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만약 원작에서처럼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면 이 연회에도 참석할 일 없었겠지.
여전히 아프다는 소문으로 숨길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여기 온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사실 직접 보기 전까지 저 훈장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훈장이 내려진 순간 탄제리크에 대한 견제가 더욱 심해지는 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제국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 면죄부까지 가지고 있다니.
다들 어떻게 저 훈장을 뺏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겠지.
원작의 황후처럼 나를 이용하거나, 혹은 렌자드를 이용할 수도 있어. 체드만과는 다르게 머리가 나쁘니까 말이야.
‘저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프리실라에 죽음에 대한 오해를 빨리 풀고 가문 사람들 모두가 똘똘 뭉쳐야 해.’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황제의 흥미로워하는 듯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곳에 그대의 딸이 와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헤이녹스에게 훈장을 수여한 황제는 그제야 본래의 목적을 드러냈다.
“몸이 많이 약하다고 들었는데, 이곳까지 오는 데 체력 소모가 크진 않았을지 걱정이군.”
“이제 제가 함께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황제가 보랏빛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헤이녹스가 내 한쪽 팔을 잡고 그의 뒤로 숨겼다.
“왜 그러…….”
“제 딸이 낯을 많이 가립니다.”
헤이녹스가 주변의 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 이유는,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 때문이겠지요.”
그의 매서운 파란 눈을 마주친 귀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헤이녹스의 눈치를 보았다.
“항간에 제 딸에 대한 소문이 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 말이냐.”
“차마 탄제리크의 유일한 공녀를 두고 할 말이 아닌 것들을 말입니다.”
헤이녹스의 눈이 번득였다.
“제 어미를 잡아먹었다는 말을 한다고 하던데.”
헤이녹스의 노골적인 말에 놀란 귀족들이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공작 부인을 직접 언급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그, 그런……! 감히 입을 가볍게 놀리는 이들은 짐이 직접 처단할 것이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헤이녹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기대해 보겠습니다.”
‘와아, 진짜…….’
나는 뒤에서 언뜻 올려다본 헤이녹스의 얼굴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흑막은 흑막이구나.’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함에 몸이 절로 떨려 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잘게 떨리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뒤에 서 있었는데도 이 정도인데, 눈이라도 마주쳤던 사람들은 거의 기절하겠는데?’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체드만이 여전히 떨리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머 하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체드만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입술 위에 올리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라는 건가.’
나 계속 입 다물고 있었는데. 아, 내 눈 굴러가는 소리가 너무 큰가?
나는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눈도 조용히 움직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나서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내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체드만이 씨익 하고 웃더니 곧바로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렌자드 쟤는 왜 저러지?’
오늘따라 유독 말이 적은 느낌이었다. 시비를 걸어도 진작 걸었어야 하는데.
‘표정도 안 좋고…….’
저번 식사 시간 때도 어딘가 아픈 사람 같았는데, 오늘 낯빛은 그때보다도 더 안 좋았다.
‘진짜 어디 아픈가?’
내가 렌자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몸이 아픈지 살폈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모습이었다.
‘차라리 귀찮게 굴지. 계속 저런 상태면 찝찝한데.’
나와 싸우고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렌자드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그 원인으로 나를 지목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 참 곤란하구만. 먼저 말이라도 걸어야 하나?’
내가 렌자드에게 말을 걸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헤이녹스가 뒤를 돌았다.
“가지.”
“어, 엇! 렌쟈, 아니 오라버니들운요?”
“그 아이들은 다른 영식들과 어울릴 거다. 이곳에 네 또래는 없으니 나와 가자꾸나.”
그러더니 헤이녹스는 나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그의 팔 위에 앉혔다.
‘보여 주기식이구나.’
방금 헤이녹스의 말을 통해 록시나가 이미 사교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미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이미 가문 내에서 내놓았다고 자자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귀족들이 예상과 다른 나와 헤이녹스의 모습에 술렁이는 게 보였다.
“가볍군.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건가?”
“녜.”
‘밥은 물론 간식까지 잔뜩 먹고 있답니다.’
나는 집에 두고 온 그리운 파이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연회장이 불편하진 않으냐.”
“죠금여……?”
“누가 불편하게 했지?”
누구든 이름만 대면 베어 버릴 것 같은 기세에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업써여!”
‘난 남의 시체 같은 거 보기 싫다고…… 그러니 제발 아무도 죽이지 좀 마.’
다행히 헤이녹스는 내 눈빛에 담긴 간절한 부탁을 눈치챘는지 험악했던 얼굴을 풀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아직 주제 파악을 못 한 것들이 있다면 친히 가르쳐 주려 했건만.”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하자, 헤이녹스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머리 위에 갖다 대고 쓰다듬었다.
‘깜짝이야…….’
무심한 얼굴로 손을 올리길래 흠칫했는데, 머리를 쓰다듬어서 놀랐다.
“저, 저기…….”
내가 어색함에 눈을 굴리자 헤이녹스가 내 안색을 살폈다.
“어디가 불편한가?”
“아녀…… 그냥 불러 봐써여.”
“그렇군.”
헤이녹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를 계속 안고 있었다.
‘좀 불편한데.’
헤이녹스가 아이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안고 있는 자세가 아주 어정쩡했다.
“저, 이제 내려 주세여.”
“불편한가?”
“녜에.”
헤이녹스는 대답을 듣고서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공쟉님?”
“아, 그래.”
내가 다시 한번 묻자 헤이녹스는 그제야 나를 내려놓았다.
