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알현실 내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황제는 공작의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모습에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마른세수만 반복했다.
한참 고민하던 황제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듯 강경한 헤이녹스에 한숨 쉬듯 답했다.
“……알겠네. 짐은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어.”
황제는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어떤 입장을 보일지조차 알 수 없으니 대비할 수도 없네.”
“폐하께서 무언가를 준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헤이녹스는 주위를 압도하는 기운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어떤 입장을 내놓으시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 * *
알현실을 나오자 헤이녹스의 말대로 밖에는 시종이 있었다.
황궁의 역사부터 읊으며 안내하겠다고 나서는 그에게 나는 단호하게 목적지를 말했다.
“도서관이여.”
아예 출입 자체를 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시종은 별말 없이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다주었다.
“이쪽에 있는 책은 자유롭게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저 안쪽은 금서가 있는 곳으로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으니 가시면 안 돼요. 조금만 스쳐도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웅.”
나는 시종에게 신뢰의 윙크를 짧게 날려 준 뒤 책장으로 걸어갔다.
“와아…….”
확실히 책이 많기는 했다. 높은 도서관의 천장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신에 대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제국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훑어볼까.
‘제국과 번영’, ‘제국의 탄생’, ‘제국의 황제들’……
차근차근 살펴보았지만 여신의 ‘여’ 자도 찾을 수 없었다.
“머야!”
이 방대한 책을 전부 뒤져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제목이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디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초대 황제가 집필한 책 한 권이 전부라고 했다. 그리고 그게 황실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아무나 볼 수 없다는 게 금서로 분류되어서였나?’
그렇다고 이대로 가긴 좀 아쉬운데.
아쉬움에 머릿속에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금서…… 가 볼까?’
시종이 했던 말이 계속 걸리긴 했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아침잠까지 줄여 가며 황궁까지 따라온 보람이 없다.
‘그치만…… 결계가 쳐져 있다면 들어갈 수도 없을 텐데…….’
심지어 조금만 스쳐도 크게 다친다고 했다.
‘그래. 궁금증보다 목숨이 먼저지.’
일단 살아는 있어야 궁금증을 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혹시 여신과 프리실라의 죽음이 관련 있을까 싶었는데.’
신전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면 틀림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프리실라의 죽음은 신전의 방관 때문이었으니까.
여전히 물증은 없지만 아르타나 여신의 힘을 사용하는 신전이니 어떤 신탁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신탁의 내용이 프리실라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면…….’
그렇다면 프리실라의 죽음은 신전뿐 아니라 여신 그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탄제리크가의 몰락을 바라는 그 배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비밀리에 신탁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
황제가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처럼 신전 역시 대대로 신탁을 기록해 왔을 거다. 그리고 그 내용은 황실 서재에도 보관되어 있겠지.
‘신전의 허락 없이는 황실의 일원조차 함부로 열어볼 수 없는 내용.’
그 모든 것이 지금 여신의 책이 금서로 분류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금서의 구역에 들어가는 것도, 그것을 열람하는 것도 불가능한 처지란 말이지.’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선 여신의 책이 금서의 구역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걸로 만족해야겠어.
나는 소중한 목숨을 위해 무모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확인하기로 하자.’
나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종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 공녀님.”
“이제 다룬 데 가고 시퍼.”
시종은 어차피 어린 내가 도서관에 오래 있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물음 없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원으로 가시겠어요?”
“웅.”
나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알현궁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는 콘테나 정원입니다. 황후께서 직접 꽃을 고르고 관리하셔서 무척 아름답습니다.”
‘황후가 직접 관리한다고?’
확실히 콘테나 정원은 아름다웠다. 장미와 튤립, 붉은 데이지에서 풍기는 향기도 무척 인상 깊었고.
“혼쟈 보구 시픈데?”
원작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황후의 행보가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에 일단 시종부터 보내고 마저 둘러보기로 했다.
“그럼 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구경이 끝나면 말씀해 주세요.”
