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 *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앤이다.’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웅, 나 일어나써…….”
내 대답을 듣고 방으로 들어온 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지굼이 몇 시인데에?”
“12시가 넘었어요, 아가씨.”
“어? 군데 왜 안 깨워써?”
원래 앤은 내가 오후 넘어서까지 자면 깨운다. 내가 의아한 듯 묻자 앤은 내가 걷어찬 이불을 침대 위로 올려 두며 말했다.
“어제 연회에 다녀오셨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나 어떠케 와써?”
‘마차에서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침대까지 온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앤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안고 오셨어요.”
“공쟉님이?”
의외였다. 딸을 미워하는 줄만 알았더니 마차에 버리고 올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러쿠나.”
고개를 끄덕이자 앤이 손으로 내 엉킨 머리를 빗으며 물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푸이치 님께 샌드위치 해 달라고 할까요?”
“음…… 아니.”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무언가 달콤한 게 먹고 싶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앤이 읽었는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푸이치 님께서 애플파이를 새로 만드셨대요.”
“정말? 역시 푸이치야!”
푸이치는 록잘알이 틀림없다.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제가 가지고 올라올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앤이 이렇게 조심스레 묻는 이유는 아마 렌자드와 또다시 마주칠까 봐서겠지. 배려는 정말 고맙지만,
“아니!”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훈장을 보고 나서 해야 할 일도 생겼으니까.
오히려 렌자드랑 자주 부딪쳐서 앙금을 푸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나중에 냅다 훈장을 갖다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지.
그리고 무엇보다 갓 구운 애플파이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
“내려가쟈.”
기다려라 파이야.
내가 야무지게 먹어 줄게!
* * *
“오! 아가씨, 직접 내려오셨군요. 제가 가지고 공녀님 방으로 가려 했는데요.”
푸이치는 내가 식당으로 온 것에 꽤나 놀란 듯 물었다.
“푸이치 파이는 바로 머거야대.”
푸이치는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야무지게 말하며 의자에 걸터앉는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는지 그다운 푸근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공녀님이 뭘 아시는군요! 이 푸이치가 만든 파이는 바로 먹어야 맛있답니다.”
나는 오븐에서 소리가 나자 파이를 꺼내러 주방으로 들어가는 푸이치에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이번에눈 식히지 말구 죠!”
“그럼 뜨거울 텐데요? 입천장이 다 델지도 모릅니다.”
“파이눈 그론 맛에 먹눈 고지!”
“그렇군요! 공녀님이 맞습니다! 허허.”
푸이치는 이번 파이는 따로 식히지 않고 내게 바로 내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김이 나는 게 저번보다 훨씬 더 맛있어 보였다.
“와아! 마싯께따!”
포크로 막 파이를 찍은 나는 문득 지금이 점심시간임을 떠올렸다.
“군데 푸이치는 안 머거?”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많이 드십시오. 허허!”
푸이치는 오븐에 몇 개 더 있다며 웃어 보였지만 나는 그가 공작가 일원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야. 푸이치 먼저 머고. 푸이치가 만든 고자나.”
푸이치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키우더니 전보다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만들며 여러 개 맛보아서 괜찮습니다.”
“푸이치 안 머그면 나 계속 팔 들고 이쓸 거야.”
내가 ‘아이고, 팔 아파!’ 하며 포크를 든 반대 손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푸이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숙였다.
“아아!”
내가 푸이치에게 한 입을 주곤 기대에 차 반응을 기다리자 푸이치가 이마를 짚으며 큰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아가씨께서 주시니 훨씬 맛있는 것 같습니다! 이거 애플파이 가게라도 내 볼까요?”
“졍말? 푸이치가 가게 열믄 내가 맨날맨날 차자갈 꺼야!”
“그러시면 전 매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호탕하게 웃던 푸이치가 어서 먹어보라며 손짓하자 나는 다시 포크를 파이 위로 가져다 댔다.
층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히 파이를 잘라 입에 넣으려는 그때,
“록시나…….”
‘하아?’
어제 플레리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렌자드였다.
“여기 있었구나. 방에 없길래 한참 찾았어.”
“네가 왜?”
플레리 앞에서 내 편을 든 건 탄제리크가 대외적으로 무시당하는 걸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겠지.
설마 그거 가지고 생색내려는 건가?
아주 동생 골리기도 정성스럽게 한다.
“쯧쯧.”
내가 혀를 차며 다시 접시 위 파이로 고개를 돌리자 렌자드가 다급히 내게로 다가왔다.
“록시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자 그가 한층 더 빨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내가 말을 끊기 전까지는.
“이따 말해.”
“어?”
렌자드가 당황한 듯 재차 묻자 나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따 말하라고. 나 지금 파이 머글려는 거 안 보여?”
“아.”
렌자드는 내 파이 찍힌 포크를 그제야 발견했는지 짧은 탄식을 했다.
“이거 따뜨탈 때 머거야 마싯거든?”
“그, 그래. 파이 먼저 먹어. 난 기다릴게.”
“훙.”
나는 망연히 서 있는 렌자드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 포크를 들었다.
입안 가득 파이 조각을 밀어 넣자 달콤한 사과향과 전보다 짙은 계피향이 느껴졌다.
