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허, 지금 제게 반말을 하신 건가요?”
“존대라두 해야 대? 네가 먼데?”
플레리는 ‘허, 참나.’ 하는 추임새와 함께 손부채질을 했다.
“제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가요, 지금?”
“응. 몰라.”
“하!”
플레리는 자신이 무시라도 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손부채질을 더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저 뻔뻔한 태도라니! 수도에서 저를 모른다니 말이 되나요? 영애들은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플레리가 고개를 휙 돌려 묻자 뒤에 서 있던 다른 영애들도 얼른 말을 보탰다.
“당연히 말이 안 되죠. 플레리 님을 모르다니!”
“황후 폐하께서 플레리 님을 아끼시는 걸 모르는 제국민은 없습니다!”
그 대답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플레리는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다는데요. 이래도 정말 저를 모른다고 발뺌하실 건가요?”
‘아, 유치해.’
역시 애들이라 그런지 하는 짓이 참 유치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정신연령이 다르면 이것도 문제다. 무슨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
‘그냥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하고 끝내 버릴까?’
나는 지금 상황이 꽤나 불편했다.
이쪽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것도 거슬리는데 저런 싹수 노란 애랑 더 소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내가 지금이라도 고개 숙여 사과한다면 이 상황은 일단락되겠지. 그럼 나도 자리를 떠나 쉴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냥 사과하자.’
내가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여는 찰나, 그새를 못 참은 플레리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서 말씀해 보세요. 정말 이래도 모른 척하실 건가요? 아, 혹시…….”
플레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아는 게 없나?”
‘오오?’
나는 플레리의 정확한 촉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알았지?’
나는 아는 게 없다.
이런 신분제도 낯설고, 예법 같은 건 배울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제대로 각 잡고 인사하는 방법은 완전 초면이다.
‘나 저택에서 되게 편하게 지낸 거구나.’
새삼 탄제리크가의 친절한 고용인들에게 고마워졌다.
“역시 배운 게 없으니 하는 짓도 천박하기 짝이 없어.”
순간 약간의 말소리가 오갔던 주위가 정적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는 경악에 차 귀족의 체통 따위 잊어버리고 입을 쩍 하고 벌리기도 했다.
‘얘, 혹시 록시나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록시나는 연회는 물론 저택 밖으로 나온 것도 처음이니까.
그렇다면 플레리가 남들 앞에서 나를 망신까지 주면서 견제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텃세구나.’
지금 플레리는 사교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나의 기를 죽이려는 거다.
“천박…….”
참 주관적인 말이다. 순전히 자신만의 기준으로 남의 수준을 정의 내리는 것 아닌가.
“졔가 천박하다고요.”
“그래요! 그러니까 공작께서도…….”
“그러눈 그쪽은 얼마나 고귀하길래.”
“뭐요?!”
플레리는 내 혼잣말과도 비슷한 중얼거림을 듣고는 버럭 소리쳤다.
“저는 황후 폐하의 오라버니인 메르톨스 아카린즈 백작의 딸입니다! 당신 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제가 더 나은 거 가튼데요?”
백작보다 공작이 더 높은 거 아닌가?
나는 공작의 딸이고 플레리는 백작의 딸이니 내가 신분상으론 더 높은 거 같은데.
“공쟉님이 백쟉님보다 더 위에 이짜나요? 그론데 왜 저는 비교도 안 된다눈 거예여?”
‘아, 혹시 아카린즈 백작은 황후의 오빠니까 백작이라도 헤이녹스보다는 높은 건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플레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나마 하얗던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뭐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더니 또 몇 차례나 ‘허, 참나!’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손부채질을 해댔다.
‘왜 저래.’
아, 사실 자기도 잘 모르는 건가? 본인도 모르는 걸 내가 꼬집어 물어봐서 당황한 거?
‘그런 거라면 좀 미안한데…….’
저 어린애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 준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좀 모를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비웃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플레리가 모른다는 걸 꼬집어 내면 한 소녀의 인간관계를 망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플레리는 나를 분명 원망할 거고, 나는 행복한 삶을 망친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겠지.
‘지금 사과하자.’
평생 미안함에 괴로워할 바엔 지금 끝맺는 게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다.
“졔송함미다.”
“뭐, 뭐가 말이죠?”
플레리는 갑작스러운 내 사과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새침한 말투로 물었다.
“어떤 게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얘는 도와주려고 해도 정말…….’
“어, 음……. 일단 인사를 안 해서 미안하구, 황후 뻬하 조카인 고 몰라바서 미안하구, 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지금 사과 중인데 누가 끼어들…….’
나는 내 고해성사를 방해하는 사람을 짜증스럽게 올려다봤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렌자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렌자드는 아까의 멍한 눈과는 달리 불꽃이 튈 것처럼 강렬한 눈으로 플레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 공자님!”
플레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렌자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타, 탄제리크가의 공자님을 뵙습니다.”
‘뭐야, 렌자드한테는 먼저 인사하잖아? 그럼 공작이 더 높은 거 맞네.’
나는 괜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허리에 힘을 주었다.
