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가씨. 어쩜 너무…….”
앤은 자신이 공들여 꾸민 내 모습을 보며 크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저 갈색 두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걸 보면.
“너무, 너무 귀여워요…….”
나는 앤의 손길을 받는 내내 졸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모르고 있었다.
‘반응이 저렇게 크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 앞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숨을 허억- 하고 크게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너, 너무…….”
‘귀엽잖아!’
머리칼의 위쪽은 양쪽으로 나누어서 만두가 있는 양 보이게 말아 올렸고, 나머지 머리는 곧게 빗어 풀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작은 보석이 꿰인 은백색의 얇은 실이 묶여 있어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앤, 진짜 고민 많이 했구나.’
은백색 실이 꼬여진 위치나 전체적인 머리 모양을 보니 앤의 노력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 손길이 귀찮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앤, 미아내…….”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두 아냐.”
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드레스로 시선을 옮겼다.
“아가씨! 이 드레스 좀 보세요! 전부 얇고 부드러운 천을 덧대어 만든 거예요. 이 명치 부근에 있는 작은 분홍 리본은 또 얼마나 깜찍한지…… 이건 정말 아가씨를 위해서 제작된 게 분명해요!”
“으응, 고마워어…….”
내가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앤이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가씨, 정말 요정 같으세요.”
“이제 그만해…….”
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옆으로 돌리려고 하자, 앤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요. 거짓말 아니고 정말. 오늘 연회장에서는 아가씨가 최고일 거예요. 이렇게 깜찍하신데 누구든 안 반할 리가 없어요.”
앤은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느라 구겨진 치맛단을 다시 아래로 당기며 폈다.
“그러니까, 아가씨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오시기예요.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기요!”
‘아…….’
이제야 앤의 진짜 표정이 보였다. 기쁨, 들뜸, 뿌듯함과 같은 얼굴 뒤에 숨어 있던 걱정과 염려, 그리고 섭섭함.
“누구든 아가씨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앤은 잠깐 드러났던 진짜 감정들을 갈무리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가씨.”
손을 살짝 흔들며 웃는 모습에 나는 울컥 올라오는 말을 눌러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앤, 나 가따 오께.”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쪼그려 앉아 있는 앤에게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니 먼저 준비를 끝낸 헤이녹스와 체드만, 렌자드가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구나.”
“졔송해여.”
“어서 타라.”
헤이녹스는 내 몸을 들어 마차 안으로 올렸다. 그러곤 올라탄 후 문을 닫아 버렸다.
“어? 다룬 사람운 안 타여?”
내가 체드만과 렌자드를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대자, 헤이녹스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이 마차에는 너와 나만 탈거다. 렌자드와 체드만은 다른 마차를 타고 따라올 거야.”
“녜에…….”
고개를 끄덕이자,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 의자 위에서 달랑거렸다.
나와 헤이녹스는 그 이후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창문만 쳐다봤다.
그리고 창밖으로 언뜻언뜻 커다란 흰색 벽이 스쳐 지나갈 때쯤, 헤이녹스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긴장되지는 않나?”
“긴장이여?”
솔직히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록시나로서 처음으로 하는 외출이니까.
내가 뭔가 실수해서 악감정을 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있고.
하지만 그런 생각에 움츠러들기엔 전생에 한 사회생활이 너무 인상 깊었다.
‘덕분에 멘탈 하나는 확실히 강해져서 말이야.’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혀여!”
헤이녹스는 그런 내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록시나. 일어나거라.”
나는 어깨를 약하게 두드리는 손길에 눈을 떴다.
겨우 눈을 뜨며 달아나지 않는 졸음에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정차했다.
곧이어 마차 문이 열리며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할아버지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헤이녹스에게 인사했다.
“탄제리크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하지만 헤이녹스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그 할아버지의 예의 바른 인사에도 미간을 찌푸렸다.
“공쟉님…….”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나이도 많으신 분한테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냐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헤이녹스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그는 전보다 한층 더 험악해진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시종장. 그대에게는 내 딸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눈까지 멀어 버린 것 같은데, 이참에 은퇴하는 건 어떤가.”
나는 자신보다 족히 30살은 많아 보이는 시종장의 가슴을 아무렇지도 않게 후벼 파는 헤이녹스의 인성에 새삼 감탄했다.
‘저, 저 미친놈…….’
더 험악한 말이 나오기 전에 헤이녹스를 제지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순간, 시종장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것도 직각으로.
“송구합니다, 각하. 이 늙은이가 나이가 먹어 상황 파악이 많이 느려졌나 봅니다.”
그러더니 마차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공녀님. 부디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아…… 예, 예! 그럼여. 얼룬 일어나세여!”
내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휘휘 내젓자, 시종장이 더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게쓰니까 일어나시라구여…….”
도저히 내 할아버지뻘은 되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더 빨리 흔들었다. 하지만 헤이녹스는 이 손짓마저도 오해했는지, 한겨울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시종장을 꾸짖었다.
“부담스러우니 멀리 떨어지지.”
“예.”
‘아…….’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입을 떡하고 벌렸다.
“하, 할아부지한테 저 멀리로 가버리라고 하다니…….”
나는 여전히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지만 헤이녹스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나는 그 뻔뻔한 모습에 차라리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래. 내가 뭐라 한들 바뀔까. 포기하자 포기해. 저 성격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건 아주 멍청한 생각이야.’
내가 해탈에 지경에 가까워지던 때, 헤이녹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내려라. 마차가 높으니.”
나는 헤이녹스가 내민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마차 아래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은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눈앞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
흰 벽 위로 넝쿨이 자라는 듯한 모양으로 박혀 있는 금색 테두리.
성은 온통 하얗고 금빛이 맴돌았으며, 성문의 바로 앞까지 다홍빛의 데이지와 노란 튤립이 길을 둘러싸고 있었다.
