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미쳤나.’
내가 말하고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요정이나 천사도 아니고 용사가 뭐야, 용사가…….’
다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다 보니 헛소리가 나온 모양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이 너무 인상 깊었나…….’
며칠 전 잠이 안 와서 앤이 책을 한 권 읽어 줬는데, 그게 용사와 이웃 나라 공주님의 사랑 이야기였다.
‘창피하네…….’
아니나 다를까 로이스터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라고? 네가?”
‘그래, 너도 어이가 없지?’
아무래도 몸이 어려지면서 정신연령까지 어려진 게 틀림없다.
“용사가 왜…… 드레스를 입고 있어?”
이 상황에서 의문을 갖는 게 고작 드레스라니.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애는 애인 모양이다. 하지만 덕분에 변명하기가 수월해졌다.
“용사는 드레스 입으면 안 대?”
“어?”
로이스터는 잠시 눈을 껌벅였다.
“그건 아닌데…….”
“그러니까! 용사가 드레스 입을 수도 이찌!”
‘용사가 갑옷만 입으란 법 있나!’
내가 콧김을 내뿜으며 말하자, 로이스터가 손사래를 쳤다.
“나, 나는 그냥 궁금해서!”
“흠…….”
로이스터는 이제 얼굴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용사는 처음 봐서 그런 거야…….”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로이스터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귀…… 귀여워!’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보는 로이스터는 정말 귀여웠다.
“그럴 수도 있지, 머.”
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로이스터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사과했자나.”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로이스터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었다.
“다행이다…….”
하얀 얼굴에 붉은 홍조가 있는 채 웃는 로이스터는 이제야 제 또래다워 보였다.
탄제리크가 사람들과 플레리같이 나이답지 않은 사람만 보다가 순수한 아이를 보니 절로 힘이 풀렸다.
‘힐링된다…….’
여기가 천국이야.
“그럼…… 용사님이라고 부르면 돼?”
로이스터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보며 물었다.
“어, 으응.”
이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바라보는 로이스터를 속인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나를 용사라고 생각하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을 거다.
합리적인 이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용사님은 길을 잃은 거야?”
“음……. 그런 셈이지?”
“어디에 가려고 했는데?”
“그, 그건…….”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충 얼버무렸다.
“으응, 그거는 내가 할 일이 이써서…….”
“할 일?”
로이스터가 궁금한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부담스러워…….’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으면 뭐라 답하기가 참 어렵다. 순수한 호기심에 거짓으로 답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도 크고.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순간,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어디 계십니까?”
“앗!”
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려서 당황한 시종은 정원 안까지 들어와 찾고 있었다.
‘그런데 공녀라니!’
내가 탄제리크 공작의 딸이니 당연한 호칭이었지만, 지금은 안 될 말이다.
‘정체가 탄로 나겠어.’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나, 나는 이제 가야게써.”
“벌써?”
로이스터가 아쉽다는 듯 물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제 가야 대.”
시종이 있는 쪽을 흘깃대며 몸을 틀어 달리려고 하는데,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또…… 올 거지?”
로이스터가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한 변명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가까워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황후의 눈 밖에 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할 수 없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딱 잘라 말해야 하는데.’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는 로이스터에게 단호한 거절을 말할 수가 없었다.
“못 오는구나…….”
“아니야.”
결국 잔뜩 풀이 죽은 모습에 나는 빈말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볼 수 이쓸 거야.”
“정말……?”
로이스터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못 본다고 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날 수 이쓸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게찌만.”
그러자 로이스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시 볼 수 있구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로이스터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 모습을 보자 몰려오는 죄책감에 나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또 보자!”
등 뒤로 들려오는 로이스터의 밝은 목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똑똑-
황제가 헤이녹스를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라.”
황제의 허락과 동시에 거대한 문이 열렸다.
“록시나.”
헤이녹스는 시종의 손을 잡고 들어온 나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구경이 끝난 것이냐.”
“네에.”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자, 헤이녹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궁은 꽤 볼만한 곳이지.”
“마자여.”
‘볼거리가 많았지.’
황후의 온통 빨간 콘테나 정원과 로이스터가 있는 작은 집, 거대한 미로 같은 도서관까지.
‘크긴 엄청 크다니까.’
연회에서도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은 없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로이스터가 내가 이곳에서 만난 첫 또래였다.
‘그러고 보니 내 또래를 만난 건 처음이네. 생각보다 즐거웠어.’
내 나이대의 아이를 만난다면 시끄럽게 울거나 떼쓰기만 해서 함께 있기 힘들 줄 알았는데, 로이스터는 철이 빨리 들어서인지 말도 통해 꽤 잘 맞았다.
