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여기가 어디야.’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새하얀 공간이었다.
벽도 가구도 하나 없이 그저 하얀 ‘공간’일 뿐이었다.
“죽었나 보네.”
내가 죽은 게 맞나 보다. 이렇게 온통 하얗고 텅 빈 공간이라면 답은 천국밖에 없으니까.
“내가 천국을 올 만큼 착한 건 아닌데.”
하지만 지옥이라고 하기엔 주변이 너무 평화로웠다. 게다가 죄를 심판할 신도 없고.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왔구나.”
두리번대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몸을 돌리자 마주한 건 하얀 천으로 된 옷을 나풀거리며 다가오는 긴 머리의 여자였다.
살짝 미소 짓는 여자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세요?”
“‘누구’라고 특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그녀의 명확하지 않은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특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 인간은 아니라는 말인데……, 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으며, 인간이 아닌 존재.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요?”
“지상에 있는 자들은 그리 부르기도 하더구나.”
‘역시 신이었어.’
그녀에게 풍겨 나오는 이 기운은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헤이녹스가 사용하던 검기와도 다른,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지는 기운.
‘신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죽었다는 거겠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신은 그런 나의 생각을 읽은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이곳에 오지 못한단다.”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신은 나의 뒤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곳은 다리라고 불리는 곳이야. 허락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전이(轉移)의 공간이지.”
“전이(轉移)의…… 공간이요?”
신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죽고 나서야 만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미안하구나”
내가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꾹 누르고 있자 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신이 나를 향해 손을 뻗자, 그 빛이 천천히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따뜻해.’
어쩐지 처음 보는 이 빛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감싸는 것처럼 포근한…….’
내가 멍한 눈으로 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손을 거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모든 건 나의 과오이니,”
따듯한 눈으로 나를 마주한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부디 너를 위해, 살길 바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몸은 거대한 빛에 삼켜졌다.
빛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본 신은 무언가 말하는 듯한 입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지?’
알아보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애썼지만 쏟아지는 빛에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다시 살 수 있을까? 어디든 살아만 있다면…….’
부디 살게만 해 달라고 빌며 눈을 감는 순간, 눈이 멀 것처럼 밝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무언가 달라진 느낌에 주변을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뜨려는 그때, 귓속으로 낯익은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록시나가 깨어나지 못하는 게 벌써 사흘째다!”
듣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
‘헤이녹스!’
목소리의 주인공은 헤이녹스가 분명했다.
‘헤이녹스가 소리를 지르다니.’
그는 분명 압도적인 지배자였지만, 쉬이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경고할 뿐.
나는 헤이녹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비꼬는 모습은 보았어도, 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의 큰 목소리가 낯설었다.
‘걱정 많이 했겠지.’
나에게 신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고 하니.
내가 신을 만나기 직전 탄제리크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사흘이나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아마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이제 일어나야지.’
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달리, 갑작스레 엄청난 양의 빛을 삼켜 버린 몸은 축 늘어져 도저히 움직이지를 않았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내가 눈꺼풀이라도 뜨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헤이녹스의 감정은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제국 최고 명의라는 것도 별거 없군. 사흘째 제대로 된 진찰조차 하지 못하니. 명의라는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야.”
“하, 하오나 공작 각하. 지금 공녀님의 몸 상태는 어떠한 역병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기껏 쓸모없는 주치의 대신 자네를 데려왔건만! 가십거리를 부풀리고 과장하는 것이 일상인 이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괜한 사람 잡았다가 안 좋은 이미지라도 생기면 큰일인데. 더 이상의 헤이녹스의 폭언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다.
내가 식은땀까지 흘려 가며 눈꺼풀을 움쩍달싹하고 있을 때, 반대쪽 손으로 작은 손길이 느껴졌다.
“록시나…….”
그 땀이 가득한 작은 손은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좀 일어나 봐. 응?”
