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내가 지금 뭘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놀랍게도 이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헤이녹스였다.
그는 마치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왜 웃으시져……?”
내가 당황스러움을 담아 묻자, 헤이녹스가 여전히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딸이 근무태만을 요구하는 게 황당해서 말이다.”
“꼭 그론 의미루 말한 거눈 아닌데…….”
나는 뒤늦게 몰려오는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댔다.
그러자 어느새 미소를 갈무리한 헤이녹스가 파란 눈동자를 빛냈다.
“내가 오늘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말이다.”
‘하루 동안 일을 못 해서 미리 하느라 무리한 거였나? 대체 어디를 가길래?’
“어디 가시눈데여?”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헤이녹스가 입꼬리를 살짝 휘며 웃었다.
“황궁.”
“아…….”
황궁이라고 하니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여.”
“너도 같이 가겠느냐?”
“녜? 저여?!”
내가 깜짝 놀라 몸을 어깨를 들썩이자, 헤이녹스가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졔가 거기를 왜…….”
“가기 싫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
‘또 저렇게 산뜻하게 말해 버리니 왜 같이 가자고 했는지 궁금하잖아.’
내게 황궁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하다.
처음 갔던 황실의 연회장에서 느꼈던 적의를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은 헤이녹스한테도 분명 그리 유쾌한 곳은 아닐 테다.
‘그런데도 간다니 무슨 일인지 좀 궁금하네.’
나는 슬그머니 떠오르는 궁금증에 눈을 올리며 물었다.
“왜…… 가시눈 건데여……?”
그런 내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턱을 괴며 느릿하게 말했다.
“경고할 게 있어서.”
‘경고?’
설마 황제한테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헤이녹스가 탄제리크 가주라 해도 그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도르르 굴리고 있자, 헤이녹스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다 보이는구나.”
“엇!”
나는 화들짝 눈을 아래로 깔았다.
‘거 눈치는 엄청 빠르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헤이녹스가 말을 이어 갔다.
“그저 조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조언 같은 소리하네.’
저 흉흉한 표정으로 그냥 조언만 할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서, 갈 건가? 불편하다면 가지 않아도…….”
“저 갈래여.”
헤이녹스는 내 대답에 눈썹 한쪽을 찡그렸다.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다.”
“아녀! 저 가구 시퍼여.”
‘황제에게 또 무슨 협박 비슷한 걸 해서 적을 만들려구. 그러잖아도 견제당하고 있는데 그 꼴은 못 보지.’
나는 우선 호기롭게 질러 놓은 후, 원작에서 헤이녹스가 황궁에 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원작 속 황궁은 무척 호화롭고, 화려하고, 또…….
‘도서관! 황실도서관!’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전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때문에 여신과 신전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봤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실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없다. 그러니까 제국 전체를 뒤져도 구할 수 없는 책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소리.
그리고 그 안에는 제국의 여신과 관련된 책도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은 디칼과의 수업에서 떠오른 거였다.
제국의 역사 수업 시간에 제국의 건국과 여신의 강림에 대해 수업을 듣던 나는 여신과 신전의 관계성을 어렴풋이 생각해 보다가 물었다.
‘여신님에 대한 책은 어디서 볼 쑤 이써여?’
‘아르타나 여신과 관련된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정리된 거라곤 강림 당시 초대 황제인 마테우스무스가 집필한 책 하나가 전부지요. 심지어 그마저 황실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아무나 볼 수 없답니다.’
어쩌면 기회다. 그 책을 볼 수 있는 기회!
“저 데려가 주세여.”
헤이녹스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눌 가신다구여? 언제여?”
“생각해 보니 오늘은 좀 늦은 것 같구나.”
헤이녹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일 일찍 출발하는 게 좋겠어.”
그의 말마따나, 밖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더라도 밤늦게야 도착할 게 뻔하다.
“녜에. 구럼 내일 가눈 거져?”
소파에서 일어나기 위해 대롱거리던 다리를 멈추자,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헤이녹스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록시나.”
“녜?”
“……아니다.”
‘뭐지?’
말을 하려다 마는 헤이녹스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롬 전 이제 가 보께여.”
“그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헤이녹스를 두고 집무실을 나왔다.
* * *
“아가씨. 오늘 황궁에 가신다고 하셨죠?”
“웅.”
나는 머리를 빗어 주는 앤에게 대답한 후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연회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웅, 구냥 공쟉님 따라가눈 고야.”
“그냥요?”
“웅.”
앤은 반 묶음 한 머리에 어울리는 리본을 대보며 중얼거렸다.
“축제까지는 좀 남았는데…….”
“축졔?”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앤이 싱긋 웃었다.
“봄을 기념해서 열리는 축제예요. 수도에서 열리는 건데, 규모도 꽤 크다고 하더라고요.”
“앤두 가 바써?”
“아뇨, 저는 아쉽게도 지방에서 살다가 바로 여기로 와서 수도엔 가 보지 못했어요.”
“구론데 어떠케 아눈 고야?”
“아, 저는 가 보지 못했지만 제 언니가 가 본 적이 있어요. 수도에 연인이 있거든요. 아직 약혼은 하지 않았지만요.”
“앤, 언니가 이써써?”
약간 충격이었다. 앤은 하도 어른스러워서 어렴풋이 동생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네, 언니 한 명이 있어요. 저보다 네 살 많답니다.”