“인사는 됐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잖아.”
‘오올, 렌자드!’
플레리보다 키가 작은 렌자드에게서 나오는 기세가 꽤 날카로웠다.
“그, 그게 공녀님께서 제게 무례를 저질러 사과를 하시는 중인…….”
“무슨 무례를 저질렀는데?”
“그, 그러니까…….”
플레리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저보다 작은 렌자드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말을 더듬었다.
“이, 인사를 하지 않으시고, 또…….”
“인사?”
플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대답에 렌자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비웃음을 터뜨렸다.
“뭐? 인사를 안 해?”
“그, 그렇습니다.”
“록시나가 왜 네게 인사해야 하지?”
“그, 그야 그게 예법이니…….”
“너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
렌자드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멍해져 있는 플레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록시나는 네게 인사를 할 필요 없어. 탄제리크가의 공녀이니까.”
순간 플레리의 얼굴이 혼란으로 잔뜩 물들었다.
“인사는 네가 해야지. 안 그래?”
렌자드는 플레리를 향해 비웃음을 치며 말했다.
“흔하디흔한 백작 영애가 왜 탄제리크가의 공녀에게 인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네.”
‘와…….’
요즘 애들 싸우는 거 살벌하다. 그 누가 둘을 보고 십 대라고 믿을까!
‘렌자드, 너 무서운 애구나.’
저택에서는 생떼만 부려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꽤 매서운 면이 있었다.
‘그럼 이제 나는 슬슬 빠져 볼까.’
빠져나갈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 나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던 계획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음을 깨달았다.
‘왜 다 여길 보고 있는 거야…….’
플레리가 내게 헛소리를 하는 동안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자리를 떴던 귀족들은 렌자드의 등장에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렌자드와 플레리의 대립이 절정에 이른 지금! 이 일대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망할…….’
관심이 사그라들긴커녕 남의 싸움을 무척 흥미로워하는 모양새였다.
‘이 체통 없는 귀족들 같으니!’
다들 왜 이래! 체통에 살고 체통에 죽는 사람들 아니었어?
‘관심 꺼 주라, 제발…….’
하지만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렌자드가 막판 스퍼트로 플레리를 몰아붙여 더욱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사과해.”
“…….”
하지만 플레리는 고집스럽게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렌자드가 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사과하라고 했을 텐데.”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허억!”
아까부터 흥미진진하게 직관하던 귀족들이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쟤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그냥 못 이기는 척 사과 한번 하면 끝날 일이다. 근데 왜 이렇게까지 질질 끄는 건데!
‘혹시 나랑 반대로 이 관심을 즐기는 타입인가?’
핑크 진심녀 플레리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긴 글렀으니 최대한 빨리 상황을 종료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레리가 저렇게 나오면 점점 일이 커진다.
‘아무래도 씩씩대는 플레리를 막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렌자드를 진정시켜야겠다.’
내가 렌자드의 소매를 잡으려는 순간, 나를 노려보던 플레리가 마지막 폭죽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미를 죽인 살인자 주제에! 공자님께서 나서니까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아…….”
나는 플레리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너 지금…….”
렌자드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분노를 내뿜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플레리,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플레리를 바라봤지만 지옥에서 올라온 그녀의 주둥아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공녀님이 공작 부인을 죽게 만들었는데도 공자님은 괜찮으신가요? 이 자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말이에요!”
“……!”
미쳤다. 쟤는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이건 어리다는 변명으로도 커버가 불가능하다.
‘렌자드 앞에서 프리실라 얘기를 하다니.’
탄제리크가의 일원 앞에서 프리실라의 얘기를 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되어 있다.
그런데도 저 간땡이 부은 소녀는 그 선을 넘어 버렸다는 말이다.
“미쳤군.”
내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한 귀족이 탄식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제는 플레리 뒤에서 동조하던 소녀들마저 파리한 안색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제, 제가 틀린 말은 한 건 아니……!”
“플레리 아카린즈.”
렌자드는 변명하려는 플레리의 입을 아예 막아 버렸다.
“너는 아주 멍청하구나.”
“지금 뭐라고……!”
“탄제리크가 일원 앞에서 감히 어머니를 언급해?”
“……!”
플레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두 손으로 재빨리 제 입을 가렸지만 이미 기회는 물 건너가 버렸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너 따위가 뭐라고!”
이 순간, 나는 렌자드의 손에 검이 없음에 안도했다. 만약 렌자드의 허리춤에 연습용 목검이라도 묶여 있었다면, 분명 이 연회장은 난리가 났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렌자드를 막기도 불가능했다. 이미 일은 커질 대로 커졌고, 플레리는 갈 때까지 갔다.
나는 렌자드의 엄청난 기운에 몸이 급피곤해졌다.
‘집에 가고 싶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싶다. 아예 이불 속에 파묻혀 버리고 싶다…….’
내가 방에 있는 안락하고 포근한 침대를 간절하게 떠올리고 있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헤이녹스!’
중요한 일이 있다며 연회장을 잠깐 떠났던 그가 소란스러움에 돌아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