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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17)화 (17/106)

<17화>

앤이 중요한 임무라도 받은 것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아가씨. 하나, 둘, 셋 하면 열게요.”

“웅.”

하나, 둘, 셋!

앤이 문을 확 잡아당기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렌자드는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도망가기 위해 발을 뗐다.

렌자드가 곧이라도 뜀박질할 것 같은 모습이자 내가 급하게 소리쳤다.

“스토옵!”

렌자드가 빠르게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지굼 도망치믄, 나 렌쟈드 평생 안 볼 꺼야!”

그 말에 렌자드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 티가 팍팍 났다.

그래, 내가 너를 구제해 주마.

“드러와.”

“어? 어…….”

렌자드가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오자 앤이 간식거리를 가져오겠다며 문을 닫고 나갔다.

방에 들어오고서도 제자리에서 멀뚱거리며 서 있자 나는 내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안자.”

“응.”

나는 렌자드가 자리에 앉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누르는 모습까지 조용히 관찰했다.

록시나에게 한 짓을 내가 용서할 수는 없지만, 내 방식대로 록시나에게 한 잘못을 갚아 주는 건 할 수 있겠지.

앞으로 렌자드와 마주하며 살아갈 사람은 나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켜는데 렌자드가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안해 보이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스럭대는 모습이 부모에게 혼나는 애처럼 보였다.

‘에휴.’

플레리한테 싸늘하게 말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영락없는 열 살이라는 게 확 와닿았다.

‘하긴, 그땐 렌자드도 어렸으니까.’

그때 렌자드는 고작 여섯 살.

그 어릴 때 프리실라가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불쌍한 건 얘도 매한가지긴 했다.

충격적이었겠지. 어머니를 잃는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는 건.

‘이해는 해.’

하지만 그 트라우마 때문에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 용서받을 수는 없다.

렌자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걸 보자니 다시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그건 안 돼.’

쉽게 용서해 주면 쉽게 잊는다. 나는 렌자드가 다시 실수하지 못하도록 할 참이다.

“렌쟈드.”

렌자드가 결연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자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일단 쫌 마즐까?”

렌자드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리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차라리 지금 이 상황이 기꺼운 듯 보이기도 했다.

“마즐 꺼지?”

“응.”

내가 재차 묻자 렌자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다가왔다.

“뒤돌아 바.”

렌자드가 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크게 숨을 들이켤 때였다.

찰싸악!

“억!”

생각보다 더 큰 고통에 놀란 렌자드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고작해야 인형으로 때릴 거라 생각했는지 침대 위의 인형과 내 손을 번갈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왜에?”

렌자드는 갸웃거리며 묻는 록시나를 쳐다보았다.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요 며칠 자신을 돌아보던 시간을 떠올렸다.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록시나에게 화풀이를 한 게 맞았다.

식당에서 했던 말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의문이 더 컸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록시나를 피했던 거다.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얼마 전 황궁에서 고작 아카린즈 백작 영애에게 사과하는 록시나를 보자 마음이 이상했다.

내가 원했던 게 저런 거였나?

늘 무시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간 다른 영식들과의 모임에서 렌자드 앞에서는 아무도 록시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프리실라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와도 화를 내기 일쑤였으니 누구도 렌자드 앞에서 록시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거다.

그래서 렌자드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을 줄은.’

작은 록시나를 보며 수군대는 귀족들, 구석에 몰아넣고 몰아세우는 또래 영애들.

이 모든 게 자기 탓인 것 같았다.

내가 무시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과를 했지만 록시나는 받아 주지 않았고, 렌자드는 그 사실에 대해 앙심을 품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었더라도 그간 그 행동을 사과 한마디로 용서받을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그래, 차라리 이렇게 맞는 게 나아.’

렌자드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또다시 날아올 매서운 손을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어?’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등이 따갑지 않았다. 대신 작게 숨소리가 들렸다.

“록시나?”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돌아보자 제 몸만 한 소파에 기대듯 앉아 꾸벅꾸벅 조는 록시나가 보였다.

움직이지 않다가 갑자기 힘을 써서 그런가? 어쩌면 길어진 렌자드의 상념에 지루해져 그런 건지도 모른다.

“자?”

록시나가 눈을 작게 감았다 뜨는 게 보였다. 완전히 잠에 빠진 건 아니지만 곧 잠들 것 같았다.

렌자드는 주먹을 꾹 쥐고 록시나의 앞에 앉았다.

“미안해.”

작은 목소리로 시작된 사과는 점점 혼잣말에 가까워졌다.

“기억 못 할 테니까. 그래서 그냥 말하는 거야.”

손가락으로 바닥을 잠시 문지르고 있는데, 문득 허공에 떠 있는 작은 발이 보였다.

렌자드는 비실 웃음이 났다.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로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는 록시나를 천천히 바로 눕힌 다음 다시 바닥에 앉았다.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너는 싫어하겠지?”

분명 질문이었지만 답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렌자드는 그냥,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네 말이 맞아. 너는 어머니를 죽인 게 아니고, 나는 너를 그냥 괴롭힌 거야. 너무 슬퍼서,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었어.”

하지만 심정을 토로하는 렌자드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다면, 방금 전 자신이 편하게 눕히는 바람에 천천히 잠에 빠져들던 록시나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펐어. 매일매일 안아 주셨는데, 사랑한다고 해 주셨는데, 다시는 보지도 못한다니까.”

차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는데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였다.

“자꾸 네가 미워져서, 너만 아니면 엄마가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보지 않아도 렌자드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는지 몰랐어. 나는 정말 몰랐어…….”

“…….”

“미안해. 정말 미안. 너한테 화풀이한 거, 괴롭힌 거 전부 미안.”

렌자드는 내가 잠이 들었다고 확신했는지 그간 머뭇거리며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 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훌쩍대다가 방을 나섰다.

‘아…….’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바뀌었다.’

원작에서의 렌자드는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록시나에 대한 악의를 쌓아 왔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짐덩어리가 사라졌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매정했다.

그랬던 렌자드가, 렌자드와 록시나의 관계가 변한 것이다.

그간 가르침을 받고 저택 사람들과 관계를 쌓으며 록시나가 변했다는 사실만 인지한 것과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원작과 전개가 달라지고 있는 거야.’

어쩌면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득바득 글을 배우려 했던 것, 헤이녹스의 눈에 들려고 했던 것, 훈장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것.

모두 종내에는 원작의 록시나처럼 죽기 싫어서였다는 걸.

그렇게 나는 은연중에 맴도는 불안감을 달래면서도 그 끝을 상상하기 싫어 다른 핑계를 댔다.

사실은 이걸 바랐는데.

내가 이곳에 있어도 괜찮은 존재라고 알려 주기를.

더 이상 원작의 록시나와 나는 다르다는 걸, 누군가 인정해 주기를.

창 틈새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이 밝았다. 나는 그 따뜻한 빛이 책상 위로 스며드는 걸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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