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원작이었어.’
황제의 말대로 미켄 헤디욤은 황실과 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조부 때부터 헤디욤 가문은 황제를 모셔 왔으니까.
‘지금으로써는 황실에 가장 오래 머문 사용인이기도 하지.’
단순히 황실에서 오래 일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만큼 오래 버텼다는 거지.’
본래 황실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면, 사용인은 전부 갈아엎게 되어 있다.
원래 있던 사용인을 계속 고용하는 게 황궁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좋겠지만, 선대 황제의 끄나풀이 바뀐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디욤 가문은 무려 3대째 황실 일원의 최측근으로 일하고 있으니.’
그간 헤디욤 가문이 줄타기를 얼마나 잘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원작에서도 귀족들이 헤디욤 가문만 따라가면 반은 간다는 말을 했었지.’
하지만 그런 존재감에 비해 출현은 잦지 않아 잊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미켄 헤디욤이 황후 줄을 잡은 것 같은데.’
지금 헤이녹스와 황제가 하는 대화를 보면, 이미 황후는 탄제리크에 적대감을 비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 망할.’
우리 가문 벌써 망루트 타고 있는 거니?
‘나 지금…….’
떨고 있니?
‘아냐. 일단 침착하고 생각을 좀 해 보자.’
원작에서 황후가 탄제리크에 가장 큰 타격을 줬던 사건.
그건…….
‘록시나가 헤이녹스의 계획을 황후에게 말해 버렸던 일이지…….’
록시나가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동안 헤이녹스는 그걸 막지 않았다.
모든 시선을 록시나에게 돌린 후 황후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걸 록시나가 황후에게 불어 버렸으니.’
가족에 대한 애착이 없던 록시나는 황태자와 함께할 거란 생각에 황후에게 힘을 보탰지만, 결과적으로 버림받았다.
‘잠깐, 그럼 내가 배신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원래부터 탄제리크가는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가문의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야.’
언젠가 둘은 충돌했을 것이고, 그걸 촉진한 게 록시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 계획이 완전히 달라졌지.’
황후의 패였던 록시나는 이제 탄제리크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거니까.
그렇다면 황제를 움직여 황후를 치는 게 안전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헤이녹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내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속을 차분히 다스리고 있는 사이, 황제와 헤이녹스가 대화를 이어 갔다.
“황후는 만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짐도 그러려던 참이네. 황후가 단순히 같이 식사나 하자고 약속을 잡는 사람은 아니니.”
“아카린즈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 망할 가문 때문에 짐이 편히 쉬는 날이 없네.”
황제가 한숨을 쉬며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아카린즈 백작이 멋모르고 날뛰고 있네. 정기회의 때마다 그 뻔뻔한 낯짝이 어찌나 꼴 보기가 싫던지.”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겠지요. 친정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제국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친정의 금고나 채우고 있다니…….”
황제의 얼굴은 척 보기에도 피곤해 보였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라는 사람이 눈 아래 다크서클까지 달고 있으니까.
‘좀 안타깝긴 하지만.’
다 자기 업보다. 아카린즈가의 백작 영애를 황후 자리에 앉힌 것도 결국 황제가 아닌가.
“황후가 어떤 입장을 보이든 폐하께선 중립을 유지하시면 됩니다.”
“그러지.”
황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녹스가 나를 순식간에 안아 들었다.
“앗……!”
깜짝 놀란 내 비명에도 헤이녹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에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럼 서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헤이녹스는 다시 짧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알현실을 나왔다.
* * *
“공쟉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헤이녹스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저어, 이제 내려 주셔두 돼여…….”
‘아오, 불편해.’
황궁의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나와 헤이녹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늘어났다.
다들 애써 못 본 척 눈을 피하고 있지만, 어쩌다 마주치면 당황한 표정이 훤히 보였다.
‘이제 황제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야.’
헤이녹스가 황제 앞에서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그와 나의 친근감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불편한가?”
“아녀, 그런 거눈 아닌데…….”
솔직히 헤이녹스한테 안겨 있는 건 편했다.
오랫동안 운동한 기사라 그런지 헤이녹스의 팔뚝은 엄청 단단했다. 그런 근육이 나를 받치고 있으니 안정적일 수밖에.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붙어 있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비록 황궁이 넓고, 마차는 한참 더 떨어져 있겠지만 이렇게 불편한 심정으로 안겨서 가느니, 다리가 좀 아프더라도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구냥…… 걷고 시퍼서여.”
그러자 헤이녹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나를 내려주었다.
“편한 대로 하거라.”
‘휴, 다행.’
또 누가 황제한테 일러바칠지 모르니까 마차 탈 때까지 참으라고 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헤이녹스는 큰 반발 없이 내 말대로 해 주었다.
“대신 손을 잡거라.”
“음…….”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자, 헤이녹스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손은 잡아야 한다.”
“녜에…….”
‘알겠으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이미 헤이녹스가 한 발 물러 줬기 때문에, 나도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되지.’
나는 순순히 헤이녹스의 손을 잡고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어디를 구경했지?”
헤이녹스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이것도 사용인들 시선을 의식하고 묻는 거겠지?’
헤이녹스는 이런 사소한 걸 물어볼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음……. 처음에는 도서관에 가써여.”
“읽고 싶은 책이 있었나?”
“네. 읽지는 못 햇지만여.”
내가 아쉬운 티를 내자, 헤이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찾지 못한 건가?”
“녜. 아무래두 금서인가 바여.”
내가 금서라는 단어를 꺼내자, 내 손을 쥐고 있는 헤이녹스의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무슨 책을 찾았던 거지?”
“아르타나 여신에 대해서여.”
“아르타나 여신?”
헤이녹스는 잠시 멈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디칼이 말해 줬는데여.”
‘왜 저러지?’
헤이녹스의 표정은 마치 골치 아픈 존재를 만난 것처럼 찡그려져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데 되게 의외네.’
내가 의아해하며 헤이녹스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곧 본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
“음…….”
사실 디칼이 여신에 대해 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초대 황제와 함께 이 제국을 건설했다 정도?
‘디칼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
여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소문에 불과하고 정리된 유일한 책은 황실도서관에 있으니 찾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구냥……. 아르타나 여신이 황제를 도왔다구 들었써여.”
“그게 단가?”
“네에.”
‘원래 헤이녹스는 여신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분명 헤이녹스는 신 같은 거 믿지 않는다고 원작에서 말했던 것 같은데…….
‘아.’
잠시 잊고 있었다. 헤이녹스가 왜 여신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부정하게 되었는지.
‘프리실라.’
신전을 위해 매년 기부하던 프리실라가 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신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문득 지금 신에 대한 헤이녹스의 반응이 너무 궁금했다.
“신을…… 믿으세여?”
“신을 믿는다라…….”
나의 말을 곱씹던 헤이녹스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나를 도왔을 거다.”
‘역시…….’
프리실라를 죽게 내버려 둔 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걸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
“…….”
“설령 그게 신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