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는 지금껏 이토록 그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가 나를 이 상황에서 꺼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한달음에 헤이녹스에게로 달려갔다.
“공쟉님!”
내가 눈에 기쁨에 눈물까지 달고 울먹거리자, 헤이녹스는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나를 들어 안았다.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지만 주변에 있던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가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은 거겠지.
“쯧.”
딴청부리는 척 눈을 피하는 귀족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고개를 돌려 렌자드를 바라보았다.
“네가 설명해라, 렌자드 탄제리크.”
렌자드는 불안함에 몸을 떨고 있는 플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저게 감히 어머니를 욕보였습니다.”
“……프리실라를 말이냐?”
예상치 못한 이름에 헤이녹스는 잠깐 흔들리는 듯하더니 금세 능숙하게 동요를 감추었다.
“뭐라고 했지?”
렌자드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록시나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공작님!”
플레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절대로 공작 부인을 헐뜯으려는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공자께서 사실을 깨달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아카린즈 영애.”
플레리를 부르는 헤이녹스의 목소리에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볼을 스쳐 가는 진한 살기에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자 내 떨림을 느낀 헤이녹스가 오른손으로 느리게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영애는 탄제리크에게 훈수 둘 처지가 못 되네.”
플레리의 상태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지만, 헤이녹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쐐기를 박았다.
“부디 본인의 주제를 파악하길.”
“아…….”
그 말을 끝으로 헤이녹스는 뒤를 돌았다.
연회장을 나오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는 플레리의 모습이었다.
헤이녹스는 연회장을 나와 마차로 걸어가면서도 내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에 나의 떨림은 어느덧 멈춰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부는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돌아온 우리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마차 문을 열었다.
헤이녹스는 나를 마차 안에 앉힌 후 말했다.
“여기에 있거라.”
나는 그의 손이 떨어지자 느껴지는 허전함에 다급하게 헤이녹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어, 언제 오시눈데여?”
헤이녹스는 그의 소매를 꽉 쥔 내 작은 손을 잠시 응시하더니, 그 위로 손을 겹치며 말했다.
“……금방 돌아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떼자 문을 닫은 헤이녹스는 마부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연회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다시 가눈 고지…….”
나는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아암…….”
‘졸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첫 외출에, 황궁에 오고, 엄청 적대감 어린 눈빛에, 플레리의 삽질 직관까지.
‘엄청 바빴잖아?’
평소와 달리 움직임이 많았으니 이리 졸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가 이내 잠에 들었다.
* * *
록시나가 잠든 사이, 헤이녹스는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플레리를 부축하던 영애들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고, 공작님…….”
헤이녹스가 나가고 애써 숨을 고르던 플레리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플레리 아카린즈.”
“네, 네…….”
“영애는 탄제리크 가문이 뭐라고 생각하지?”
“제, 제국의 수호자이자…….”
“아니.”
플레리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헤이녹스는 눈가를 찡그리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전장귀. 무자비한 살인마.”
그의 말이 끝나자 연회장 안은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다.
“왜 이렇게 다들 굳어 있나.”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부르던 별명 아닌가?”
헤이녹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백한 안색으로 사시나무 떨듯 휘청대는 플레리를 바라보았다.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건 기사에게, 수도의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대하는 모양이군.”
“고, 공작님……!”
그때, 곧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플레리의 앞을 막아선 아카린즈 백작 부인이 소리쳤다.
“공작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그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애원에도 헤이녹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말했다.
“분수도 모르고 감히 탄제리크를 건드리는구나.”
백작 부인 옆에 서 있던 플레리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며 울부짖었다.
“공작님……!”
헤이녹스는 마지막으로 일갈하듯 내뱉었다.
“내게 덤볐다면 그 정도 각오는 했겠지.”
어깨를 파르르 떠는 백작 부인과 더 이상 숨조차 쉬지 못하는 플레리를 두고 헤이녹스는 차갑게 뒤로 돌아섰다.
렌자드와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체드만은 황급히 복도로 나왔다.
그리곤 저 끝에서 마차를 향해 걸어가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 헤이녹스를 겨우 붙잡은 그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헤이녹스가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잠시 흠칫하던 체드만이 말을 이었다.
“제가 록시나는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헤이녹스는 입술을 꾹 깨무는 체드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두가 록시나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에요.”
“…….”
“아버지는 화낼 자격이 없습니다.”
“……왜 서신을 보내지 않았지?”
헤이녹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조금도 티 내지 않았지?”
“…….”
“왜 저따위 놈들이 탄제리크를 무시하게 둔 거지?”
“아버지.”
“왜 록시나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거지!”
록시나는 고작 네 살이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고개 숙이고 있던 록시나를 발견한 순간, 헤이녹스는 입장과 동시에 록시나에게 쏟아지던 선명한 적의를 떠올렸다.
그동안 제가 없는 곳에서 록시나에 대해 떠들었을 귀족들을 생각하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내리꽂던 험담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어. 나는 그저, 그저…….”
“…….”
헤이녹스는 아내를 잃고, 누군가 가슴속을 파낸 것만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신전을 저주했다. 왜 저택에 오지 않았을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분노를 감당할 수 없던 헤이녹스는 종간에는 록시나를 원망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프리실라는 지금 내 곁에 있었을 텐데.
프리실라에게 아이를 낳지 말자 설득하지 못한 것을 하루에도 수천 번씩 후회했다.
그리고 문득 록시나를 사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헤이녹스는 제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곧장 전장으로 떠나 버렸다. 적어도 아이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아서.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잠시 멈칫하던 체드만이 말을 이어갔다.
“저도 잘한 일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체드만은 마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록시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사과할 겁니다. 록시나가 용서해 줄 때까지.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말할 겁니다.”
“…….”
차분해진 체드만의 두 눈이 헤이녹스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 *
“공작님, 오셨습니…… 헉!”
마중 나와 있던 집사는 헤이녹스에게 안겨 있는 록시나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공작 부인께서 돌아가신 뒤로 아가씨를 쳐다도 보지 않던 공작님인데!’
이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아가씨를 안고 있다니 감개무량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서쪽 가장 끝에 있는 록시나의 방은 헤이녹스의 집무실과 거리가 멀었다.
‘매일 그 많은 계단을 오르내린 건가.’
헤이녹스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곤히 잠든 록시나를 바라보았다.
“……작군. 무척 작아.”
코도, 오물거리는 입술도, 꼼지락대는 발까지 전부.
“원래 여자아이는 이렇게 작은 건가.”
‘렌자드와 체드만은 이리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록시나는 유난히 작았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식사는 제때 한다고 들었는데.’
헤이녹스는 제게 안겼던 록시나를 떠올렸다. 세게 쥐기라도 하면 다칠 것처럼 너무도 작고 가벼워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겠지.’
어린 록시나를 돌보긴커녕 전장으로 도망쳐 버린 그다.
아이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변명을 명분 삼아, 아내를 잃은 슬픔을 무기 삼아.
헤이녹스는 그렇게 록시나를 밀어냈다.
“록시나.”
록시나 탄제리크. 나와 프리실라의 마지막 아이야.
헤이녹스는 록시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머리칼을 귀에 꽂으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 속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가 너를 미워하게 해서 미안하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비겁한 아버지라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