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져기, 공쟉님…….”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헤이녹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좀 내려 달라고.’
헤이녹스는 마차에서부터 황궁을 거닐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 나를 안고 있었다.
‘저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은 안 보이니…….’
복도에서 나와 헤이녹스를 마주한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듯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자리를 피했다.
‘이게 다 헤이녹스 때문이야…….’
내 첫인상이 엉망이 된다면 그건 전부 뻔뻔한 헤이녹스 때문이다.
“내려 주세여…….”
“안 된다.”
헤이녹스는 부끄러움에 꺼져 가는 듯한 내 목소리에도 단호했다.
“궁 안의 모든 건 황후의 눈이다. 그 여자에게 약점을 보일 생각은 전혀 없다.”
‘네, 네. 그러시겠죠.’
이거 봐라. 지금 내가 자기 약점이라 숨기겠다 이거지?
‘됐어. 내가 저 얼굴에 철판 깐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휴…….”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진정했다.
‘사실이니까 뭐라 부정도 못 하겠고.’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헤이녹스의 약점인 건 사실이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그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황후는 틈만 보이면 이때다 싶어 공격하니까.’
원작 안에서 봤던 황후는 남의 약점을 손에 쥐면 그걸로 상대를 뒤흔드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한테 괜한 구실을 내줄 필요는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얌전히 헤이녹스에게 안겼다.
“공쟉님.”
헤이녹스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군데 지굼 어디 가눈 거에여?”
황궁 안에 들어온 지 꽤 되었건만, 헤이녹스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비밀스러운 곳이라도 가나?’
그도 그럴 것이, 이 복도를 지나면서 병사들도 여럿 마주친 데다 소설 속에서 비밀스러운 곳은 언제나 가는 길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혹시 금고라두 털려눈 건…….”
이젠 황제 금고까지 손을 대나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헤이녹스가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돈이라면 공작가에 더 많다.”
“구로면 대체 어디를…….”
“말하지 않았나.”
헤이녹스는 나를 바라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황제에게 경고하러 간다고.”
“아…….”
‘망할…….’
맞다. 헤이녹스는 황제에게 경고하러 간다고 했었다.
나도 그건 기억하고 있다. 처음엔 그걸 말리려고 했었고.
근데 이젠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안긴 채로 황제 앞에 같이 가면 도대체 도서관엔 언제 가?
“공쟉님, 다시 생각해 보세여…… 저룰 데려가두 좋을 게 하나두 업따니까여?”
나는 다급하게 헤이녹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러케 작구, 또, 음…….”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변명을 만들어 냈다.
“또 못생겼쓰니까…….”
구라다. 완전 구라다.
나는 지켜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누구나 빈말이라도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다.
‘귀엽기보단 깜찍하고 새침한 매력이 있지.’
하지만 헤이녹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소설 속 헤이녹스는 그의 차가운 외모를 좋아하지 않고, 나는 그런 그를 쏙 빼닮았으니까.
‘헤이녹스가 봄과 여름을 의인화한 것처럼 따뜻한 외모를 가진 프리실라를 사랑한 걸 보면 분명 사랑스러운 사람이 취향일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올려다본 헤이녹스의 표정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음…… 공쟉님?”
걸음을 멈춘 헤이녹스가 의아했지만 마저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구로니까 저눈 두고 가시라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지금까지 스스로가 보잘것없다 생각한 건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왠지 내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오해하는 듯했다.
“아녀, 공쟉님. 그론 게 아니라…….”
“못생기지 않았다.”
헤이녹스는 나와 시선을 맞추며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네가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 없다.”
‘네, 고맙고 다 알겠는데요…….’
저 두 발 멀쩡하고, 이제 땅이 그리워지려고 하는데.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흑흑.
* * *
“공작이 이리 급히 짐을 찾아오다니 놀랍구만. 그것도…… 공녀까지 데리고 말이지.”
망했어요. 하하.
나는 지금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황제의 앞에 서 있었다.
‘헤이녹스는 눈치를 어디다 말아먹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간절한 사인을 이리 개무시할 수가 있나.
‘알고 보니 내 변명도 일부러 이해 못 한 척한 거 아니야?’
오히려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를 붙잡기 위한 고도의 연기였을 수도 있다.
‘여전히 꿍꿍이를 알 수 없다니까…….’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헤이녹스를 쳐다보았다.
‘그쪽 때문에 황실도서관에 가려던 내 계획이 어긋났다고…….’
내 원망이 들렸는지 헤이녹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나?”
“업눈데여?”
나는 새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팽 돌려 버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모습이 황제의 관심을 끈 모양이다.
“오호……. 공녀는…… 공작과 무척 친밀한가 보군.”
“부녀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하는 헤이녹스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놈…….’
생각보다 더 고단수인 대꾸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 동안, 헤이녹스는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폐하를 알현한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뭐야. 나 때문에 온 거였어?’