물론 그 대부분의 주제가 용사에 관련된 건 어쩔 수 없나 싶었지만.
“재미있었써여!”
‘이 정도면 합격이지.’
내가 헤이녹스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어 보이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손을 내려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시종이 안내를 잘해 준 모양이군.”
나와 헤이녹스를 바라보던 황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공녀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혹시 실망했을까 걱정했지 뭔가.”
황제가 장난스럽게 말을 잇자, 나는 도리질 치며 답했다.
“아니에여. 너무 조아써여!”
‘물론 금서 구역에는 접근도 못 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가지 말라는데 갔다가 목숨도 건지지 못할 바에는 안 가는 게 낫다.
‘언젠가 갈 수 있겠지.’
내가 몇 년이 지나더라도 꼭 가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문밖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급히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들어오거라.”
황제의 허락에 들어온 시종이 나와 헤이녹스를 힐끔거렸으나, 황제는 그냥 말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시종이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 하십니다.”
“황후가?”
“예.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뭐지?’
나는 황제의 반응에 의아했다.
분명 황후와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부부로서 어느 정도 친밀감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건 마치……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인데?’
황제의 얼굴은 시종이 전한 말과 동시에 싹 굳어 버렸다.
‘그리고 저 눈빛.’
멀리서 보면 잘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니 황제의 눈동자는 한쪽으로 고정된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굴 보는 거야.’
내가 황제의 시선을 따라가자 마주한 건 헤이녹스였다.
‘설마 헤이녹스의 눈치를 보는 건가?’
물론 탄제리크가 황가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긴 했지만, 황제가 이렇게 눈치를 볼 정도인 줄은 몰랐다.
‘도대체 제국의 통치자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황후가 먼저 만나자는 말도 다 하는군.”
황제는 허탈한 듯 손바닥으로 건조한 눈가를 쓸었다.
“일단 나가 보게.”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젓자, 시종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알현실 밖으로 물러났다.
“황후 폐하께서 조급하셨나 봅니다.”
헤이녹스가 천천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새 제가 폐하를 알현한 사실이 귀에 들어간 것 같군요.”
“황제궁에도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보군.”
“마차를 맞이한 것이 황후의 수족 아닙니까.”
헤이녹스와 내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연회 때와 같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그럼 그 사람이 황후의 수족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면 헤이녹스가 그 할아버지에게 유난히 예민하긴 했다.
‘헤이녹스가 좀 까칠하긴 해도 인성 파탄자는 아니란 말이야.’
만약 헤이녹스가 시도 때도 없이 화내고 뒤엎는 성격이었다면 지금 탄제리크가에 남아 있는 사용인은 하나도 없을 거다.
‘하지만 탄제리크 공작가에는 가문에 충성하는 사용인들이 많이 있지.’
게다가 탄제리크가에 속해 있는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입이 무거웠다.
‘저번에 내가 나았다는 소문의 출처도 공작가를 드나들던 상인이 퍼뜨린 일이었으니까.’
외부와 결탁하거나 가문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헤이녹스는 사용인들을 철저히 보호했다.
헤이녹스는 폭군이 아니었다.
‘조금 까칠하긴 하지만.’
그래서 연회 때 나도 헤이녹스의 무례함에 당황한 거다.
그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될 정도의 권력이 있었지만, 그걸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할아버지가 황후의 수족이라면 말이 또 달라지지.’
황후의 친정인 아카린즈 가문은 우리 탄제리크 가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제국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탄제리크를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쳐도 그 정도가 과했다.
그래서 제 가문의 사람을 황후로 들어앉히고 황가에 입김을 불어넣었지.
더불어 탄제리크와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자 하는 황제와 의견이 종종 충돌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를 좋아하는 록시나를 이용하기도 했고.
‘하.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그 사이, 헤이녹스와 황제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망할 노인네가 일러바쳤군.”
황제는 골치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총괄 시종장을 포섭했으니, 황후가 황궁 내에서의 입지를 넓히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미켄 헤디욤. 그자는 황궁에서 오래도 버티는군. 이곳에 아주 뼈라도 묻어 버릴 예정인가 보지?”
황제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헤이녹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조상부터 대대로 시종장 자리를 이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미켄 헤디욤의 조부가 전전대 황제의 친한 벗이었지 않나.”
‘미켄 헤디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다. 미켄 헤디욤, 미켄 헤디욤…….
‘대체 어디서 들었지?’
앤이 얘기한 것도 아니고, 헤이녹스가 그를 언급한 걸 듣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그럼 도대체 언제…….
‘아!’
생각났다. 언제 미켄 헤디욤이라는 이름을 보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