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서늘한 기운이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아.’
헤이녹스는 신을 그냥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신을 증오하는 거야.’
자신의 아내를 앗아 간,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위험해.’
제국은 초대 황제와 아르타나 여신이 함께 세운 나라이기에 여신은 제국민의 정신적 지주,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하지만 제국군을 이끄는 탄제리크의 가주가 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야.’
흑마법이나 주술에 걸려 눈이 흐려졌다거나, 제국을 건국한 황가의 당위성을 의심하는 것이라 몰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곧 반역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겠지.
‘혹시 누가 들었으면 어떻게 하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나와 헤이녹스의 대화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소리를 차단했구나.’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소드마스터는 검기를 사용해 공간을 왜곡시킬 수 있다.
아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비틀어 다른 사용인들이 듣지 못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서늘한 기운은 검기를 사용할 때 나타나니까.’
나는 헤이녹스가 신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듣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이녹스는 그 한숨 소리를 듣더니, 나를 다시 안아 올리고 물었다.
“힘든가?”
“아, 아녀! 저는 괜찮아여.”
‘그러니 다시 내려 줘!’
하지만 헤이녹스는 내 간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나를 더 단단하게 잡았다.
“저 정말루 괜찮운데…….”
“아직도 몸이 떨리는구나.”
“아…….”
아까 전, 헤이녹스가 뿌린 차가운 기운이 이 작은 몸에는 꽤나 결정적이었는지 아직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안겨 가거라.”
나는 내 다리와 등을 완전히 고정해 안은 헤이녹스의 단호함에 저항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네에…….”
* * *
“오셨습니까.”
황궁의 마구간에서 마차를 세우고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마차를 끌고 서둘러 나와 헤이녹스에게로 다가왔다.
마부가 문을 열자, 헤이녹스가 나를 들어 마차에 앉혔을 때였다.
“공작님.”
‘누구지?’
내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헤이녹스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안에 있거라.”
그러고는 마차의 문을 닫고 뒤돌았다.
‘쳇. 매정하긴.’
나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했다. 마차 안에서는 헤이녹스의 몸에 가려 밖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창문 밖으로 목을 쭉 빼며 상대를 확인했다.
“케드릭 브루안트.”
“얼마 전 수도로 오셨다가 금방 내려가셨다기에 아쉬웠는데, 이리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헤이녹스가 케드릭 브루안트라고 부른 사람은 갈색 머리에 초록 눈을 가진 무척이나 선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연회 때 보지 못한 헤이녹스를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운 듯 보였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헤이녹스는 언제나와 같이 차가운 분위기로 케드릭을 바라봤다.
‘하여간.’
단 요만큼도 틈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혀를 차며 안쓰럽다는 눈으로 케드릭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황궁에 공작님께서 오셨다기에.”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민망해하는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능청스럽다고나 할까?’
헤이녹스가 유순히 굴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 수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찾아뵈려 했었으나…… 공작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후계 문제 말인가?”
“예. 그 일 때문에 조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케드릭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금방 본래의 느슨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헤이녹스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던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마차에 계신 저분이 공녀님이십니까?”
“앗……!”
내가 황급히 몸을 바로 하려 했으나, 무거운 머리 탓에 앞으로 기우뚱했다.
“쯧.”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나를 잡은 헤이녹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안에 있으라 했거늘.”
“헤헤…….”
나는 민망함에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헤이녹스에게 안긴 나를 보던 케드릭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공녀님께선……. 공작님과 많이 닮으셨군요.”
그러더니 내 눈동자를 바라보곤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동자까지 정말 똑같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알아.’
프리실라를 완전히 빼다 박은 체드만과 프리실라와 헤이녹스가 반반씩 섞인 렌자드와는 달리,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프리실라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도 프리실라랑 안 닮은 거 안다고.’