이쯤 되면 내가 트러블메이커가 아닐까. 사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진지하게 그간의 행적을 검토하고 있는데, 헤이녹스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 잠깐 나가 있겠느냐.”
“녜!”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제랑 별로 눈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나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다 뒤로 휘청거렸다.
“어…… 엇!”
그러자 헤이녹스가 팔로 내 등을 지탱했다.
“조심.”
‘아오, 어지러.’
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더니 눈앞이 핑 돌았다.
‘마, 망할 가분수.’
나는 머리가 커서 다리가 중심을 못 잡았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 애써 빨개진 귀를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저눈 이제 가 보께여.”
“……그래. 시종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황궁을 잠시 안내해 달라고 하거라.”
‘헤이녹스한테서 잠깐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웃었다기에는 조심하라 당부하는 헤이녹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잘 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현실을 나섰다.
* * *
“흠?”
황제는 잠깐 헤이녹스의 입가를 스쳐 간 미소에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잘못 보았나?’
원체 웃는 일이 없기도 했지만, 프리실라가 죽은 이후로 헤이녹스는 단 한 번도 굳은 표정을 푼 적이 없었다.
‘그런데 미소라니? 그것도 록시나 탄제리크 앞에서?’
탄제리크 가주인 헤이녹스가 막내딸, 록시나 탄제리크를 홀대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분명 록시나를 미워할 만큼의 애정도 남지 않은 사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듯했다.
‘저번 승전 연회에서도 느꼈지만, 공작은 공녀를 미워하는 게 아닌 듯한데.’
오히려 이유 모를 그리움이 묻어 있는 듯했다.
의자에 몸을 늘여 놓았던 황제가 자세를 바로 하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던 헤이녹스가 입을 열었다.
“승전 기념 연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네.”
연회에서의 소란을 떠올린 황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제 딸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오고 갔다는 점.”
“…….”
“그리고 선동한 이가 황후 폐하의 조카인 플레리 아카린즈인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후.”
황제는 골치 아픈 듯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헤이녹스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도 이를 인지하고 계십니까?”
“대충은 알고 있겠지. ‘그’ 황후이니.”
“그렇다면 그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겠나?”
아무 말 없는 헤이녹스에 황제는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 플레리라는 아이가 황후를 뒷배 삼아 그리 굴었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말에는 피곤함이 뚝뚝 묻어났다.
“아직 어린아이야. 그저 어린애의 못된 장난 정도로 여기고 눈 감아 주는 게 어떤가.”
황제의 부탁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헤이녹스는 알현실에 차가운 기운을 흘렸다.
“폐하.”
헤이녹스가 뿜어내는 서늘함에 잠시 멈칫하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제국에 있는 그 누구도 탄제리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네.”
헤이녹스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그의 말 그대로 이 제국에 헤이녹스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중에는 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국공신으로 그 어떤 가문보다 유서 깊은 가문이 탄제리크였다.
여태껏 황위에 올랐던 많은 황제들이 탄제리크의 영향력을 통제하려 했지만, 제국과 함께한 공작가는 그 뿌리가 너무도 깊었다.
심지어 공작가에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이는 허울뿐인 황제로 역사에 기록될 정도였으니까.
그 모든 일이 탄제리크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임을, 현 황제인 알프레도 필리티움은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탄제리크는 제국에 충성스런 가문임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공작가와의 공생을 택한 사람이었다.
“자네가 이 제국을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는 짐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번 일은 황제도 함부로 헤이녹스의 편을 들어 주기 어려웠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황후의 조카라는 점이 특히나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황후는 황제의 정실부인. 비록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정략일 뿐이지만 한 제국의 반려를 선택한다는 건 의견을 함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암묵적으로 황후의 행동을 지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짐은 황후의 조카가 버릇없게 굴었음을 알고 있네. 하지만 황후가 황후인 이상, 함부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기가 곤란해.”
황제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 그 애를 벌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던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온 것이지?”
황제 옆, 비어 있는 황후의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헤이녹스가 말을 이었다.
“탄제리크는 과거를 잊지 않습니다.”
“…….”
“무례한 자들은 응징하고, 진창을 구를 때까지 놓지 않는 것이 가문의 방식입니다.”
언뜻 들으면 오만하게까지 들릴 수 있는 말을 헤이녹스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폐하께서 그 영애를 처벌하셨더라도 탄제리크가 입을 다무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헤이녹스는 단호히 말을 내뱉었다.
“록시나는 탄제리크입니다.”
“…….”
“탄제리크를 건드리는 것은 누구든 후회하게 만들 것이고,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이든 제거할 겁니다.”
헤이녹스는 굳을 대로 굳어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대답은 탄제리크가 합니다. 그러니.”
“…….”
“부디 방해만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