작은 목소리는 떨리며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아직 인형도 못 줬는데…… 너 주려고 직접 가서 산 거란 말이야…….”
‘렌자드?’
울먹이고 있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 여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렌자드가 분명했다.
‘렌자드……?’
렌자드가 저렇게 서글픈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걱정을 했다지만, 울먹이기까지 한다고? 그것도 나 때문에?
‘왜…… 대체…….’
“좀 일어나 봐…… 이렇게 누워 있는 거, 자꾸 엄마 생각나서 싫어. 저번처럼 때려도 되니까 일어나기만 해…….”
이윽고 손가락에는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정말 진심이구나. 나한테 미안하다는 것도, 나를 걱정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렌자드가 프리실라까지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눈 좀 떠져라, 제발……!’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탄제리크 사람들은 의사를 더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택에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병명을 밝혀내야만 할 거야.”
헤이녹스가 매서운 눈빛으로 의사를 노려보았다.
“록시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당장 너부터 죽이겠다.”
진찰하는 의사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이녹스는 견딜 수 없는 냉기를 흩뿌리며 말했다.
“체드만, 검을 준비해라.”
“예, 아버지.”
살며시 뜬 눈동자로 핏발 선 채 말하는 헤이녹스와 검을 가지러 나가는 체드만의 뒷모습이 차례로 담겼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는 내 맥을 잡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뭐지? 왜 진찰을 멈춰. 설마 못하겠나?”
헤이녹스가 눈을 부라리자 의사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곧 있으면 찾아낼 수 있을……!”
“끌어내.”
헤이녹스는 매정하게 의사를 내쳤다.
“공작님, 한 번만 더 기회를…… 기회를 주시면……!”
다급하게 소리치는 의사가 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이가 든 의사가 새로 들어왔다.
‘의사가 또 있어?’
헤이녹스는 방에 들어와 막 진찰 도구를 꺼낸 의사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원인을 밝히지 못한다면 자네도 끌려간 저 무능한 자들처럼 될 것이다.”
그 살기 넘치는 목소리에 의사는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진찰 도구도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검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온 체드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의사는 의지와 반해 잘게 떨리는 손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건 병이 아닙니다.”
오라버니들의 매서운 눈빛과 헤이녹스의 협박 속에서 의사가 손을 벌벌 떨며 진찰한 내 병명은…….
“신성력이 원인입니다.”
신성력 과잉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성녀도, 여자주인공도 아닌 악녀였으니까!
그런 내가 신성력이라고? 이건 그냥 원작이 달라진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정말 말두 안 대!”
나는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록시나!”
“깨어났구나!”
“벌떡 일어나면 안 돼!”
나의 갑작스러운 기상에 놀라 소리치는 가족들을 두고, 진찰한 의사를 다급하게 잡았다.
“다시! 다시 진찰해 보세여!”
“고, 공녀님…….”
의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먼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여! 다시 진찰해 보세여. 다시 하면, 분명 다른 결과가 나올 거예여. 그 왜, 감기라든지 몸살이라든지…….”
“공녀님.”
내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는, 이내 정신을 차려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제 30년 의사 경력을 걸고 확신합니다.”
의사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못 박듯 말했다.
“공녀님이 아프신 이유는, 신성력 때문이 맞습니다.”
“…….”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생기면 종종 마력이나 신성력이 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건 정말…… 제가 살면서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거대한 힘입니다. 어쩌면 대신관의 그것을 능가할지도 모르겠군요.”
의사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아르타나 여신님께서 주신 힘이 틀림없습니다.”
“아…….”
여러분,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네? 아무것도 안 들리신다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시겠다고요?
뭐긴 뭐야,
‘내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지는 소리지.’
“하하하!”
하하하하하!
“록시나…….”
렌자드가 걱정되는 듯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신성력…… 내게 신성력이라니…….’
프리실라의 죽음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는 신전을 견제하는 것만으로 모자란 이 상황에.
‘신성력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