외양이 귀엽고 깜찍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프리실라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과 새파란 눈동자,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그 어디에서도 부드럽고 온화한 프리실라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라도 금발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목구비까지 공작과 빼닮아 있었다.
‘내가 프리실라랑 닮았다면, 프리실라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조금은 덜 괴롭지 않았을까.’
여전히 프리실라를 그리워하는 사용인들을 떠올린 나는, 문득 드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저두 알아여…… 엄마랑 하나두 안 닮은 고…….”
‘헙!’
생각만 했던 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가 미쳤지!’
헤이녹스 앞에서 프리실라 얘기를 꺼내더니 정신이 잠깐 나갔었나 보다.
내가 불안함에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자, 이를 알아챈 케드릭이 당황한 듯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저 공작님과 많이 닮으셨구나, 싶어…….”
“그럼 딸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간 조용히 있던 헤이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식은 후작과 닮지 않았나 보군.”
헤이녹스의 날 선 반응에 케드릭이 쩔쩔매며 해명했다.
“공작님. 저는 그저 두 분이 보기 좋다는 의미로…….”
케드릭이 저리 안쓰러운 모습으로 변명하는 게 전부 내 말실수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내가 괜히 프리실라 얘기를 꺼내 가지고…….’
내 잘못이라면 내가 수습해야 했다. 나는 떨리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공쟉님.”
내 작은 목소리에 헤이녹스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케드릭은 잘모탄 거 업써여. 졔가, 먼저 잘못해쓰니까, 그로니까 저를 혼내세여.”
눈을 꼭 감고 헤이녹스의 호통을 기다리는데, 그에게선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뭘 잘못했지?”
‘으응?’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고 있자, 헤이녹스가 재차 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느냐 물었다.”
“어…….”
잘못한 거라면…….
“어, 엄마 얘기를 한 거여……?”
내 조심스러운 대답에 헤이녹스의 표정은 한층 더 사나워졌다.
‘이, 이게 아닌가?’
나는 황급히 내가 한 잘못을 되짚어 봤다.
‘프리실라를 언급하고, 엄마라고 불렀…… 이게 문제였구나!’
헤이녹스는 내가 프리실라를 엄마라고 부른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게 분명하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헤이녹스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잃게 한 장본인이 엄마라는 호칭을 쓰는 게 염치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분명 프리실라는 나의 엄마가 맞았지만, 그녀가 내 생물학적 어머니인 것과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건 별개의 문제다.
‘그래.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사과하자.’
나는 애써 억울함을 눌러내며 말했다.
“엄마라구 불러서 그래여……?”
그러자 헤이녹스가 나를 지탱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제송해여, 제가 함부로…….”
“거기까지 하지.”
헤이녹스의 단호한 음성에 나는 퍼뜩 입을 다물었다.
“브루안트 영식. 이제 가 보아야 할 것 같군.”
그러자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헤이녹스를 바라보던 케드릭이 정신이 돌아온 듯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예! 저도 할 일을 마저 하러 가야겠습니다.”
그러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공녀님.”
흠잡을 데 없는 인사 예법을 보인 후, 케드릭은 자리를 떠났다.
“…….”
케드릭이 떠난 이후 나와 헤이녹스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진짜 입이 방정이지!’
내 부주의한 주둥아리를 속으로 혼내고 있는데, 고요한 적막을 뚫고 헤이녹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록시나.”
“녜…….”
‘뭐라고 하려나.’
프리실라를 엄마로 부른 것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른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헤이녹스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가족사를 함부로 남 앞에서 떠벌리다니.
‘케드릭이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면서!’
여태 탄제리크를 두고 떠도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헤이녹스와 친밀해 보이는 연극을 했으면서도, 마지막에 방심한 거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자.’
내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헤이녹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는 잘못한 거 없다.”
“녜……?”
내가 멍하니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창밖을 보던 헤이녹스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는 오늘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했다면 그건,”
“…….”
“아마도 내가 무능력한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