“웅!”
나는 시종을 보내고 홀로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러볼수록 이상한 점이 있었다.
‘꽃이 다 붉은색이야.’
정원에 심어져 있는 꽃은 모두 붉거나 그 비슷한 계열뿐이었다.
‘붉은색을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었나? 황후 취향 참 독특하네.’
이 커다란 정원을 죄다 붉은색으로 채우고 관리하다니. 황후도 한 고집 하는 게 분명했다.
“아, 눈 아퍼.”
채도 높은 꽃만 보고 있으니 눈이 점점 뻐근해져 왔다. 설상가상으로 한참이나 걸어도 앉을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디 쉴 데가 없나?’
정원 주제에 크기는 더럽게 크다며 헉헉대고 있을 때였다.
‘저게 뭐지?’
눈앞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옅은 보라색과 파란색의 꽃들, 그리고 푸른색의 잎들이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눈이 좀 풀리네.’
힘을 주고 있던 눈이 보기만 해도 편해지는 색감에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조금 더 다가가자, 꽃과 풀들 사이로 작고 지어진 지 좀 된 것 같은 집 하나가 보였다.
‘사용인들이 지내는 숙소인가? 인기척이 안 들리는 걸 보면 버려진 곳일 수도 있고.’
황후의 정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엄청난 인물일지도.
내가 꽃 사이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어 누가 없는지 확인할 때였다.
“넌 누구지?”
“앗……!”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바닥을 짚은 손바닥은 까져 있었다.
나는 따가움에 고개를 번쩍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아…….”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을 보고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햇빛과 닿아 반짝이는 은발과 공들여 깎아 낸 루비가 박힌 것처럼 붉은 눈.
이 제국에 저런 외모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플레리 아카린즈의 구애를 거절한 탓에 겁탈하려 했다는 오명을 쓰고 평생 탑에 갇혀 살 운명인, 버림받은 비운의 황자.
‘로이스터 필리티움.’
대 루엔트 제국의 2황자였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로이스터는 내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어봤을 텐데.”
“아……!”
나는 그제야 내가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구냥 여기에 집이 있길래. 누구 집인가 하구…….”
“들어오려고 했어?”
“아니! 절때로. 사람이 업쓰면 구냥 돌아가려구 해써.”
하지만 로이스터는 여전히 나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원을 구경하다가 길을 잃어써.”
“콘테나 정원…….”
로이스터는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어째…… 더 경계가 심해진 것 같은데?’
호기심에 남의 집 앞을 기웃댄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이렇게 오해를 살 줄 알았다면 절대 어슬렁대지 않았을 거다.
‘일단 오해를 푸는 게 우선이다.’
비록 로이스터는 힘없고 잊혀진 2황자라 후일을 위한 도움은 없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일딴 진정을 해 바.”
“……내가 왜.”
개뿔. 들을 리가 없지.
원작에서도 로이스터는 경계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 다행인 건가.’
그가 본격적으로 사람을 불신하기 시작한 건 그의 어머니, 나오미가 죽은 이후부터니까.
‘그래. 아직은 괜찮아.’
나는 로이스터에게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해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나는 여기가 네 집인지 정말 몰라써.”
“……거짓말.”
“진짜루. 네가 잇는 줄 아랐쓰면 근처에두 오지 않았을 거야!”
‘이 정도면 오해가 풀렸겠지?’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이스터를 바라보았다.
‘어?’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로이스터의 표정은 전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너도…… 똑같구나.”
‘뭔 소리야, 저게?’
“너도 내가 싫은 거지?”
“그게 무슨…….”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뭐?”
내가 당황하는 사이, 로이스터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할 테니까.”
“잠깐만.”
나는 다급하게 로이스터를 붙잡으며 물었다.
“왜 모른 척한다는 건데?”
내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로이스터는 입술을 꾹 누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 있는 거…… 황후 폐하가 안 좋아하실 테니까.”
‘아.’