가만 서서 궁을 둘러보는 중, 뒤따라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렌자드가 내게로 다가왔다.
“너는…… 황궁 처음 보지?”
“응.”
내가 황궁을 구경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하자 렌자드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체드만과 대화하던 헤이녹스가 다가와 말했다.
“들어가자.”
연회장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은 헤이녹스의 얼굴을 보자 몸을 바로 굳히고 긴장한 티를 냈다.
헤이녹스가 그들에게 초대장을 건네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시종 중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국의 수호자, 탄제리크 공작가 드십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안에서 환한 금빛이 비쳐 나왔다.
그 빛에 눈이 부셔 내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족히 50쌍은 넘는 눈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아…….’
나를 탐색하는 시선들이 발걸음마다 따라붙었다.
그 집요한 시선은 마치 아주 작은 약점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느껴져 무거운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집중을, 그것도 호의적이지 않은 관심을 받고 초연하게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벗어나고 싶어.’
저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록시나는 잘못한 게 없고, 저들을 처음 보는데도 나를 향한 그들의 적의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탄제리크가의 공녀라더니 별거 없네요.”
“제가 듣기론 저택에서도 무시당하는 신세라고 하던데요.”
“이곳에는 무슨 낯으로 온 걸까요? 뻔뻔하기도 하지…….”
“어린 게 벌써부터 이것저것 재고 드는 거죠.”
추측성 짙은 말들이 하나둘 입을 타고 번져 갔다.
나를 알지 못하면서 마치 다 안다는 듯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
그들의 말끝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이 말에 자신의 의견은 들어 있지 않고, 모든 건 남에게 전해 들은 것처럼.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짜증 나.’
나는 저런 부류가 가장 싫었다. 본인은 책임을 지지 않고 남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것.
‘위선자들.’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스스로가 깨어 있다 생각하며 상대방의 죄책감을 이용하니까.
저들은 내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속삭이는 게 아니다.
그저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척하며 반응을 살피는 걸 즐기는 것뿐.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조절하며 나를 깎아내리고 있지만 그들을 비난하거나 화내기엔 애매하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전생이나 여기나.’
과거에도 을의 입장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 일을 숱하게 당했다. 하지만 그땐 나서지 못했지. 먹고살기 급급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가 몇 마디 한다고 공작가의 밥줄이 끊길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이 난처해진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러기엔 시기가 너무 일러.
아직 헤이녹스가 내게 보이는 게 어떤 관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우선은 참아야지. 그래.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하는데 그때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중앙 홀 뒤편의 문이 열렸다.
“아…….”
뒤로 넘긴 포마드 머리와 보라색 눈. 그리고 특유의 저 오만한 표정은 분명 원작에서 표현되었던 황제 그대로였다.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귀족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짐이 연회를 연 이유는 이번 다들 알고 있겠지.”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나와 헤이녹스를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탄제리크 공작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모두들 자리해 줘서 고맙네.”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이 승전 축하 연회에는 탄제리크가의 공녀도 함께 자리해 줬네. 몸이 약하다고 들었는데 무리가 되진 않았나 걱정되는군.”
‘걱정되면 부르지를 말던가.’
어이가 없네. 참나, 황제라더니 뭐야.
‘완전 야비한데……?’
자기가 부르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적의 가득한 시선을 마주할 일도 없었을 거다.
사실 여기 모인 모두의 목적이 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아픈 거 다 나았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어떻게 연회에 안 오냐고. 참석 안 하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마음 같아선 ‘걱정되면 연회를 왜 열었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데, 그냥 부르진 않았겠지. 헤이녹스도 그랬잖아. 탄제리크로 태어나면 황제와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헤이녹스가 발걸음을 옮겨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탄제리크 공작! 내 이번 출정에서 자네의 활약에 크게 놀랐다네. 제국 전선을 어지럽히던 공국을 정리했다고.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헤이녹스는 황제가 허허거리며 하는 칭찬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만을 띠고 있었다.
“하여 짐이 그대에게 훈장을 내리려 한다.”
“과분합니다.”
“어허, 제국을 혼란스럽게 한 죄인들을 처단하였는데 이 훈장이 어찌 과분하단 말인가.”
황제는 그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시종장은 남색 벨벳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황제는 그 케이스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들어라. 루엔트 제국의 지도자, 알프레도 필리티움이 선언하니.”
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로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 나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자, 체드만이 고개를 숙인 채로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고개 숙여.’
나는 알겠다며 끄덕이곤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숙였다.
“탄제리크 가주, 헤이녹스 탄제리크에게 신뢰의 상징 레클피온 훈장은 내리노라!”
‘레클피온?!’
나는 익숙한 단어에 깜짝 놀라 바닥을 향한 시선을 들고 황제를 곁눈질했다.
‘레클피온이라면 원작에서 록시나가 황후에게 갖다 바친 훈장이잖아!’
레클피온 훈장이 특별한 이유는 어떤 죄를 지어도 한 번은 사해 준다는 면죄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황자가 황제가 되는 데 걸리적거리는 탄제리크를 무너뜨리기 위해 황후는 록시나를 시켜 그걸 가져오게 만들었지. 1황자와 혼인을 시켜 준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후 황후에 의해 역모죄를 뒤집어쓴 탄제리크 가문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저게 바로 그 훈장이라 이거지?’
저것만 있었다면 탄제리크는 그대로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죄를 짓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나중에 또 황후나, 다른 귀족들이 탄제리크를 견제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원작과 같은 일은 절대 없어야지.’
내 몫을 두 눈 뜨고 엄한 놈들에게 뺏길 순 없잖아?
이 가문이 망하면 나도 그대로 망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저 훈장은,
‘절대 안 뺏겨.’