녀로 이름을 날렸던 록시나 탄제리크가 성녀라고?

‘이런 내용은 없었다고…….’

원작에서 신성력은 신전이 다루는 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악녀인 록시나에게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없었고.

‘탄제리크 사람들이 바뀐 건 내 탓이라고 쳐도, 갑자기 신성력 발현이라고? 그럼 원작은?’

나는 앞으로도 내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되면 원작을 바탕으로 세운 내 계획이 다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까지가 원작이랑 같은 거야……!’

내 혼란을 모르는 헤이녹스는 계속해서 신전에 대한 경고를 이어 갔다.

“성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작자는 널리고 널렸다. 그들의 이득을 위해 신성력을 착취하겠지.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위해서란 변명으로.”

“…….”

“협력하지 않는다면 성녀를 위장한 마녀라며 제국을 동요시킬 거다.”

“신전이 록시나를 지켜 줄 리도 없고요.”

체드만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헤이녹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은, 신전은 누구도 지키지 않을 거다.”

헤이녹스의 말에 체드만도 렌자드도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거겠지. 프리실라의 죽음과 신전이 관계가 있다는 걸.

증거는 없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그 의심은 이미 사실로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그 어느 때 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타락한 개떼들만이 가득한 그곳에 록시나를 보낼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

체드만이 한숨을 쉬듯 크게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신전이 이런 거대한 신성력의 존재를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신전에서 신성력을 보유한 이를 판별할 수 있는 건 대신관뿐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구텔 왕궁에 사절단으로 가 있지.”

헤이녹스의 말에 체드만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국에는 이 기운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없군요.”

“그래.”

헤이녹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 내 신성력의 존재를 아는 자는 탄제리크 가문 사람들과 의사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야. 숨겨야 한다.”

“이번엔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체드만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관이 없는 지금 시점에 발현한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렌자드가 내 팔을 흔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떻게 하고 싶냐고?’

숨길지, 드러낼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묻지도 따지도 않고,

“숨길 꺼야.”

드러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내게 신성력이 있다는 걸 밝힌다면 귀족들이나 신전이나 황실에게 이용당할 게 뻔하니까.

‘그리고 난 제국민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 생각도 전혀 없어.’

나는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이 잔뜩이라고. 고작 성녀가 되어서 평생 신전에만 갇혀 살고 싶진 않아.

‘그러니 무조건 숨겨야 해. 나를 위해서라도.’

“다행이다…….”

나의 단호한 대답에 렌자드는 안심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성력을 자랑하고 싶다고 생떼라도 부릴 줄 알았나 보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렌자드를 바라보는 동안, 진지하게 고민하던 헤이녹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신성력을 갈무리하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하지만 누구한테…….”

신성력을 다루는 법은 신전, 그리고 신전에서 교육받은 신관이 가장 잘 안다.

‘그런데 신전은 믿을 수가 없으니.’

누구에게 부탁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헤이녹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알아서 할 테니,”

“어어……?”

“일단 자거라.”

헤이녹스의 손길에 얼떨결에 도로 침대 위에 눕게 된 나는 눈만 깜박였다.

“걱정 말고 쉬거라. 아직 열이 있는 것 같으니.”

“그래. 좀 더 자.”

“아직 안색이 안 좋아. 이불도 꼭 덮고.”

헤이녹스는 둘째 치고, 왜인지 달라진 듯한 렌자드와 체드만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베개에 머리가 닿자 몰려오는 졸음에 나는 눈을 깜박이다 금세 잠이 들었다.

* * *

록시나가 잠들고 일정하게 숨을 쉬는 것까지 확인한 헤이녹스는 방에서 나왔다.

“그 의사는 어디에 있지?”

“응접실에 계십니다.”

공손한 집사의 안내에 따라 헤이녹스는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소파에 앉아 있던 의사, 안토니오 세르보스는 헤이녹스를 발견하자마자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님.”

“앉게.”

“아, 예.”

헤이녹스는 제 앞에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어딘가 상기된 듯한 표정의 안토니오를 마주 보았다.

“그대는 실력을 갖췄음에도 욕심이 없는 의사라 하더군.”

헤이녹스가 던지듯 툭 내뱉은 말에 안토니오는 주름진 손으로 느리게 손사래를 쳤다.

“과찬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왜 그런 칭호가 붙었을 것 같나.”

헤이녹스의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도 안토니오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저 남들보다 제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뿐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미소 짓는 안토니오에 헤이녹스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기회가 많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원인이 신성력임을 알아챈 것도 신관들의 치유력을 경험한 적 있어서일 테니.”

한층 누그러진 헤이녹스의 말에 안토니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떠돌이 의사니 말입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가문에 고용되어 한곳에 정착한 이들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인이 신성력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신관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위중한 병사들을 치료하는 것을 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과거를 더듬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 중 특히 위독한 병사는 신관이 직접 치료하지요. 경증 병사들을 돌보고 있던 저는 그들이 쓰는 신성력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신성력을 보았다고.”

“예. 피를 폭포수처럼 뱉어 내던 상처를 순식간에 봉합하는 그 힘에서 저는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성력이 발현한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지요.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증명이자,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제 직업까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안토니오의 씁쓸한 표정을 보던 헤이녹스가 느리게 입을 떼며 물었다.

“그래서, 후회하나?”

“제가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 말입니까?”

“그래.”

안토니오는 갈라진 목소리로 짧게 웃으며 답했다.

“평민에게 신전은 너무도 먼 존재가 아닙니까.”

“…….”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한 이들에게 신관의 옷 끝자락 한 번 볼 기회가 있겠습니까.”

“…….”

“신전이 여신의 축복이라는 신성력으로 이 제국을 지킬 때, 저는 제가 깨우친 배움으로 제국민을 지키면 되는 일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듯 산뜻하게 답하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하군.”

헤이녹스가 힘을 풀며 소파에 기대어 앉자, 안토니오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녀님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함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어.”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헤이녹스가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닥이자, 안토니오는 좀 전의 친근한 노인의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전을 믿지 마십시오.”

헤이녹스는 안토니오의 예상치 못한 말에 느슨하게 풀었던 입가를 굳혔다.

“그대의 발언이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질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헤이녹스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안토니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단에 빠진 것처럼 보일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은 제국의 검에게 황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신전, 즉 그들이 모시는 아르타나 여신은 제국의 시초이며, 그녀의 수호를 받는 후손이 황실이기 때문이다.

신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황실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황실과 함께 이 제국을 수호하는 탄제리크 공작님께, 어쩌면 저는 미치광이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늙어서 헛소리를 하는 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안토니오는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지 알고 있음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님, 이 노인이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안토니오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눈으로 헤이녹스를 마주 보며 말했다.

“부디 공녀님을 신전에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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