이제 기억났다. 원작에서 황후가 얼마나 로이스터를 싫어했었는지.
후작 영애로서 부족함 없이 자랐던 그녀는 황제를 사랑한 것이 아님에도 큰 어려움 없이 황후가 되었다.
모든 영애들이 그녀를 선망했고, 황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관심을 즐기기도 했고.
‘하지만 문제는 황제였지.’
어느 날 황제가 떠돌이 집시를 궁으로 데려오면서 황후의 완벽한 인생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냥 집시만 데려왔다면 황후는 속이 좀 쓰리고 말았을 테지만.’
문제는 그 집시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거다. 그것도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남자아이가.
‘그게 로이스터고.’
제국법상 황제의 피를 이은 남자아이는 태생이 어떻든 후계자 자격이 주어진다. 설령 그 아이의 친모가 떠돌이에 출신조차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유일한 후계자로서 다음 대 황제가 될 거라 생각한 황후는 어긋난 계획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온전히 로이스터와 그의 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향했다.
‘황후가 항상 견제했을 테니 이렇게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다시 보니 로이스터의 표정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실망한 듯한…….
‘아!’
로이스터는 그가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라는 나의 말을 듣자 눈에 띄게 표정이 안 좋아졌다.
사람이 사는 곳인 줄 알았다면 함부로 기웃대지 않았을 거란 말을 로이스터는 이곳에 그가 있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안 왔을 거라 이해한 게 분명했다.
‘내가 황후의 정원에서 길을 잃었다고 했으니 그녀와 친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그건 오해다.
‘난 황후랑 대화해 본 적도 없는걸!’
헤이녹스의 승전 기념 연회에서 먼발치에서나마 보긴 했지만, 황후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랑 황후는 아직 초면도 아닌 사이라는 거지!’
황당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스터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저렇게 계속 땅굴 파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간 황후랑 같은 편이라고 괜한 오해 받기 딱이니까.
‘그건 싫어.’
나는 이제는 거의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로이스터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로이스터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뭐?”
“아니라구. 나 황후 폐하랑 가튼 편 아니야.”
로이스터가 내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한층 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황후 폐하가 누군지도 몰라.”
“……모른다고?”
로이스터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런데 이 정원은 왜…….”
“그냥 시종이 안내해 준 거야. 나는 이론 데가 있는 줄도 몰라써.”
“……정말?”
“웅.”
‘이제 좀 믿겠니?’
내가 안심하며 바라보자 한층 경계가 풀린 로이스터가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풀리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 황궁은 왜 온 거야?”
“어…….”
‘거참, 이거 말하기가 곤란한데.’
로이스터가 아무리 탑에 갇힐 운명이라지만, 나는 함부로 내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귀족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탄제리크가의 적녀이다.
현 탄제리크가의 가주인 헤이녹스와 프리실라의 마지막 아이. 그 당연한 말이 가지는 무게감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탄제리크란 그런 것이니까.’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제국에서 탄제리크가 가지는 무게를.
태생부터 자라고, 먹는 순간 하나까지 전부 제국민의 관심과 집중을 받고 있었다. 탄제리크가는 제국에서 어쩌면 황실보다도 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황궁 안 구석진 곳에서 죽은 듯 사는 로이스터라도 탄제리크 가문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 탄제리크 가문 사람이 갑작스레 찾아왔다면 더 의심스럽겠지.’
어쨌거나 로이스터는 황제의 아들이자 제국의 2황자였으니까.
‘내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어린아이더라도 낯선 사람이니까.
‘그건 안 돼.’
탄제리크가 원작처럼 흑막으로 망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가문을 지키면서 적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비록 로이스터가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권력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황자를 적으로 둘 필요는 없지.’
짧은 고민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로이스터가 보였다.
나는 눈을 깜박이는 로이스터에게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업써.”
“……왜?”
나는 로이스터가 오해하기 전, 빠르게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아, 뭐라고 해!’
다른 사람을 사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 결국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렸다.
“나는…… 나는 용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