‘그럼 한 스물둘쯤 되려나.’
그러고 보니 애인이 있다고 했지.
앤의 언니는 지방 귀족가 출신인데 어떻게 수도에 약혼자가 있는 거지?
내가 눈썹을 찡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앤은 작게 웃었다.
“어떻게 애인이 수도에 있는지 궁금하신 거죠?”
“웅…….”
앤은 내 반 묶음 한 머리 위에 연두색 리본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데뷔탕트에서 만났대요.”
‘데뷔탕트?’
보통 데뷔탕트는 18~19살 사이에 치른다. 그럼 둘이 연인이 된 건 3년이 조금 넘었을 테고.
‘의외인데?’
귀족들은 보통 정략결혼을 한다. 특히 지방의 보잘것없는 귀족가에서는 딸을 나이 많은 부자에게 시집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여주도 그럴 뻔했었으니까.’
원작에서는 몰락 귀족인 여주에게 자신의 첩으로 들어오라며 들이대는 나잇값 못하는 귀족들도 더러 있었다.
‘비록 남주가 처리해 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힘없는 여자들은 그대로 시집가는 수밖에 없었지.’
앤의 가문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린 나이부터 공작가에서 일했으니까 아마도 허울뿐인 귀족일 확률이 높겠지.
‘그런데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데뷔탕트에서 만났다는 걸 보면 상대도 귀족일 테고.’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내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앤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상대가…… 너무 높은 분이라서요. 그분 집안에서 반대하고 있어요.”
“아…….”
그렇다면 앤의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저렇게 표정이 어두운 게 납득이 갔다.
‘집안 차이가 문제구나.’
앤의 언니는 지방의 작은 자작가 출신이고, 상대는 수도에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
‘안 봐도 뻔하지.’
상대방 집안에서 앤의 언니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거다. 대부분의 귀족은 자식이 집안에 도움이 될 만한 결혼을 하길 바라니까.
“앤…… 갠차나?”
그러자 앤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언니가 조금 걱정될 뿐이에요.”
“앤 온니는 지굼 어디에 있눈데?”
“아, 지금은 수도에 있는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쿠나…….”
내가 앤의 치맛자락을 쥐며 올려다보자, 앤이 평소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언젠가는 언니도…… 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겠죠. 지금은 그냥 응원해 주기로 했어요.”
“웅…….”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답하자, 앤이 나를 안아 들며 말했다.
“이제 가요, 아가씨! 공작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웅.”
나는 앤의 품에 얼굴을 묻고 방을 나섰다.
* * *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응접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헤이녹스가 보였다.
‘또 일하지, 또!’
이런 짧은 시간조차 일하는 데 써야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수도에 가는 건지 모르겠다.
“공쟉님.”
‘농땡이 좀 부리라고 말했건만.’
내가 불만 있는 얼굴로 그를 부르자, 서류에 정신이 팔렸던 헤이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왔구나.”
“졔가 빈둥대라구 해짜나여.”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까지 쏘아 주자, 헤이녹스가 들고 있던 서류를 케인에게 넘기며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 일하는 것 아니냐.”
“녜?”
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헤이녹스는 앤에게서 나를 받아 들며 말했다.
“네 말대로 빈둥대느라 이제야 일한다는 말이다.”
‘앗! 어느 틈에…….’
나는 순식간에 나를 안아 든 헤이녹스의 자연스러움에 다시 한번 그가 제국의 2인자임을 상기했다.
‘역시 공작은 괜히 하는 게 아니야…… 뭐가 이리 자연스러워, 참나.’
헤이녹스가 하는 말에 귀족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다 이런 능숙함 때문일까?
‘눈 뜨고 코 베이겠어…….’
헤이녹스가 노련한 말솜씨로 혼을 확 빼놓으면 분명 상대방은 계약 조항 하나쯤 바뀌어도 모를 거다.
‘이런 사람이 내 아빠라 다행인 건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뭐 아예 남인 것보단 나을지도…….’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헤이녹스가 팔짱을 끼고 나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아무 생각두 안 했눈데여?”
저번 식사에서 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깜박이자, 가만히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라. 오래 걸린다.”
“녜에.”
‘머리 망가지겠네.’
나는 헤이녹스가 건드린 머리를 걱정했다.
‘앤이 열심히 해 준 건데…….’
내가 헤이녹스의 손을 떼려고 하자, 헤이녹스는 오히려 손에 더 힘을 주며 떼지 않았다.
‘미안해, 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헤이녹스의 손을 이 작은 몸으로 떼는 건 무리야.
고생했을 앤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들긴 했지만 나는 머리 정돈하기를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래, 잠이나 자자.’
나는 일찍 일어나 준비하느라 피곤한 몸에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다, 이내 잠에 들었다.
* * *
“일어나라.”
헤이녹스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어느새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벌써 도착했다고!’
황급히 창문을 쳐다보자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밖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탄제리크 가주와 공녀님을 뵙습니다.”
시종장은 전과 같이 공손한 모습이었다.
‘헤이녹스도 이번에는 트집 못 잡겠지?’
마차에서 나를 안아 들고 내린 헤이녹스를 쳐다보았다.
‘저번에 시종장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데 내가 얼마나 불편했다고.’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겠지 하는 마음에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헤이녹스는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이라는 걸.
시종장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헤이녹스가 말했다.
“아직 쓸 만하군.”
아이고, 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