‘휴우.’
내심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던 터라 나는 두 발이 바닥에 닿자 안심했다.
“록시나. 너는 네…….”
“공작님.”
“케인……?”
“아, 공녀님.”
말을 건 사람은 헤이녹스의 보좌관인 케인이었다.
내가 디칼과의 수업이 끝나고 헤이녹스의 집무실에 갈 때 종종 마주쳤는데,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연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케인이 여긴 왜 와써?”
“제가 공작님의 보좌관이잖습니까. 시간을 조율하고 준비해야 하니 거의 대부분의 일정을 공작님과 함께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쿠나…….”
‘비서 같은 건가.’
속을 알 수 없는 상사와 매일 붙어 있어야 한다니 정말 불쌍하다.
“케인, 야근 수당은 꼬박꼬박 챙겨 받꼬 이찌?”
“예?”
내 걱정 섞인 질문에 잠시 눈을 껌벅이던 케인은 이내 크게 소리 내며 웃기 시작했다.
“아……! 예! 하하하. 공작님께서 매번 챙겨 주시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 큭, 다.”
“그롬 다행이구…….”
나는 케인의 난데없는 웃음이 의아했지만 그가 노동 착취를 당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군데 왜 웃는 고야?”
“아, 이건……!”
“그만하지.”
케인이 눈 끝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대답하려는 순간, 헤이녹스가 끼어들었다.
“케인 브라운. 내게 할 말이 있다 하지 않았나.”
헤이녹스가 심히 심기가 불편한 듯 낮은 목소리로 묻자, 케인이 한순간에 웃음을 지우고 답했다.
“예, 맞습니다.”
“연회를 즐기는 중에 끼어들 정도라면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그렇습니다.”
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녹스가 나와 그에게 집중된 다른 귀족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군.”
그러고는 아직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나와 눈을 맞추며 멀지 않은 곳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렌자드를 가리켰다.
“저곳에 렌자드가 있으니 혹시 네게 해를 끼치는 자가 있거든 말하거라.”
솔직히 얼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렌자드가 내게 도움을 주진 못할 것 같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오마.”
헤이녹스와 케인이 자리를 떠나자, 잡음이 섞여 있던 홀의 내부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뭐지?’
나는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렌자드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웬 처음 보는 소녀들이 앞을 가로막기 전까진.
“누구…….”
“묻기 전에 인사부터 하셔야죠.”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초면인 사람에게 인사부터 하라니. 누군지 몰라도 고개부터 숙이라는 거야?’
내가 황당한 논리에 가만히 서 있자 소녀는 놀란 척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공녀님께선 아직 예절 교육도 받지 않으신 건가요?”
“갑쟈기 그게 무슨…….”
“계속 말끝을 흐리고 계시잖아요? 화법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공작님께서 그 정도도 가르치지 않으신 건가요?”
‘네가 자꾸 말을 끊는 거잖아.’
게다가 지금 4살인 내가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는 거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야?
내 눈앞에서 시비를 거는 이 소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핑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설마 내 드레스에 핑크색 리본이 달려 있어서 저러나? 핑크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건데 내가 사용했다고?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이 소녀는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핑크색이니까.
‘만약 핑크 때문이라면 정말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이다. 진짜 색 가지고 유세 부리는 건 처음 본다.’
하지만 난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 있다. 이 소녀는 많아 봐야 열두 살 언저리일 테니.
그 나이대에는 그럴 수도 있지. 난 그러지 않았지만 여기 애들은 또 다를 수 있잖아?
“졔송함미다.”
“흥. 잘못한 줄은 아시나 보죠?”
소녀는 의기양양해져서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뭘 잘못했는지 말해 보세요.”
소녀가 팔짱을 끼며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명색이 공녀인데…….”
“그러게요. 아까 공작이 안고 있는 걸 보니 꽤 아끼는 모양이던데요.”
“자기 부인을 죽게 만든 딸이 뭐가 예쁘다고 아끼겠어요. 그냥 폐하께서 계시는 자리니 그런 척하는 거죠. 일단 서류상으로는 딸이니까요.”
그중에 나를 동정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소녀의 태도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묘하게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녀의 눈치를 보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귀족들이 눈치를 봐야 할 가문이라면 몇 안 될 텐데.’
가주도 아니고 그냥 귀족 영애다.
그럼에도 이 어린 소녀를 막지 못한다는 건, 수도 내에서도 한 가닥 하는 집안이라는 것.
‘원작에도 이런 핑크 집착녀가 있던가?’
핑크 머리라, 핑크 머리, 핑크 머리…….
‘아!’
딱 한 명 있었다. 비록 자주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지만 설정이 인상 깊었던 인물.
‘플레리 아카린즈.’
아카린즈 백작의 유일한 자녀이자 황후의 조카로, 원작에서 황후만 믿고 설쳤던 걸로 기억한다.
‘황제의 사생아인 2황자한테 들이대다가 대차게 차였지, 아마?’
그때 플레리는 자신을 모욕한 이를 용서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황후에게 불쌍한 척은 어찌나 해 댔는지, 결국 2황자는 겁탈 혐의라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영원히 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플레리도 제정신이 아니잖아?’
비록 직접적으로 피가 이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호적상 2황자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런데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 모자라 겁탈을 했다는 누명까지 씌우다니.
‘소설로 읽었을 때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직접 보니 더 꼴불견이잖아.’
내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플레리가 빈정이 상한 듯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제 말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정말 무례하시군요!”
“누군지도 모르눈데 어떠케 인사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