‘아, 이거야!’
전보다 따뜻하니 확실히 풍미가 더 깊고 사과잼의 달콤한 맛이 도드라졌다.
“너무 마시써…….”
저번에 식혀 두고 먹었던 파이가 아까울 정도였다.
내가 줄어드는 파이 조각이 아까워 조금씩 잘라 먹는 동안 렌자드는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머야. 똥 마려?”
“아, 아니.”
“그럼 가마니 이써. 정신 사나우니까.”
“어, 미안…….”
렌자드는 내 지적에 금세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보던 푸이치가 렌자드에게 파이를 드시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런담.’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식탁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파이 가루까지 야무지게 털어 낸 뒤 렌자드에게로 몸을 돌렸다.
“할 말이 먼데.”
“아!”
렌자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저 가증스런 눈꼬리는 뭐람.’
내가 렌자드를 무척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저, 올라가서 얘기할까?”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니 사용인들이 있는 데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알게 뭐람.
“대써. 그냥 말해.”
“……그게,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사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되묻자 렌자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렌자드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에 내가 너한테 함부로 말한 거 같아서, 꼭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우리 어머니는,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닌데 억지 부린 것 같아. 내가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에 너무 슬픈 나머지…….”
“잠깐.”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이렇게 갑자기?
렌자드의 말처럼 따로 방에 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으려나.
가만히 그의 고해성사를 듣던 나는 오동통한 팔로 애써 팔짱을 끼며 말을 잘랐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상황이 아니라구. 차라리 싸우는 게 낫단 말이야.
나는 렌자드의 성질을 건드리기 위해 말꼬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선 정정할 게 이써.”
렌자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뭔데?”
“함부러 말한 거 가튼 게 아니라 함부러 말한 거. 억지 부링 거 가튼게 아니라 억지 부린 거야.”
“아…….”
렌자드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입을 벌리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외쳤다.
‘아냐! 깨달았다는 듯 굴지 말라고!’
“응. 다시 말할게. 어머니는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닌데 내가 억지 부렸어.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에 너무 슬픈 나머지 아무런 잘못 없는 너를 원망했어. 정말 미안해.”
담담한 목소리로 전해 오는 말이 예상외였던 것도 있지만, 나는 생각보다 진지한 렌자드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나 많이 고민해 봤어. 우리 어머니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그러고 나니까 뭐가 되었든 너 때문은 아닌 거 같다는 결론이 나오더라.”
렌자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사과 한 번으로 네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어.”
‘도대체 며칠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관계가 풀리는 걸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유도 없이?
치고받고 싸울 생각도 했던 터라 다소 허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묘하게 찝찝한 기분도.
‘헤이녹스가 혼냈나?’
나는 내 가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을 리가 없지. 헤이녹스가 말한다고 고쳐질 버르장머리였으면 진작에 바뀌었을 것이다.
‘혹시 체드만? 렌자드가 형이 하는 말은 잘 듣는 것 같던데.’
원작에서도 렌자드는 심각한 브라더 콤플렉스였다.
‘그렇담 체드만이 가장 신빙성 있는데…….’
나는 렌자드를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흑마법? 아니, 그건 아닐 거고…….’
제국에서 흑마법은 불법이다. 게다가 마법 능력이 발현되는 사람도 적은데 그중 흑마법으로 빠지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까.
내가 아직 렌자드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나는 렌자드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록시나를 향해 적대적인 감정을 없애고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그간 행동에 대한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다.
‘나는 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어.’
왜냐면, 이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가 사과하는 주체는 지금껏 그가 괴롭혀 왔던 여동생, 록시나 탄제리크.
그리고 사과를 받는 나는 이곳에 온 지 겨우 3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때문에 지금 내가 렌자드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난 너 용서 모 태.”
라는 말밖에는.
렌자드의 사과가 명치에 얹혀 속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렌자드 앞에서 목이 꽉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아가씨, 밖에 도련님이…….”
“또 렌쟈드야?”
“네.”
그날 이후 렌자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슬리지 않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며칠 동안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눈치만 보고 있다. 선뜻 다가오지도 않고 먼발치서 바라만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흠칫 놀라는 것이다.
‘아마 사과를 해도 받아 주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내가 원하던 상황인데, 달갑지 않은 이유.
나는 렌자드와 체드만과 잘 지내야 했다. 물론 최종 목표는 헤이녹스까지.
평화로운 탄제리크의 삶을 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인데, 렌자드가 먼저 다가왔지만 받아들이지 못해 무언가 이상한 형태로 서먹해진 것이다.
‘내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온 거야.’
록시나로 살기로 결심했으면서, 이 몸으로 잘 살기 위한 목표까지 세웠으면서 원래의 록시나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록시나는…….’
록시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렌자드의 사과를 받아 줬을까?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 록시나가 어떤 아이였는지.
하지만 분명한 건, 렌자드의 사과에 기뻐했을 거라는 것이다.
‘더는 외롭게 지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록시나는, 이제 나니까.
“앤. 렌쟈드한톄 드러오라고 해.”
“그치만 또 모른 척하실 텐데…….”
앤이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자 내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나항테 다 방법이 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